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카라는 1949년, 프랑스령 오트볼타(현재의 부르키나파소)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바람대로 가톨릭 사제가 되는 대신 그는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기로 했고, 군이 적성에 맞았던 것인지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전쟁영웅의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던 와중 그는 군 내의, 그리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조리에 문제의식을 품게 되고, 이러한 부조리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며 그 자신도 한 명의 사회주의자가 된다. 군 내에 '사회주의자 클럽'까지 결성할 정도의 열렬한 사회주의자인 상카라는 1983년,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켜 33세의 나이로 대통령직에 오른다.


상카라의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은 큰 효과를 보였다. 취임 당시 -1.8%에 그쳤던 부르키나파소의 경제성장률은 그의 4년 남짓한 임기 동안 연 8%까지 큰 폭으로 치솟았고, 15억 불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 역시 약 24억 불까지 상승했다. 그의 임기 동안 부르키나파소의 취학률은 6%에서 22%까지 올랐고, 에이즈 발병률 역시 4년 만에 6%까지 하락했다. 탈권위적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그의 집무실과 관저는 검소했고, 자녀들은 일반 공립학교에 다녔으며, 그의 출퇴근 수단은 자전거 한 대뿐이었다. 크고 작은 실패는 있었지만, 대통령으로서 상카라는 아프리카의 흔한 후진국이었던 부르키나파소를 일으켜세운 위대한 지도자로 전세계의 칭송을 받았다. 부르키나파소라는 국명 역시 그의 작품이다.


그러나 냉전 시기의 사회주의자 상카라는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의 경계를 사지 않을 수 없었고, 주변국의 독재자들에게도 그는 자기들의 독재 체제에 있어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CIA는 상카라를 제거하고자 한때 그의 동료였던 정적 블레즈 콩파오레를 포섭해 쿠데타를 사주하였고, 1987년 10월 15일, 그는 반란 진압 도중에 수도에서 붙잡혀 그의 친구 블레즈 콩파오레의 손에 처형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4년 만이었다.


상카라를 끌어내리고 대통령 자리에 앉은 콩파오레는 상카라의 개혁적 정책을 모두 뒤엎고, 자국의 '열악한' 경제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그 결과 그의 임기 동안 상카라가 이룩했던 모든 업적은 무너졌고, 부르키나파소는 지금까지도 외채와 해외 자본에 휘둘리는 아프리카의 최빈국 신세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