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선거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실한 관계로 선거구나 의석의 당적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유의)

서양에서 치른 선거는 20세기 초반 자료도 넘쳐나는데 여긴 상대적으로 자료가 너무 없어서 애먹었음...

중국공산당과의 내전 중에 치른 선거인데다가 당시 중국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관계로 선거 결과의 정당성을 의심받는 선거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결점에도 1948년의 입법원 선거는 현재까지 중국 대륙에서 동시에 치른 유일한 직접 선거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짐. 국민정부 측은 재외국민까지 고려했을 때 1억 5천만 명에서 2억 명이 총선에 참여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투표한 사람의 숫자를 1억 명보다 낮게 잡는 자료들도 있음


투표율 자체가 자료마다 다른 관계로 표시할 수는 없지만 주로 도시 지역과 강소성, 사천성과 같이 국민당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높게 나왔음. 이를 국민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총선의 정당성을 부정하여 참여를 거부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국민정부에서 훈정에서 헌정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대외에 홍보하기 위해 선거 자체를 조작하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당시 공산당이 주장했던 것처럼 "부패하고 무능력한 국민당을 지지하는 인민이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음.


선거 방식은 중선거구제에 가까웠는데 그럼에도 인구가 많은 성들은 여러 구(區)로 분할했음 (사천의 경우에는 1구~10구로 분할)

또한 이 총선에서 여성 의원과 각종 직업 단체의 입법원 진출을 보장함으로써 이들의 대표성이 강화되긴 했지만, 1949년 중화민국 정부와 함께 입법원도 국부천대를 단행한 관계로 결과적으로 큰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림,,


사법원이 국민대회와 입법원이 수도 남경에서 소집되어야 하지만 남경을 잃은 관계로 국민대회와 입법원 위원들의 임기를 사실상 무제한으로 하는 판결을 내린 바람에 1960년대 이후로 몇 년에 한 번씩 증원선거를 치르긴 했지만 첫 입법원은 1991년까지 장장 43년이나 지속되었음.


과연 국민당이 대륙에 남았다 하더라도 헌정으로의 이행이 제대로 이루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