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게이머 네모 자서전 

굳게 믿는 힘(思い込む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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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믿는 힘’을 지탱하는 것은 분석과 행동


회사원 일을 하는 동시에 프로게이머가 되었다고 얘기하면 “대단하시네요”라는 반응을 자주 듣게 됩니다. “바쁘지 않으셨나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긴 했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e스포츠라는 개념이 일본에 정착하지 않은 시기에 본인 힘만으로 스폰서를 개척하는 건 힘들지 않으셨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꽤 고생하긴 했지”라는 생각 또한 듭니다. 다만 제 입장에선 결국 게임을 계속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포기하지 않고 달려왔을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다다를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3장에서 적었던 ‘굳게 믿는 힘’ 덕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폰서를 찾아다니던 때도, 마음속으로는 “어떻게든 구해지겠지”라고 당연한 듯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믿음의 근거는 주변의 플레이어에게 스폰서가 붙었다는 것이었죠. 자연스럽게 “나한테도 당연히 스폰서가 붙겠지”라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근원은 저 나름의 분석입니다. 해외 대회에 출장하면서 해외의 e스포츠 신을 관찰하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 대회 규모가 확대되거나 관객 수와 상금 총액이 늘어나는 데에 눈에 띄게 속도가 붙었습니다. 동시에 일본에서도 ‘e스포츠’라는 단어를 미디어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되면서, 슬슬 일본에도 때가 오는구나 하는 감각을 받았습니다.


그에 더해, 이 시기부터 PC와 플레이스테이션 4 간 크로스 플레이가 시작되어 어느 기기에서도 같은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변화를 접하고 “스폰서 영업을 하기 쉬운 토양이 조성되었군”이라고 판단하고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던 것 또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영업을 할 때도 “e스포츠에 힘을 싣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라는 고민을 품은 회사에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전혀 흥미가 없는 기업이라면 회사에서 상대도 해 주지 않을 테고, 거꾸로 방침이 명확한 회사여도 허들이 높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볼 때, 사업에 흥미는 있지만 길을 헤매고 있는 회사라면 제가 제안하기에 따라 스폰서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저는 처음부터 프로게이머라는 길을 선택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만큼, 조금이라도 확신 내지는 충분한 반응이 없다면 그 길로 방향을 틀고자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이는 프로게이머가 되는 일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죠. 어느 게임에 출전할지를 고를 때도 저에게 승산이 있는지, 충분히 싸울 역량이 있는지를 반드시 고려했습니다. 3장에서 적었듯이 주 종목을 ‘얼티밋 마블 vs 캡콤 3(UMVC3)’에서 ‘울트라 스트리트 파이터 4(울스파4)’로 바꿨을 때도, UMVC3가 싫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UMVC3는 국내에선 공식 대회가 열리지 않는 데다 그나마 있는 것도 커뮤니티 대회뿐이고, 그런 대회에선 상금이 나오지 않아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으니 울스파4가 더 낫겠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굳게 믿는 힘’의 두 번째 근원이 되었던 것은 행동입니다. 스스로 어느 정도 분석한 후 생각이 끝나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 행동의 첫 번째는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 것입니다. e스포츠 시장이 좀 더 커질 것 같다던가, 이 회사라면 스폰서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는 정보 수집은 물론 저 스스로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반드시 얘기를 나눠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런 것들을 구상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솔직하게 물어보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충분한 반응을 얻을 수 있는지가 포인트입니다. 완전히 목표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르는데 자기 생각만 고집한 채 행동해 봐야 의미가 없고, 잘 모르는 일을 혼자서 생각해 봐야 진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결과만 보면 큰 성과가 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만, 일단 남들과 만나 얘기를 나눠 보면 좋든 나쁘든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나 생각은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습니다. 제가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는 얘기를 주위에 하지 않았다면, 분명 주변 사람들은 저를 프로가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이미 회사원으로 일하는 동시에 대회에 나가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말이죠. 거꾸로 남들에게 “스폰서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얘기해 두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들은 분께서 제게 에일리언웨어를 소개해 주셨던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양한 사람에게 정보를 받았던 거죠.



얘기를 나누는 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과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라고 말은 했지만, 이때 누구와 이야기하는지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는지 여부죠. 예를 들어, 같은 내용을 같은 방식과 같은 태도로 얘기한다고 해도 상대에 따라 제대로 들어주는지의 여부가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고 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죠. 작업 중인 업무에서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고 가정해 보도록 합시다. 상담을 받아주는 상대가 상사든 동료든, 같이 야근을 하고 있는 도중에 제가 질문을 했을 때 “자네도 열심이군”이라며 격려해 주시는 분도 계시지만 “이렇게 바쁜데 말 걸지 마”라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인의 생각을 얘기한다면 당연히 전자의 상대가 적합할 겁니다.


직장에서는 낮 동안 여러 사람을 관찰하며 얘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지만, 스폰서 영업처럼 잘 모르는 사람과 만날 때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는 될 때까지 부딪혀볼 수밖에 없죠. 사람과의 만남은 어느 정도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면도 있으니, 만나서 얘기하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단념하고 다른 사람으로 넘어갑니다. 좋은 사람과 만나게 되면 행운이라고 여기는 거죠.


그다음으로, 상담할 때는 너무 긍정적이지 않은 사람을 고르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요”라고 상담했을 때,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긍정적인 말만 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그런 말만 해 주는 걸 듣고 있으면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라는 생각이 들어 참고하기 어렵죠. 충분히 가까운 상태에서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이렇게 바꾸면 가능하지 않겠어?”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의견이나 “그건 아무래도 어렵겠는데”라는 부정적인 측면에서도 지적해 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실패담을 명확하게 얘기해주는 분이나, “내 경우엔 이랬어”라면서 자기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얘기해주는 분도 계신데, 이런 분들의 의견은 아이디어 레벨이라고 할지라도 현실적이어서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상담을 받아주는 입장이 되었을 때도, 제 경험을 들어 얘기하려고 늘 신경 쓰고 있습니다. 곁에 고민하는 사람이 있으면 제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나라면 그렇게 할 거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굳이 말을 꺼내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까 말이죠. 고민을 해결할 구체적인 방책이나 제안을 하지 못했다고 해도, 제 경험을 통해 전할 수 있는 조언은 반드시 있을 거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프레젠테이션은 적당히 만들어서 일단 보여준다


저는 남들에게 “이런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얘기할 때는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듭니다. 스폰서를 해 줄 기업을 찾아다닐 때나 스퀘어 에닉스에서 퇴사하고 웰플레이드 라이제스트에 매니지먼트 의뢰를 하러 갈 때도 그랬죠.


스폰서 영업을 처음 할 때는 따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로 담당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지금도 이야기하는 데 최종적으로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자료를 준비하게 된 것은 상대가 제 실적을 모른다면 이야기해도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정보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한, 상대가 저를 잘 알고 있는 경우에도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정리해서 보여주지 않으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상정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 때 제가 취하는 방식은 “적당히 만들어지면 남들에게 보여준다”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만드는 도중에 보여줘도 돼?”라면서 깜짝 놀라는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어디까지나 제 얘기지만, 마지막까지 완성하지 않은 채 골자가 만들어지면 남들에게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짐작이 가실 수도 있겠지만,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보여주는 대상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진다는 이미지가 있을 겁니다. 게다가 이는 사람에 따라 꽤 차이가 나죠. 제가 스폰서 영업을 하던 때를 예로 들자면, 지금까지 대회에서 쌓은 실적이나 활동 내역 등 저를 알리는 것을 전제로 한 정보가 많은 쪽이 좋을지, 이런 일을 하고 싶다는 제안을 상세하게 적는 것이 좋을지에 따라 정보를 다르게 적어두기도 했고, 문자로 된 설명이 많은 쪽이 설득력이 좋다, 반대로 화상이 있는 쪽이 보기 쉬워서 좋다는 식으로 취향에 따라 갈리기도 했습니다.


자료는 상대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자료를 만들었다고 생각해도 그 자료가 상대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면 그다지 효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부 완성하기 전에 주변의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 자료, 어떻게 생각해?”하고 물어봅니다. “이건 안 되겠는걸” “이런 정보도 적어두는 게 좋겠어” 같은 조언을 듣거나, 비슷한 케이스의 샘플 자료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기에, 늘 참고하고 있습니다.


상대와의 관계성에 따라서는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주는 당사자가 자료를 그 부하나 팀원에게 보여주는 일도 있습니다. 일단은 간단한 문서만 만들어서 “이런 식으로 정리해서 보여드리고 싶은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죠. 어떨 때는 그 자료가 부서에서 검토될 때나 좀 더 윗선의 사람에게 설명할 때 사용되는 일도 있기에, 상대 입장에서도 필요한 자료가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 플러스가 되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상태에서 보여주기는 부끄럽다던가, 상대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완성되지도 않은 자료를 보여주다니”라는 꾸중을 들을지도 모르죠. 그럴 때를 대비해 신중하게, 얘기를 들어주는 상대를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누구에게 보여줄지 잘 관찰하면서 판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