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지역의 지질분포도


https://www.yna.co.kr/view/AKR20180117039400063

https://ko.wikipedia.org/wiki/%EA%B5%B4%ED%8F%AC%EC%9A%B4%ED%95%98


굴포운하는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연결하는 운하로, 성공했다면 태안이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 될 뻔한 일임. 태안 앞바다는 예로부터 호남 지방의 곡물을 한양으로 실어나를 때 무조건 지나야 했지만 '안흥량'이라 불리며 진도군과 해남군의 울돌목, 장연군(북한 룡연군)의 장산곶(물길이 거세서 심청전이 조선에서 로컬라이징될 때 장산곶을 인당수로 설정함)과 함께 물길이 험한 곳으로 손꼽혔고 많은 조운선이 태안에서 침몰했음(당시에는 항해 기술이 부족해 먼바다로 항해하는 것이 불가능). 이게 당시 서울의 식량 수급에 방해가 되는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였고 그래서 고려부터 조선까지 이어 500여년 간 여러 왕들이 이 운하의 착공을 시도했으나 하필 이 지역의 지반이 대보화강암(!)이었던 데에다가 조류로 인해 간신히 뚫은 곳도 다시 메워져 버렸음. 그리하여 전체 7km 중 3km만을 남겨두고 공사가 중단.


결국 조선 조정은 운하 건설을 포기하고 대안으로 굴착 구간의 양쪽에 조창(漕倉)을 설치하고 육로로 운송하고자 했지만 이조차도 배에서 내렸다가 다시 실어야 해 발생하는 보관비와 인건비 문제 때문에 실패. 아직도 이 터 주변에는 倉(창고 창) 자가 붙은 지명이 존재함.


마지막 대안으로 나온 게 바로 태안반도 남쪽의 돌출부로 길게 뻗어 있던 안면곶에 운하를 건설해 천수만을 통해 운송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음. 다행히? 운하가 개설된 지역은 고생대의 무른 퇴적암 지층이 분포하는 곳이었고 운하 건설은 순조롭게 진행됨. 안면도는 1638년 이렇게 조선에서 6번째로 넓은 섬이 됨.(이 설은 오랫동안 지지받아왔지만 관련 사료가 부족하다는 점, 실록 광해 8년(1616년) 기사에 이미 "공홍도(충청도)의 안면도(島, 원문은 道임)"라는 기록이 있다는 점, 안면도와 태안반도 사이 바다의 폭이 최소 160m로 경인운하(폭 80m)의 2배가 넘고 한국 서해안의 조수간만 차가 평균 6m에 이른다는 점(사실 이 점은 굴포운하의 실패 이유이기도 함), 문제의 안흥량은 근흥과 소원 일대로 일대의 바다로 안면도 북쪽이라는 점에서 신뢰도가 낮아서 최근에는 원래부터 섬이었다는 학설이 주류임.)


굴포운하 유적임을 알리는 안내판.


아무튼 수백년이 지나며 그렇게 운하는 잊혀져 갔고 운하지가 대부분 저수지나 논밭으로 바뀌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음. 그래서 국내 최초의 운하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도 높지만 조사가 미진해서 문화재로 등록조차 되어있지 않은 상황임.... 이유는 이곳이 서산과 태안의 경계에 걸쳐 있는 데다가, 관광도시인 태안군의 관광 자원 개발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임. 하루빨리 운하 현장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임.


이 운하 착공이 성공했다면 태안군과 서산시의 역사는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지도 궁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