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 주변엔 적어도 아까보단 훨씬 정교한 방어선이 펼쳐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모든걸 쥐어짜낸 모양새였다. 기지 시 등지에서 저항하던 병력을 포함해 카이로 지구 근교의 싸울 수 있는 모든 병력이 집결했다. 구형 팔코넷 포가 고정되어 시청 앞에 놓여있었다. 포병들은 포를 보호하기 위해 모래를 쌓았다. 도로에는 12파운드 컬버린 포가 1문 있었다. 중위가 포가 남아있냐고 물었다. 포병들은 대포 주변으로 모래 포대를 쌓았다. 군기를 해하는 소위 ‘겁쟁이’라 불리는 자들은 성벽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담당구역을 할당 받았다. 성채 안이었다. 우리는 검병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검병 1사단의 잔존병으로, 포트사이드 에서 처음 적군을 맞았고 카이로까지 밀려왔다. 검병들은 검을 머리위로 들어올리며 군가를 불러댔다. 그들의 사단은 반토막이 났지만, 겉보기론 그들은 사기가 충천한 것 같았다. 나는 처음에, 동쪽에서부터 수많은 부대를 바꿔가며 밀려온 나만큼 실전을 겪지 않았기에 이런 상황에도 아직 투지 따위가 남아있겠거니 생각했다. 예비군으로 소집된 후, 행정적인 부대를 거친 뒤 한자리 숫자의 사단에 배치되었다. 그때는 나도 군가를 부르고 소리를 질러댔다. 수에즈에 있을 때는 두 자리 숫자의 이름 모를 예비군 사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때부터 내 말수는 줄어들었다. 카이로에 와서는 내가 무슨 사단에 편제되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검병 그들의 눈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군가를 쥐어짜고 있었다.
곧이어 적군이 성채에 당도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방어준비를 하고 있는 병사들 사이로 손수레가 이리저리 다녔다. 그 안엔 와인이 들어있었다. 인근 귀족들의 집에서 털어온 것들이라 했다. 끝이 약간 깨진 컵에 와인이 따라졌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딱 한잔씩 허락 되었다. 빈 병 들은 바로 수레에 담기어져 화염병을 만드는 곳으로 보내졌다. 몸이 따뜻해졌다 병사들은 간만에 서로 웃어댔다.
계단아래로 머스킷을 쏘아댔다. 올라오던 적군은 급하게 몸을 움츠렸다. 내 앞에 서 있던 검병이 검을 휘두르다 적군의 대응사격에 고꾸라져 계단 아래로 쳐박혔다. 검병과 나는 계단을 벗어나 복도에 있는 방어벽으로 급하게 몸을 숨겼다. 방어벽에 있는 병사가 계단의 문을 노려 머스킷을 쏘았다. 계단 옆 게시판에 걸려있던 종이들이 흩날렸다. 건물은 진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적군은 대포를 코앞까지 끌고와 성채를 향해 사격을 하고 있었다. 통로를 통해 같은 층 다른 방어벽이 뚫렸다는 절규가 들렸다. 검병 둘과 나는 무기를 들고 계단의 적군을 피해 다른 통로로 윗 층으로 올라갔다. 4층, 성채의 끝이었다. 잔존한 모든 병력이 4층으로 올라왔다. 성채 곳곳에서 남아있던 잔존병력들의 소리는 더 이상 통로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탄약이 부족했다. 가진게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죽은 검병의 품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검술 하나 제대로 몰랐지만 빈 머스킷보다는 나았다.
“여러분들, 리버시엔 용사들이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그만하십쇼 ! 항복하면--”
“좆까 개새끼야 !”
적군중 누군가가 소리치자 어느 예비군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웃었다. 적군 쪽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적군은 잠시 숨을 고르는듯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성채 끝 층에 남아있는 모든 물건 쌓은 뒤 남아있던 마지막 와인을 나눠 마셨다. 적군이 공세를 포기한 걸까? 혹시 성채에 깃발을 꼽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무너뜨리려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시금 계단 밑이 웅성거리며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끝이자 우리의 끝이라는걸 직감했다. 누군가가 군가를 불렀다. 시키지도 않았지만 모두가 그를 따라 불렀다. 그리고 군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교전이 시작되었다.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누군가 ‘불이다!’라고 외쳤다. 그 불 사이로 화려한 군복을 입고 총검을 붙인 갈색 머스킷을 든 적군들이 들어왔다. 화염을 뚫고 온 그 존재는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하나둘 적탄에 스러졌다. 나와 함께 계단을 올라온 검병은 머리가 터져 죽었다. 소리를 질렀던 예비군은 눈을 부릅뜬 채 피거품을 뿜어대고 있었다. 다른 검병이 군가를 이어 부르며 울부짖으며 저항하다 고꾸라졌다. 미쳐 다 흘리지 못한 눈물이 피와 함께 섞여 흘러내렸다. 모든 것이 그림처럼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검을 들었다. 하지만 미처 휘두르지도 쏘지 못한 채 어깨의 격한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나는 그제서야, 거기에 이르러서야 종말이 왔다는 걸 실감했다. 수에즈에서 후퇴할 때도, 시청에서 후퇴할 때도, 오늘도 어쩌면 나는 모든게 끝나간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적군은 성채 옥상에 자신들의 국기를 걸었다. 이렇게 나의 전쟁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