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와 마왕이 존재하는 어느 세상, 마왕의 횡포에 인간들은 고통받으며 살아갔다.


 마왕군의 공격에 차례차례 영토를 빼앗겼고, 살인과 약탈에 모두가 피해를 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마왕을 토벌하고자 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들을 용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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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이지 마왕"



 음산하고 스산한 어느 오래된 성, 그리고 성 안에 저 심연 속에 있는 어두운 방. 방 안에 용사는 마왕의 마법에 의해 손발이 묶여 있었다


 마왕의 강한 흑마법 탓에 빛의 가호를 용사라도 저항하기 어려웠다


 "아가트로 미르엘. 100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전설의 용사. 이 몸을 없애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고 하기에 기대했건만"


 미르엘은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팔을 옥죄고 있는 족쇠를 부쉬고 지금 자신을 희롱하고 있는 마왕, 이그드라실을 척결하고 싶었다


 "하하, 저항하려는 모양인데. 이 마법진은 상대의 마력을 빨아들여. 그렇게 저항할수록 넌 더 힘이 빠질껄?"


 확실히, 아까보다 마력의 힘이 약해졌다. 태생부터 일반인의 5배의 마력을 가진 미르엘 조차, 빨대가 꽃혀 물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보랏빛의 마법진은 반시계로 돌아가며 팔다리를 억압하고 있었다. 이미 마왕의 공격 탓에 몸에 심한 무리가 온 상태라, 미르엘은 저항할 수 없었다



 "기쁜가 보네. 이럿게 묶어놓고 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있는 거 보면 요새 마왕도 할게 없나 보지?"


 

 모래인지 피일지 모르는 물질과 섞여 나온 침을 뱉으며 미르엘은 조소를 지었다. 이미 산전수전을 겪어오며 그의 정신력은 왠만한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달랬다. 이제껏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겨왔듯이 이번에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거라 확신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고작 브레스 한 방에 당하실까? 그래도 넌 좀 재밌었어. 네 따까리들은 꼬리치기 한 번에 상체가 잘리던데 말이야"



 이그드라실의 독사 눈은 미르엘의 마음 깊숙히 있는 무언가를 건드렸다. 개구리떼를 한 마리 빼가 전부 먹어치운 눈 앞의 원수를. 그냥 잠자코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는 버거웠다. 태어났을 때부터 세상을 구하고 마왕을 무찌른다고 배워왔다. 그리고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미르엘은 이그드라실이 방심하던 사이를 노렸다. 


 "그 경멸에 찬 표정도 멋있는 걸?"


 그녀는 미르멜이 무너지지 않고, 정신을 붙잡는 모습에 꽤나 흥미가 생겼다.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고도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는 자는 처음이었다. 이제껏 수많은 용사가 자신에게 덤벼왔고, 그럴때마다 손쉽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미르엘처럼 끝까지 자신에 대한 적대심을 드러내는 인물은 없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이 몸한테 어울리는 남자지"


 미르엘은 자신이 헛소리를 들었다 생각했다. 용사와 마왕이라는 위치에서 둘은 서로를 사랑할 수 없을 턴데, 이그드라실은 점점 무시와 비웃음에서 말로 표현 못할 욕망과 기쁨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날만을 기다려 왔거든. 네 녀석을 밑바닥까지 떨어뜨린 뒤, 나에게 오게 만드려는 걸 말이야"


 이그드라실은 여성으로써, 미르엘에게 뜻밖에 얘기를 건넸다.


 미르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돌벽에 반사되어 방 전체에 울렸다. 분명 자신을 방심케 만들고 죽이려는 속셈이었다. 마왕족은 태생부터 악이기에 이런 말에 현혹되선 안된다고 스스로 되내었다.


 이그드라실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한발 내밀때마다 바닥에 고여있는 물소리가 퍼졌다. 미르엘은 그녀가 다가올수록 심장이 조여왔다. 살짝 숨만 잘못쉬어도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갈 것이었다


 "네 녀석을 예전부터 원해왔거든"


 "웃기고 있네. 그런 거짓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설마 기억을 못하는 건가. 좀 실망인데"


 그게 무슨 소리지? 미르엘은 자신의 기억을 탓하는 이그드라실의 태도에 잠시 궁리를 하였다. 지금 대면하기 전까지 마왕을 본 적은 없었다. 아무 일면식



 "나야 나, 레이주라고"


 레이주, 이 세글자가 흘러나오자 이제껏 당황하지 않던 미르엘 조차 크게 동요하며 몸을 떨었다. 안정적으로 작동하던 폐기능조차 돌에 막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잠깐만. 너 뭐라고 한거야"


 이그드라실은 손가락을 탁 하고 튕겼다. 그러자 괴물 같은 모습에서 미르엘과 비슷한 성인 여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레몬처럼 노란 머리, 피로 물들은 눈동자, 그리고 볼에 세겨진 어떤 낙인, 미르엘은 두 눈을 의심했다.


 "오랜만이야. 미르엘"


 어렸을 적 함께 친하게 지내던 소꿉친구 레이주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