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천에 덮힌 시신이 청진대학병원을 나오자, 기자들과 환자의 가족들이 가까이 모여들었다.
 의사들과 경찰들은 사람들을 밀어내며 구급차로 향했으나, 기자들과 환자의 가족들은 완고했다.
 "이번 사망자는 누구입니까?"
 "청진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입니까?"
 시체가 구급차에 실리고, 남은 의사들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인채 이야기하기 바빴다.
 "조금 전 청진 독감으로 치료 중이던 환자 한 분이 숨지셨습니다. 신원 등에 대해서는 질본에서 곧 발표할 예정입니다. 저희가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을 듯 합니다."
 환자들의 가족들 사이에 끼여있는 나는 의사가 하는 말 하나 하나를 빠짐없이 받아적었다. 혹시라도 방금 전의 시신이 우리 딸의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의사들도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버린 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은 내게 전화가 왔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보니 옆 마을의 김 영감님이였다.
 "영감님?"
 "응, 동규인감?"
 "갑자기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자네가 우리한테 감자 보내기로 했잖어?"
 깜빡했다. 몇 달 전 김 영감님께 상품성이 없는 감자를 보내기로 약속했는데 병원 앞에서 며칠을 바쁘게 보낸 탓에 깜빡했던 것이다.
 "영감님.. 죄송하지만 나중에는 안될까요? 제가 지금 사정이 있어서.."
 "나중은 무슨 나중인감? 우리도 많이 기다렸어! 돈을 이미 줬는데 이렇게 차일피일 미뤄지면 우리가 어떻게 자네를 믿고 거래를 하겠어?"
 ..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잠깐만 다녀오면 될 일이다.
 오랜만에 들른 집에 쌓아둔 감자 박스를 용달 트럭에 싣고 옆마을로 향했다. 감자 박스를 받은 김 영감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좋아하며 사람들을 시켜 상자를 창고에 보관했다.
 서둘러 다시 대학병원으로 향하자 여전한 대학병원 앞 풍경이 보였다.
 아까 확인하지 못한 사망자의 신원을 알아차리려 기웃거리던 참에 누군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자신을 윤상철이라고 소개한 사내가 어딘가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형씨,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하지."
 원래라면 언제 딸이 어떻게 될지 몰라 자리를 뜨지 않았지만, 처음 만났을때의 쾌활한 모습과는 달리 어두워보이는 그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말하며 그를 따라나섰다.
 병원 인근의 포장마차에 들어간 그는 말 없이 소주를 시켜 한 병을 말 없이 비웠다.
 안주도 먹지 않고 술만 들이키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슈퍼전파자인가.. 뭔가.. 아는가?"
 "슈퍼전파자요?"
 "내가 무식해서 잘 모르는데.. 오늘 신문에 나왔더라고. 슈퍼전파자 그게.. 한 사람이 여러 사람들한테 옮기면.. 그게 슈퍼전파자라고 하더라고."
 그는 이 지점에서 말을 멈추고 술잔에 술을 따라 한 잔 들이켰다.
 "형씨 성이.. 정씨지?"
 ".. 네."
 "감염되었다는 사람이 딸이고?"
 ".. 네."
 "형씨 나이가 50이 좀 넘었으니깐.. 딸 나이가 한 20대쯤 되겠네?"
 ".. 네."
 그는 말 없이 술을 한 잔 더 들이키곤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떨리는 손으로 주섬주섬 꺼냈다.
 그는 그 종이를 펴 나에게 건냈다.
 '청진 독감 슈퍼전파자는 정순봄(28)씨.. 최소 30여명 감염시켜..'
 충격적인 기사의 제목에 딸의 이름이 실려 있다는 것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윤상철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씨 딸이여?"
 "..."
 그는 말 없이 술을 한잔 더 들이켰다.
 "오늘 마누라가 죽었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그의 어두운 낯빛의 이유를 알아차리게 된 것이였다.
 "오늘 아침에 실려나왔더라고. 아무리 이혼을 했다지만은.. 참, 불쌍하더라고. 내 마누라가. 남편이 못나서 호강도 못 누리고 그렇게 갔으니.."
 "..."
 "응? 그렇지 않나? 그렇지 않어?"
 "..."
 그가 별안간 내 멱살을 잡고 엎어졌다. 술상이 쓰러지고, 그는 멱살을 잡은채 내 위에 올라탔다.
 "마누라가 죽었어.. 마누라가! 형씨 딸 때문에!"
 그는 젖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멱살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쥐어잡고 있었다.
 "동선이.. 그 망할 놈의 동선이 마누라랑 겹치더라고.. 이혼하고 시장에 식당에서 일만 한다고 소문이 난 마누라가, 오랜만에 나갔는데.. 하필 그 망할 동선이.."
 그는 내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풀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그의 굳은살이 박힌 손 사이로 눈물이 새어나왔다.
 나는 조용히 포장마차를 빠져나와 밤거리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문득 그가 절규하듯 외친 말이 떠올라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순봄이.. 순봄이도 불쌍한 애입니다.. 하나뿐인 애비는 돈도 못 벌어오고.. 자기 엄마 죽을때까지 치료비 하나도 제대로 벌어다주지도 못한.. 아빠로서 자격도 없는 놈입니다.."
 빛이 다 해 깜빡이는 가로등에 몸을 기댄채 말을 이어갔다.
 "순봄이가..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부릅니다.. 그렇게 잘 부르는데..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가수를 못 시켜줬어요.. 그런데도.. 싫은 소리 하나 없이.. 도시로 홀로 가서 시다 일을.. 오래 하면 폐가 상한다는 그 일을 8년을 했습니다.."
 차가운 겨울의 밤은 말을 내뱉을때마다 새하얀 입김을 만들어냈다.
 힘 없이 차가운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입김을 보며 괜스레 슬퍼져 그대로 가로등에 주저앉았다.
 "미안합니다.. 우리 딸이.. 의도치 않게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줘서.. 대신 사과드립니다.. 그런데.. 우리 순봄이.. 우리 순봄이 정말 불쌍한 애입니다.. 그것만.. 그것만 좀 알아주시면.."
 결국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말 없이 불이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불이 깜빡이던 가로등은 마침내 빛을 다 한 듯이 검게 물들었고, 나는 검게 물든 가로등 하늘 아래 다 하지 못한 말을 울음 속에서 내뱉었다.
 차가운 겨울밤의 바람이 온 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