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큿...!"


나무 단검이 들어 올린 팔을 베고 지나간다. 약간의 통증과 함께 가드가 깨지며 자세가 흔들린다. 뒤이어 나를 향해 날아드는 반대 손에 들린 단검. 나는 다시금 방어 자세를 취해 단검을 막아냈다.


"뭣...!"

"... 후우..."


전투 페이즈가 끝나자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하는 에르가. 나는 방어 자세를 풀며 숨을 돌렸다. 훈련용 쌍 단도는 2의 피해를 2번 가하는 카드. 수비 자세 스킬과는 완전히 역상성에 해당하는 카드였다.

그로 인해 실질적으로 들어온 피해는 0.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내가 세트한 카드를 확인한 뒤 카드를 골랐어도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거다.


"큭... 대체 무슨 잔재주를 부리는 거야... 드로우!"

"잔재주는 부린 적 없어. 네가 조금만 침착하게 대응했으면 내 카드를 허투루 날릴 뻔했는데. 아쉽네."

"큭... 그치만 이걸로 끝이다!"


에르가를 이를 갈며 카드 한 장을 세트했다.

카드 아카데미 보급용 덱의 유일한 은(銀) 등급 카드. 훈련용 철퇴. cost를 무려 4나 소비하는 대신 무려 12의 피해를 가하는 아이템 카드였다. 나는 내 패를 내려다 보았다. 현재 내게 남은 cost는 2. 버티기를 쓰면 이 공격을 견디는 대신 다음 턴에는 cost가 1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중이나 봉인된 검을 쓰기도 애매했기에 나는 버티기 카드를 쓸 수 밖에 없었다.


"하하! 이럴 때를 대비해 저 cost 카드만 쓰기를 잘했지! 내 남은 코스트를 전부 써서 널 뭉개주마!"

"... 하아... 허세는."

"뭐야?!"


아무 생각 없이 카드를 쓰다 어쩌다 보니 타이밍이 맞았을 뿐이면서 허세는 참 심하다.

내가 버티기 카드를 세팅하자 시작되는 배틀 페이즈. 에르가의 손에 나무 철퇴가 들리는 것을 본 내가 버티기 자세를 취하자 에르가를 나를 향해 돌진했다.


"이번에야말로 묵사발을 내주마!"


에르가가 휘두른 철퇴가 나를 향해 휘둘러진다. 가드를 올린 내 팔 위에 내려쳐지는 철퇴. 나는 옅은 신음을 흘리며 그 공격을 견뎠다. HP가 쭈욱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배틀 페이즈가 끝나고, 위를 올려다보자 내 HP가 1밖에 남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와 같았다. 그때와의 공통점이라면 이길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고 다른 점이라면 진다고 해도 내 목숨이 위험하거나 하지는 않다는 거였다.


'... 어차피 못 이기는데 여기서 항복해도 되지 않을까.'


내 손 패에 남은 카드는 집중과 봉인된 검 뿐. 현재 내 cost는 1. 집중을 쓴다고 해도 3이 되고 그러면 봉인된 검의 피해량은 6밖에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최대 cost가 3인 시점에서 내 패배는 확정된 상황이었다.


"대체 어떻게 버틴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포기하지 그래? 네 남은 HP는 1. 나는 8. 누가 이길지는 빤히 보이잖아?"

"... 포... 기?"

"그래, 포기. 네가 잘하던 거 아냐?"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비웃는 에르가. 그것을 본 나는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패에 있는 집중 카드를 잡고 슬롯에 세팅하자 서서히 눈이 감긴다. 그렇지만 내게 찾아온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었다. 물결 하나 없는 잔잔한 호수. 나는 그 위에 서 있었다.

포기. 내 삶은 언제나 포기의 반복이었다.

아이스와 크림을 만나 재능의 차이를 느껴 강한 브롤러라는 목표를 포기했다.

에르가의 지독한 괴롭힘에 굴복해 브롤러라는 꿈을 포기했다.

항상 목(木) 등급의 카드만 나오는 걸 보며 유명 메이커라는 길을 포기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단체를 만나며 삶의 의지를 포기했다.

지금도 포기하고 싶었다. 어차피 나아질 길이 안 보이니까. 내가 이길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으니까.


"... 봉인된 검, 세트."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쉬운 길로 발걸음을 옮겨왔다.

강한 브롤러라는 목표는 포기했지만 브롤러라는 꿈 자체는 포기하지 않았었다.

브롤러의 꿈을 포기했지만 유명 메이커라는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났다.

유명 메이커라는 길의 앞길이 막혔지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카드를 만들어내자는 의지를 불태웠다.

죽음을 앞에 두고 일순간 삶의 의지를 잃었었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지는 않다는 갈망으로 어떻게든 삶을 부지했다.

나는 항상 꿈을 낮추거나 새로운 길을 찾아 향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벽에 부딪혀 볼 차례였다. 끝내 포기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 없다. 내가 시도했다는 흔적만큼은 남길 수 있을 테니까.


"드디어 포기했냐! 으랴아아아!"


봉인된 검 카드를 세트하자마자 시작되는 전투 페이즈. 또 내가 사용한 카드를 확인하지 않고 달려드는 에르가. 나는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봉인된 검은 내 손이 아닌 배틀 필드의 중앙에 박혀 있었다.

잔잔한 호수의 위로 격한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닌 인공적인 흐름. 그게 에르가가 달려들고 있는 것임을 깨달은 나는 흐름이 내 눈앞에 닥친 순간 옆으로 몸을 옮겨 피했다.


"...! 뭣...! 검이...!"

"......"


눈을 감고 있어 눈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회피 효과의 발동으로 에르가가 사용했던 카드가 파괴된 것 만큼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배틀 필드 가운데에 놓인 봉인된 검에 다가갔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칫 방심했다간 매료될 것만 같은 느낌. 나는 봉인된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손을 통해 내 기력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내 모든 cost를 소모하는 기분인 걸까. 끝내 더 이상 빨려 들어가지 않는 기력. 나는 검 손잡이를 꽉 쥐며 중얼거렸다.


"... 아직... 부족해..."

"뭐?"

"내게 힘을 줘...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내가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는 힘을!"


나는 봉인된 검을 뽑아 들었다. 땅의 속박에서 풀려나자 내 기력을 흡수해 크기를 키워가는 봉인된 검.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나는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며 중얼거렸다.


"끝내 포기하게 된대도 상관 없어. 하지만... 지금 당장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 지더라도, 이기지 못한다 해도 저 개자식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힘을!"


내 소망을 들은 걸까. 봉인된 검이 내 손에서 더 많은 힘을 흡수했다. 순식간에 온몸을 향해 뻗어나가는 탈력감. 본래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의 기력이 빨린 탓일까.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손에 쥐어진 검은 더욱 묵직해졌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에르가를 향해 걸어갔다. 에르가가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나는 소리가 들린다.


"뭐, 뭐야 그 검은... 오지 마... 저리 가!"

"...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겪은 수모에 대한 복수다!"

"시, 싫어!"


나는 기겁하는 에르가에에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느릿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에르가의 몸을 가격하는 봉인된 검. 베는 것 보단 때리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자세를 다잡았다.


"이걸로 끝이야, 에르가!"

"히이이익...!"


다시 한 번 봉인된 검을 휘둘러 에르가를 공격한다. 배틀 페이즈가 끝나고 천천히 눈이 떠진다.

잔뜩 하얗게 질린 에르가가 내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내 손에 쥐어진 봉인된 검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배틀 종료, 승자. 로스트.]


"... 내가... 이겼다고...?"


당연히 다음 턴이 시작될 거라 생각했던 나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 cost는 분명 3. 에르가를 쓰러뜨릴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배틀 필드는 내 승리를 선언했다.


"... 거짓말... 이, 이건 무효야! 이 사기꾼! 뭐야 그 카드는! 너 같은 머저리가 구할만한 카드가 아니잖아! 거기에 배틀 도중에 cost가 늘어나고, 공격을 피하더니 아이템 카드가 사라지고, 무슨 개수작을 부린 거야!"

"윽...?!"


나 또한 어안이 벙벙한 상태인데 에르가는 갑자기 버럭 화내며 내 멱살을 잡아들었다. 저항할 틈도 없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힘 하나는 무식하게 강한 놈이다.


"이건 인정 못해! 이딴 사기나 쳐서 이기니까 기분이 좋냐?"

"켁... 나는..."

"... 하아... 에르가. 그쯤 해라."

"...!"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던져 모두가 보는 앞에서 두들겨 팰 생각으로 가득해 보이는 에르가. 내 힘으로는 떨쳐낼 수 없어 어쩌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다.

갑작스레 튀어나와 에르가의 목에 겨눠지는 목검. 그에 에르가가 깜짝 놀라며 나를 놓치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파..."

"에르가.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한 번 더 폭력을 쓰는 모습이 보인다면 브롤러 자격을 영구 박탈하겠다고."

"... 칫..."


에르가가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서자 목검을 거둬 어깨를 몇 번 톡톡 치는 회색의 늑대 수인. 그는 곧 내 쪽을 바라보았다.

눈가에 베인 흉터가 남아있는 늑대 수인. 한쪽 눈을 감고 있는 그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 씩 웃었다.


"잘 지냈니, 로스트?"

"... 야이바 선생님...?"


야이바 선생님. 카드 아카데미에서 근무하시는 선생님이다. 동시에 내 편의를 많이 봐주신 좋은 선생님이었다.

설마 선생님이 이곳에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선생님은 내게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네가 자퇴한 이후로 오랜만이네."

"그, 그러게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이바 선생님은 내 자퇴를 마지막까지 반대하던 선생님이었다. 그 반대에도 불과하고 나는 자퇴를 선택했기 때문에 조금 얼굴을 마주 보기 껄끄러운 선생님이었다. 별로 신경은 안 쓰시는 것 같지만.


"네 배틀 잘 봤어. 자퇴하기 전보다 많이 늘었더라."


목검을 카드로 바꾸어 덱 케이스에 넣고는 내 머리에 손을 얹어 살살 쓰다듬는 선생님. 선생님의 눈에 나는 어린 애로 보이는 걸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뭐,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설마 에르가를 이길 줄이야... 라고는 해도 원래도 에르가는 이겼지만 말이야."

"... 알고 계셨어요?"

"물론 알지. 에르가의 실력이 얼마나 뒤떨어지는지 내가 제일 잘 알아. 네가 고작 그 정도에 질 애가 아니라는 것도. 한 번 이기고 협박 당했던 거지?"


선생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초. 나는 에르가와의 배틀에서 이겼다. 그렇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에르가가 나를 끌고 가 때리며 협박했고 그 이후로 억지로 져주며 비참한 생활을 이어왔다.

내가 자퇴를 택할 수밖에 없던 것도 그 이유였다. 내가 자퇴하지 않는 이상 그 괴롭힘은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제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리고 이렇게 잘 자라줘서 고맙다. 키는... 안 컸지만."

"......"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째려보지 마."


내가 선생님을 째려보자 선생님은 키득키득 웃으며 나를 말렸다. 살짝 불퉁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버리자 선생님은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미안, 미안. 용서해줘 로스트."

"... 알겠어요 선생님..."

"아, 그리고 어차피 자퇴했으니까 선생님보다는 형이라고 불러주는 게 어때?"

"... 40살 먹고 17살한테 형 소리 듣고 싶어요...?"

"극... 40살... 40살이라니..."


내 말에 정곡을 찔린 듯 내 머리에서 손을 떼며 좌절하는 선생님. 여기서 아저씨라고 결정타까지 날려버리면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기에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보다 나는 다른 궁금한 것을 물었다. 어쩐지 선생님은 내게 용건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나저나 선생님. 배틀 에어리어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원래 여기는 잘 안 오셨잖아요."

"으으... 40살..."

"... 선생님!"

"으, 응? 뭐라고 했어?"


좌절감에 빠져 들리지도 않았던 건지 깜짝 놀라며 되묻는 선생님. 그 모습에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살짝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은 채 서 있다가 내게 말을 건네왔다.


"실은, 이번에 현장 체험 학습을 가게 됐거든. 요정의 숲이라고. 들어본 적 있지?"

"아, 네. 들어본 적 있어요. 분명 요정들이 사는 곳이라고..."


요정. 요정의 숲에 주로 서식하고 있는 종족으로 일단 기본적으로 몬스터로 분류되지만 수인에게 우호적인 종족이다. 수인의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가 기본이며 예외로 요정 왕 만이 수인과 비슷한 체구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현장 체험 학습에 자리가 비었거든. 나름 너는 내 애제자기도 하고 말이지. 그래서 너를 데리고 갈까 하는데..."

"... 선생님, 거짓말도 좀..."

"윽... 거, 거짓말 아냐! 진짜로 자리가 남았고..."

"그거, 선생님이 거절하신 거죠? 요정의 숲에 가는데 자리가 남을 리가 없잖아요."

"그, 그건..."


선생님은 내 물음에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했다.

요정의 숲은 초목이 무척 아름답고 공기도 좋은 곳이다. 운이 좋으면 요정과 만날 수도 있고 요정의 숲에는 마력이 넘쳐흘러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되어 휴양이면 휴양, 훈련이면 훈련, 탐험이면 탐험까지 모든 학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요소가 넘치는 장소인데 공지가 나면 1분 내에 자리가 다 찼으면 찼지 비어있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선생님은 일부러 들어오는 신청을 거절하고 자리를 남겨둔 것 같았다. 아마 남은 자리는 세 자리겠지.


"아이스랑 크림한테 퇴짜 맞아서 그렇죠?"

"... 응... 네가 오면 개네 둘도 올 테니까... 마침 네가 아카데미로 들어오는 게 감시 카메라에 찍혀서 말이지... 그러니까 부탁이야! 둘 좀 꼬실 수 있게 와주라!"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선생님. 그 모습을 본 나는 기겁하며 손을 마구 저었다.


"이, 일어나세요! 다른 학생들 보고 있잖아요! 알겠으니까!"

"... 휴우... 고맙다... 이걸로 아슬아슬하게 인원수는 맞췄다..."

"... 대체 언제 가는 현장 체험 학습인데 그래요?"

"응? 바로 내일."

"... 선생님!!!"


대체 얼마나 아이스와 크림을 꼬드기고 싶었으면 이렇게까지 긴박한 시간까지 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단 말인가.

결국 나는 선생님께 이런 저런 잔소리를 퍼부어야만 했다. 선생으로서의 자각이 있냐, 걸렸으면 어떡할 생각이었냐, 만약 내가 안 왔으면 아카데미 학장님께 무슨 변명을 할 생각이었냐 등.

내 잔소리를 들은 선생님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반성할 뿐이었다. 정말이지... 외모랑 어울리지 않게 너무 덤벙된다니까 이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