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늘어가는 기계 사용과 분업으로 말미암아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자립적 성격을 모두 잃어버렸으며, 이와 더불어 노동자가 느낄 수 있는 온갖 매력을 잃어버렸다. 노동자는 기계의 단순한 부속품이 되고,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단조로우며 가장 배우기 쉬운 동작뿐이다. 따라서 한 노동자에게 지출되는 비용은 거의 모두 그 자신을 유지하고 자손을 번식시키는 데 필요한 생활 수단(의 비용--역자)에 국한될 뿐이다. 그런데 모든 상품의 가격은 그 생산비와 같으며, 따라서 노동의 가격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노동의 지겨움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만큼 임금이 줄어든다. 그뿐만 아니라 기계와 분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노동 시간이 늘어나거나 정해진 시간안에 해야 하는 노동이 늘어나거나 기계의 운전 속도가 빨라지거나 하여 노동의 양도 그만큼 늘어난다."


이 인용문 부분도 사실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임금을 덜 주나 더 주나의 문제를 넘어 이제 단순 노동직은 소멸의 위기에 처했다. 그렇다고 본인은 러다이트 운동을 벌이자고 생각하진 않는다. 기계는 사람에게 있어 유용한 도구이며, 사람이 노동하는데 있어 보다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수행해주는 고마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 AI와 로봇의 시대를 맞이함에 있어, 단순 노동직종에 대한 기계와 노동자의 조화를 고민하든가 아니면 시대의 변화에 맞춰 기계 슈트를 사람에게 입혀 능률도 높이고 피로를 덜 들이게 하는 방안 등을 통해 인간이 기계와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구조를 생각해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AI와 기계를 노동의 대체재로 보는 게 아닌 보완재격 성격으로 보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2. "노동자들은 때때로 승리하지만 그 승리는 일시적일 뿐이다. 그들의 투쟁의 참된 성과는 직접적인 전과(戰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이 더욱더 넓혀지는 데 있다. 대공업으로 더욱더 발전해가는 교통과 통신 수단은 노동자들의 단결을 촉진하면서 각지의 노동자들을 맺어 준다. 이러한 연력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어디서나 같은 성격으로 벌어지고 있던 수많은 지방적 투쟁이 하나의 전국적 투쟁, 즉 계급 투쟁으로 집중된다. 그런데 모든 계급 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빈약한 도로망을 가진 중세의 도시민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룩한 그 단결을, 현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 덕택에 몇 년 안에 이룩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이제 사이버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저 멀리 있는 노동자들과도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공산/사회주의를 위해 노동자들이 단결하기 위해선 비단 우리나라의 노동자들과만 단결하거나 교류하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국제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이버 플랫폼 등을 통해 교류하고 단결하며 끝없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다만, 사이버라는 가상공간에서 우리는 동시에 혐오, 편가르기, 모욕, 극단적인 편견과 선입견에도 부딪히며, 이에 대한 극복과 편견 및 선입견의 타파도 역시 우리들의 과제일 것이다.


3.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운동은 소수의 운동이었거나 소수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압도적 다수의 이익을 위한 압도적 다수의 자주적 운동이다. 요즘 사회의 최하층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적(公的)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겹겹의 상부 구조 전체를 폭파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도 없고 허리르 펼 수도 없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내용상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형식상으로는 우선 일국적(national)이다.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연히 먼저 자기 나라의 부르주아지를 쓸어 버려야 한다."


마르크스의 저 말과 달리 현대에 들어서 프롤레타리아들은 굉장히 다원화되었다. 크게는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즉, 실무직과 사무직의 차이부터 해서 의사와 일반 사무직은 같은 선상의 프롤레타리아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프롤레타리아들 간에도 다원화된 차이가 이제는 생겨버렸다. 누구는 최저임금을 간신히 받아가며 생활하는 반면, 누구는 억대 연봉을 받으며 생활하는 노동자다. 해서 개인적으로 요즘 사회에서의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어 이 다원화된 분류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 지, 그 중에서 기득권을 쥔 노동자 다시 말해 법조계, 의학계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 지에 대해 고민이 생겼다.


두번째 문단의 경우 본인은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런 일국적인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며, 국제주의적인 성격을 완전히 포기하기엔 매체들의 발달과 SNS를 통한 편리한 소통 등의 이점을 버리는 것이기에, 마냥 일국사회주의 노선만을 고집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공산챈의 동지들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상해보고 제시한다면 감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