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게이머 네모 자서전 

굳게 믿는 힘(思い込む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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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

전업 프로게이머가 되고 1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에는 "무얼 해야 좋을까?"라며 불안해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회사 업무를 하던 시간대가 전부 비어버렸으니까 말이죠. 그만큼 게임을 하는 시간은 늘었지만, 그 이외의 시간에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고민이었습니다. 프로게이머로서 강해야 하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고, 추가로 하고 싶었던 e스포츠 관련 컨설팅을 하고 싶다고 해도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죠.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니 하루 24시간이 앗 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말더군요.

매니지먼트를 부탁한 회사인 웰플레이드 라이제스트의 멤버들과 얘기를 나누며 제가 프로게이머로서 하고 싶었던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문서로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문서나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은 그렇게까지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정리한 자료는 주위에 공유할 수도 있고, 자료를 정리하며 머릿속에서 방향성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도 터닝 포인트를 맞이할 때마다 이렇게 문서로 자료를 정리했죠. "프로게이머로서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시작한 활동 중 일부가 1장에서 적은 사이슌칸 솔 구마모토에서 했던 활동과 이번 장에서 적은 커뮤니티 제작, 인터넷 방송입니다.

'겸업'에서 '전업'으로 전향하자. 그렇게 마음먹은 이후 다시금 자각한 것이 "지금까지 나는 게임을 업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겸업 시절 프로게이머라는 직함을 달고 활동했을 때, 기업을 스폰서로 두고 대회에 나가거나 이벤트에 나가 수입을 얻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하는 일이라고 해 봐야 "결국,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며 놀고 있었던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 거죠.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겸업 프로게이머 활동 시절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처음에 입사한 회사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던 때는 평일 낮 시간은 회사 일이 있으니 출근 시간에 SNS를 확인하며 게임 자체나 제가 사용하는 캐릭터의 최신 정보를 수집하고 밤늦게 퇴근한 다음에 그걸 실제로 시험하고 남들과 대전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휴일이 되면 국내외의 대회에 출전하는 나날을 보냈죠.

첫 회사를 그만두고 스퀘어 에닉스로 이직한 뒤에는 재량노동제로 근무하게 되어 연습할 시간이 좀 더 늘긴 했지만, 그래도 여유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회사에 출근하고 제가 맡은 일이 끝나면 "그러면 연습하러 가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연습하러 가고, 해외 대회가 있으면 현지로 날아가 시합, 시합이 끝나면 귀국, 그대로 출근했다가 다시 퇴근하면 연습, 그다음 날에는 다시 회사⁠⁠⁠… 이런 사이클을 계속 반복했던 시기였죠. 서서히 이게 보통의 생활이라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회사 업무를 하고는 있어도 머릿속은 온통 격투 게임 생각뿐. 그렇지만 그 격투 게임 생각을 심도있게 해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결단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결과를 내야만 해"라는 초조함에 쫓겨 발전도 없이 머릿속에 격투 게임만 가득한 채로 매일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대로 살면 안 되는 거 아닐까?"라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연습을 하면 어떻게든 실력은 늘지만, 강해지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공부를 하는 등의 노력은 안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죠.

예를 들면 시합에서 이기지 못했을 때, 프로가 되기 전의 저는 적극적으로 사용 캐릭터를 바꾸곤 했습니다. 격투 게임에서는 업데이트로 캐릭터 성능이 변하는 경우도 있고, 늘 쓰던 것과 다른 캐릭터를 사용함으로 인해 다른 시점에서 새로운 발견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용 캐릭터를 바꾸면 시합에서 그 캐릭터의 성능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스폰서가 붙어 겸업 프로게이머가 되고 해외 대회 원정도 늘어나 스케줄이 하드해지자, 그 연습을 할 시간을 확보하기 힘들어졌고 앗 하는 순간에 다음 대회가 눈앞에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지금 가지고 있는 무기만 가지고 전력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죠.

그와 함께 게임도 왠지 모르게 재미가 없어져 성적도 좀처럼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 굴레를 벗어보려고 시도했죠. 코로나 사태가 닥쳐오기 조금 전, 2020년쯤의 일입니다. 당시 소속되어 있던 팀 리퀴드와 한 해에 나가는 해외 대회 횟수를 조금 줄이고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상담했습니다. 팀 리퀴드에서는 OK 사인을 주었죠. 그런데 결국 코로나 사태가 닥쳐 큰 대회가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해외 대회 자체가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그사이에 사용하는 캐릭터를 여러 번 바꾸어 보았습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최대한 다양한 캐릭터를 사용해 보자,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써서 대회에도 나가 보자. 왠지 모르게 느끼고 있던 막막한 느낌을 타파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 본 겁니다.

하지만 이 시도가 성적으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원래 쓰던 캐릭터를 쓰는 쪽이 승률이 더 잘 나왔다는 얘기죠.

저는 이때 깨달았습니다. "재미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라고요. 바꿔야 할 것은 캐릭터가 아니고 저 자신의 마음가짐이었던 겁니다.

저는 자신을 쉽게 질리는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를 그렇게 오래 계속하다니 대단하네요"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도 계시지만, 격투 게임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당장 저부터 메인으로 플레이하는 게임 타이틀을 꽤 많이 바꾸기도 했고, 캐릭터도 바꾸고 있죠. 제가 프로가 될 때까지 게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플레이하는 타이틀이나 캐릭터를 질리지 않도록 꾸준히 바꿔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질렸다"라거나 "재미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게 '취미'이고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직업이라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죠. 실제로 저는 회사에 다니던 때, "시스템 엔지니어 일에 질렸다"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앞에 적었던 것처럼 지금까지 저는 "결국 내가 좋아하는 걸 가지고 놀고만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게임을 직업으로써 진지하게 마주하자. 게임에 질렸다는 식의 감정은 일단 지워 버리자. 이렇게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제가 게임으로 먹고살 수 있는 것은 역시 실력이 있기 때문이니까, 일단 실력부터 쌓자. 실력이 있으니 대회에 나갈 수 있는 것이고, 팬 여러분의 응원도 받을 수 있는 거라고 말이죠.

마음가짐과 함께 바꾼 것이 이기지 못했을 때의 공부 방식입니다. 그중 하나가 승률이 좋은 플레이어의 요소를 탐욕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었죠.

지금까지의 저는 굳이 말하자면 선구자형 플레이어였습니다. 캐릭터의 특징을 재빨리 포착하는 것이 특기이며, 다른 플레이어가 많이 쓰지 않는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새로운 요소나 공략법을 개발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꼈죠. 하지만, 게임이 업데이트되어 제가 쓰는 캐릭터가 약해졌다고 느끼고, 지금까지 가능했던 행동이 불가능해지는 등의 일로 답답함을 느낀 적도 많았죠. 다른 사람에게는 강하다는 얘기를 들어도 스스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항상 "이전 버전이 좋았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이런 자신이 무척이나 싫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 생각에 빠지면 제 모티베이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해 보는 게 지금까지 제가 취하던 방식이었습니다. 다만, 앞에서 적었듯 그 방식으로는 더 이상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없었죠.

그때, 원래 제가 사용하던 '유리안'이라는 캐릭터를 토키도 선수가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토키도 선수는 캐릭터를 이제 막 바꾸었던 참이라 굉장히 즐겁게 캐릭터의 특색을 끌어내고 톱 클래스에서도 좋은 승률을 거두게 되었죠. 제가 쓰는 캐릭터를 다른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걸 보면서, 제가 끌어내지 못했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는 토키도 선수의 플레이를 연구하며 토키도 선수와 비슷한 방식으로 플레이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못 한다고 느끼는 부분은 나름대로 연구해서 개선했습니다. 그러한 연습을 거듭하면서 제 성적도 올라가기 시작했죠.

성적이 올라감과 함께 제 의식도 바뀌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가령 이기지 못하더라도, 희귀한 캐릭터로 굉장한 플레이를 보여주어 팬들이 즐거웠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진지하게 승리하는 것, 그리고 철저히 승리법을 연구하는 방식을 추구하게 되었죠.

예전에는 업데이트로 제가 쓰는 캐릭터가 약해졌다고 느끼면 화가 나거나 풀이 죽기도 했지만, 그런 감정도 별로 솟아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 이번에는 이런 느낌이구나"이라고 결론짓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죠. 이렇게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은, "이것은 직업이다"라고 인식한 후에 나올 수 있게 된 위기감의 표현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야 물론 직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예전에 저는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게임으로 먹고산다는 건 무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국내외의 플레이어가 프로 계약을 맺고, 게임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저도 게임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겸업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며 게임으로도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당시에는 진지한 의미로 "취미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게임으로만 생계를 꾸린다"라고 결심했을 때, 처음으로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되었죠. 그와 동시에 그에 따르는 위기감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각오가, 이 때가 되어서야 정말로 가능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