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법조인. 그리고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최초의 고졸 인권 변호사로서 부림사건 등의 변론을 맡으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1988년 김영삼의 제의로 정계에 입문하여,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명패사건 등으로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며 정치인으로서의 가치를 높였고, 이후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장관을 거쳐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 이듬해 2월 취임하게 된다.

선거 관련 발언 논란으로 인해 재임 중 헌정 사상 첫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했으나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되어 직무에 복귀하였다. 퇴임한 뒤 역대 대통령들 중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고향 봉하마을에 귀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2008년에서 2009년까지 친형 노건평 등 친인척의 비리로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봉하마을 사저 뒷산의 부엉이 바위에서 스스로 투신하였다. 그후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지만[12] 결국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루어졌으며, 국민장 기간동안 봉하마을과 전국 분향소에서 1000만에 달하는 조문 인파가 몰렸다. 본래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기로 되어있었으나, 본인이 유서에서 화장해달라고 의사를 밝힘에 따라 5월 29일 발인 후 수원연화장에서 화장되었다. 유골함은 정토원에 임시 안치되었다가 7월 10일 봉하마을 사저 근처 묘역에 안치되었다. 이 묘역은 2010년 국민박석설치를 시작으로 일종의 공원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의 최측근들, 그의 핵심 이념들을 공감하는 정치인들로 대표되던 친노 세력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에 당선되기 전에 형성되어 개혁국민정당과 새천년민주당에 있다가, 참여정부 출범 뒤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정권 2년차인 2004년에 있던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과 그에 따른 국민들의 심판으로 세력이 극대화되기도 했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지지도가 정권 후기에 크게 떨어져 '폐족'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었으나, 그의 죽음 이후로 추모 여론이 일어, 그의 사망 1주기와 선거 기간이 겹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등을 기점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빠르게 재결집하기 시작했다. 이후 친노 세력은 분열을 거듭하다, 노무현의 친구이자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을 구심점으로 뭉쳐 친문으로 재편됐고, 2017년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그가 바라던 지역주의 해소가 상당부분 진척되는 등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정치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