일제강점기 및 해방 직후의 함흥


함흥은 조선 제4의 도시였으며, 흥남까지 합치면 경성-평양 다음가는 조선 제3의 도시 규모를 자랑했다.







한국전쟁 중, 함흥도 여타 북한의 주요도시와 같이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전후 1950년대 함흥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위, 초라한 함흥 공회당 앞에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위의 번화한 시가지는 온데간데없고, 휑한 거리만이 있다.


아직 스탈린식 사회주의 집체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이라, 기존과 같이 시장 등이 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동네 주민들.

머릿두건은 함경도 여성들 특유의 전통 복식이라고 한다.




재건중인 함흥과 재건사업에 참여중인 여성.



북한은 평양을 비롯한 모든 도시를 새로 재건해야 했는데

1950년대 북한의 역사는 '도시 재건'으로 요약될 정도로 모든 인민들이 재건사업에 참여했다.


이는 모든 북한주민들이 자신의 손으로 도시 재건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새로 일군 '사회주의 조선'을 조국이자 정체성으로 여기게 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한국도 산업화 시대가 찾아오며, 남북 사람들에게는 이제 ‘조선’이라는 정체성은 희미해지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전혀 다른 정체성이 이식된다.


함흥시는 당시 동독 드레스덴에서 파견된 500명의 건축전문가들이 재건을 주도했다.






전쟁 이전 함흥과 1960년 함흥 시가지 비교.


함흥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전형적인 동유럽식 사회주의 도시로 새로 재건되었다.

사실 대부분 북한 도시들은 이런 과정을 거쳤다.


다만 당시 세계적으로 북한의 도시 복구는 매우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았고

새로 지은 덕에 사회주의 도시 특유의 효율성이 잘 녹아내렸으며 녹지 및 근린공원도 잘 꾸려졌었다.






현대의 함흥



1970-80년대 북한 전역에 웅장한 우상화 건축물과 주체건축(북한식 박조건축)이 세워지며 

다른 공산주의권 도시와는 조금 다른, 북한식 도시의 모습이 된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경제위기로 평양을 비롯한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리를 제대로 못 해 매우 노후한 후진국 도시의 모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