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도.. 이미 파괴됐군..”

초라한 행색의 프로토스는 고개를 힘없이 떨군다. 오른팔에 착용한 차원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찬란한 빛이 사그라지고 프로토스는 파괴된 유적을 뒤로 한 채 몸을 돌렸다. 젤나가의 유적을 누가 파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의심할만한 존재는 있지만 그가 남긴 어떠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저그의 흔적 또한 없었다. 도무지 같은 신에게 창조됐다고는 믿을 수가 없는 그 역겨운 생명체들은 분명 적을 처치하기 위한 훌륭한 매복능력이 있음에도 점막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를 구축한다는 독특한 생활방식으로 인해 쉽게 눈에 띄었다. 그는 자신이 두고 온 비행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힘들고 오랜 여정을 지내왔던지 그의 망토는 해어지고 빛이 바래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의 머릿속에 이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소리치던 그녀의 한 맺힌 목소리도 같이 들려오는 듯 했다.

 

“왜 지금입니까! 왜 하필 지금 떠나겠다는 거죠? 당신에겐 종족을 위한 최소한의 책임감도 없는 겁니까?”

“내 직무는 걱정하지 마시오. 모한다르가 고맙게도 내 직무를 대신 지기로 했소. 그리고 우리 종족은 당분간 안전할 거요. 우리의 고향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 세계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험이 다가오고 있소. 난 그 원인을 찾아야 하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의 신이 무언가 안배해 둔 것이 있다면 그것 또한..”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복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기 때문이다.

“당신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요! 당신이 이렇게 아집과 망상에 가득 찬 존재라는 것을 우리 동족이 미리 알았다면 내 어머니는 당신에게 정무관직을 맡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미안하오. 하지만.. 내 죄를 속죄할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믿소. 날 욕하고 원망하시오. 내가 행한 죄악은 부정할 수 없으니..”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생각을 정리했는지 다시 눈을 뜬 그녀의 입에서는 차가운 목소리만이 흘러나왔다.

“지금 떠난다면 당신은 더 이상 우리의 동족이 아닙니다. 명심하십시오, 정무관.”

“지금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소. 미안하오.”

그녀는 그 말에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는 돌아서서 가버렸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는 더 이상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고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또 다른 과거, 그가 가장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속삭임이었다. 그것도 가장 싫은 형태로.

‘그래 그럴 만도 하지. 넌 나를 죽였잖느냐. 네라짐의 대모, 가장 지혜로운 자였던 나를.’

“그대는 조종당하고 있었소. 그 악녀에게.”

‘오 그래? 하지만 그건 네 독단적인 판단이었지. 언제나 자네는 그랬어. 그 잘난 판단력으로 우릴 추방했던 칼라이들을 만났고, 그 칼라이들을 돕겠다는 너의 오만함이 아이어를 무너뜨렸어. 그렇지 않나? 그리고는 그들이 우리 고향까지 찾아오게 길을 열어주었지. 참으로 대단한 판단력이야.’

“부정하진 않소. 하지만 후회하지도 않소. 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 길을 걷는 것이오. 그 길을 걷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소.”

‘이미 다 죽고 파괴당하게 만든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군.’

과거의 속삭임은 조소를 크게 터뜨리며 그를 조롱했다. 아무 실체가 없는, 그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허상임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을 조롱하는 그 존재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저 다시금 자기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문득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갖고 사는 친구가 떠올랐다. 종족은 달랐지만 함께 치열한 전장에서 싸웠고, 자신처럼 저그에게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것을 빼앗긴 친구가.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자신이 남긴 말을 이해하고 납득하였을까.

‘넌 그 인간들마저도 조종했지 않나? 너의 실수로 발생한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서 인간들이 네 앞에서 죽어나가도록 만들었지. 아주 훌륭했어, 정무관. 내가 그대를 참 잘 파악했나보군.’

“그는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그런 나약한 존재가 아니오. 그는 강인한 친구요.”

‘그래, 그러니 더더욱 조종하려 들었지. 아이어에서 너로 인해 죽어가던 프로토스들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었던 그를 너는 단 한번이라도 도운 적이 있던가? 오히려 끝도 없이 위험으로 밀어 넣었지. 그리고 마지막엔 그 악녀를 구하라고 말했어. 우리 종족과 나를 파멸로 이끌었던 그 악녀를!’

“예언이 그녀를 구하라고 했소. 그녀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오. 나 또한 그 존재를 누구보다 저주해왔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라면.. 난 감당하겠소.”

‘그 악녀를 만났을 때 예언은 바꿀 수 있다고 큰소리 치던 게 바로 그대였지 않나? 우습군. 언제는 바뀌고 언제는 바뀌지 않을지 가려내는 건 또 그대의 잘난 판단력이시겠지?’

“더 이상 그대에게 휘둘리지 않겠소. 내 머릿속에서 나가시오!”

그는 단호하게 외치고는 정말로 눈앞에 누군가를 밀쳐내듯 오른팔을 휘저었다. 감정을 완전히 다스릴 수 없었는지 순간적으로 뽑혀져 나온 차원검이 벽을 갈랐다. 부서진 돌덩어리가 땅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의 바람을 들어준 것인지 과거의 망령은 더 이상 그에게 속삭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비행선이 설정해둔 착륙지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 행성에 도착하기 전 만난 칼라이 법무관 탈리스가 이끄는 병력들이 먼저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탈리스가 그들의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도 사원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 젤나가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원을 온 은하에 숨겨두신 걸까요?”

“나도 잘 모르겠소. 하지만 오늘 법무관 그대와 내가 우리 종족을 위한 무언가 중요한 발견을 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군.”

“종족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그대의 뜻을 도울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걸 것입니다. 저와 제 병력들은 준비됐습니다. 사원으로 들어간 그대를 쫓는 모든 것들은 기사단의 검 아래 죽을 것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정무관님.”

“고맙소.”

짧은 인사를 건넨 그는 조용히 사원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길에 도열해있는 칼라이 기사단원들이 차례로 그에게 예의를 표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답하고는 사원 안으로 진입했다. 사원은 불길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차원검으로 주변을 밝힌 그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극에 달해가고 있을 때 그에게 또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그래. 저번엔 그 누구였더라? 카라스? 그 자가 널 위해 죽었는데, 이번에도 훌륭한 방패막이를 가져왔구나. 너의 위선을 모르는 그들은 널 위해 시간을 벌고자 싸우다 죽는 것이 영광스럽겠지. 네가 누군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니까. 그렇지?’

“닥치시오.”

그는 나직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번엔 물러나지 않았다.

‘오오 정무관. 이젠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군. 하긴 그대는 언제나 독선에 가득 찬 존재였으니까. 네라짐의 수치, 이단자.’

“한가하게 그대와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니오. 우리 모두의 운명이 걸린 문제요.”

‘오호? 또 그 잘난 대의를 말하고자 하는가? 그 대의를 이루기 위해 죽어간 수많은 피는 그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니 견뎌내야 하겠지? 물론 넌 빼고 말이야.’

그는 그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 망령이 건네는 말들이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듯이 아팠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려했다. 그때 다행히도 앞쪽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려왔다.

 

“군주께서 신을 만나고 계신다. 행여나 사원 밖에 있는 어리석은 놈들이 방해하러 오지 못하게 철저히 막아라.”

탈다림이었다. 저 광신도들이 만나고자 하는 신이 누구든 간에 결코 이롭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차원검을 해제하고 조용히 은폐한 채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그러다 탐지기가 없다는 확신이 들자 조용히 그러나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입구를 막은 광신도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 중 한 명이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내 다시 앞을 주시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는 사원 내부 중심부에 위치한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제단 중앙에는 탈다림의 군주로 보이는 자가 양 팔을 벌린 채 서있었다. 그리고 그 자의 앞에는.. 피처럼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암흑이 있었다. 그가 지난 몇 년간의 방랑 끝에 알아낸 파괴자의 모습이었다. 탈다림의 군주는 그 존재에게 명령을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말라쉬. 나의 충실한 종이여. 네가 승천하려면 네 군대를 모두 모아오너라. 내게서 벗어난 종자들을 말살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너의 군대가 필요하다.”

“오 아몬이시여. 그리하겠습니다. 제 군대는 하나도 빠짐없이 당신의 명을 받들 것입니다.”

‘큰일이로군. 놈들이 움직인다면 이제 겨우 복구가 다 됐을 고향의 형제들이 위험하다.’

말라쉬라는 자와 파괴자의 대화를 듣던 그에게 이 의식을 중단시켜 놈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 그들의 행보를 늦출 방법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군주의 뒤쪽에 거대하고 붉은 수정에서 에너지가 흘러나와 파괴자에게로 들어가고 있음을 본 그는 저 수정을 파괴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실행에 옮겼다. 탈다림들은 그가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 채 의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살그머니 수정에 다가간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순식간에 차원검을 뽑아 수정을 갈랐다. 그리고 순간 그의 머릿속에 너무도 그리운 전우이자 존경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잠시 들려왔다.

“중추석이 그대를 희망으로 인도하리라.”

‘태사다.. 그대가 어떻게..’

그러나 생각을 지속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차원검이 수정을 가르는 순간 그 소름끼치는 소리에 탈다림들이 그를 발견한 것이다. 벌어진 수정의 틈에서 에너지가 제어되지 않은 채 흘러나가기 시작했고, 파괴자는 계속해서 이쪽 편에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졌는지 고통과 분노에 찬 고함을 질러댔다.

“저 자를 죽여라! 저 어리석은 이교도 놈을 당장 죽여!”

탈다림의 군주가 명령을 내리자 사방에서 탈다림 광신도들이 자신들의 붉은 차원검을 뽑은 채 달려들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갖게 된 능력으로 몸을 감추려했지만 추가로 나타난 탈다림들이 가져온 기계가 무자비한 포격을 퍼부어대는 통에 몸을 감출 새도 없이 포격을 피해, 그리고 사원을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탈다림들의 포격으로 부서져 나갔고 쉽사리 잡히지 않자 사원 내부의 무언가를 작동시켰는지 사원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탈리스에게 사이오닉 신호를 보내봤지만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과 교신할 상황이 아닌 듯했다.

‘빠져나가야 한다.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그의 머릿속은 탈출을 위한 방법을 찾는 것으로 가득해졌다. 비행선은 은폐장을 통해 은폐되어 있으니 저들이 사원 입구 주변을 샅샅이 뒤진 게 아니라면 발각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사원 밖으로만 나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 계속해서 폭음이 들렸고 파편이 그를 향해 튀었지만 그는 이를 용케 피해가면서 앞을 가로막는 탈다림들을 차원검으로 갈라내며 퇴로를 뚫어갔다. 다행히도 네라짐들이 잠깐씩 공허에 몸을 숨기는 방법을 처음 본 탈다림들은 그의 움직임을 놓치기 일쑤였고, 그는 간신히 사원입구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만다행히도 탈리스와 그녀의 병력들이 사원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무관님, 이럴 수가,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어떻게 되가는 것입니까?”

“놈들이 아몬을 소환했소. 일단 그들에게 혼란을 주고 탈출했지만 빨리 샤쿠라스의 형제들에게 알려야 하오.”

“바깥에 몰려왔던 탈다림들은 방금 제압했지만 놈들은 분명 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놈들의 함대가 근처에 도착하고 있다는 탐사정의 보고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갈 수는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정무관님 혼자 탈출하십시오. 가서 의회에 정무관님이 목격하신 것을 알리십시오.”

“그럴 수는..”

“가십시오! 저희까지 같이 가려다 정무관님이 당하시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에겐 왜 이리 비참하고 가혹한 운명만이 기다리는지 젤나가가 정말로 자신의 운명을 이끄는 것이라면 왜 내게만 이러는지 묻고 싶었다.

‘또 이렇게 되는가.’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법무관.. 그대의 희생을 잊지 않겠소. 부디.. 명예로운 싸움이 되기를.”

“감사합니다. 정무관님께 아둔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그는 몸을 돌렸다.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가 사원 밖으로 나갔을 때 다가오는 탈다림들을 보며 죽음을 각오한 기사단원들이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내지르는 함성이 들려왔다. 사원 밖은 칼라이와 탈다림들의 시신이 사방에 섞인 채 널부러져 있었다. 곧 사원 안에 남은 그들도 이리 되리라. 비행선에 도착하여 목적지를 입력하는 그의 눈은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는 다시 돌아온 뒤 자신을 불신하는 반대파의 맹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신관도 칼라이들도 아이어를 수복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칼라이 기사단이 마련한 아이어의 전초기지에서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눈 끝에 다행히도 신관은 그가 말한 중추석의 중요성을 인정했고, 인간들에게 가서 그 중추석을 가져오라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이에 동의한 다음날 자신을 따르기로 한 소수의 네라짐을 이끌고 함선으로 향했다. 그런데 분명 칼라이들의 주둔지 안에 위치해있던 자신의 비행선이 파괴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당연히 주둔지를 지키기 위해 있어야 할 칼라이 기사단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군. 이들이 다 어디로 간 거란 말인가.”

“말씀대로 뭔가 이상합니다. 주변이 너무 고요합니다.”

그를 따르던 암흑기사들도 수상한 상황을 인지하고는 주변을 경계하였다. 주변을 천천히 수색하던 그들에게 갑자기 누군가가 양 팔에 붉은 빛을 밝힌 채 돌진해왔다. 검을 쳐냄과 동시에 적의 목을 갈라 제압한 암흑기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이들의 사이오닉 에너지가?”

“붉은 빛이라니!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그는 순간 파괴자가 떠올랐다. 그 존재라면.. 자신들을 집어삼킬만한 강대한 에너지가 있었다. 결국 그가 예상한대로 그 파괴자는 자신들이 이곳 아이어로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런! 신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그는 신관에게 급히 교신을 시도했지만 신관은 응답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신관에게로 발걸음을 돌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분명 어제까지의 작전으로 완전히 제압했던 저그였다.

‘어째서?’

의문을 풀 새도 없이 그들을 발견한 소규모의 저그들이 맹렬하게 달려왔다. 암흑기사들은 쐐기형태로 늘어서서는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저글링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추적자들의 적절한 지원사격 덕에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정무관을 제외한 일행 모두는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칼라이들은 자신들을 덮쳐오고 어제 분명 제압했던 저그가 다시 나타났다. 여기에 대해 자신들의 정무관은 아직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형제들이여. 사안이 급하다. 일단 신관을 찾자. 그가 파괴자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관이 파괴자에게 넘어간다니요.”

“파괴자가 칼라에 침투해낸 것 같다. 우리는 칼라를 거부하고 신경삭을 잘랐지만 칼라이들은 신경삭을 통해 칼라로 이어져 있으니 칼라가 오염된다면 그들 모두가 오염될 수밖에 없어.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신관을 찾아 이 사실을 알리고 막아내야 해.”

“정무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저희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흩어지세. 흩어져서 신관을 찾거든 서로에게 알리게.”

암흑기사들과 추적자들은 서로 무리지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 또한 어제 신관과 얘기를 나눈 곳으로 향했다. 부디 그가 아직 무사하기를 빌면서.

 

 

“크억...”

그는 너무나 거대한 통증에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흉부가 답답한 것이 아마도 뼈가 부러진 듯 했다. 이미 통제력을 거의 잃어버린 신관을 발견하고 달려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다. 급한 마음에 더 늦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신관과 정면으로 맞붙었을 때 입은 복부와 흉부의 상처가 너무 깊어 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신관의 사이오닉 공격에 직격당해 이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바닥을 나뒹굴며 쓸려버린 그의 살갗에서 피가 진득하게 배어나왔다. 이미 파괴자에게 잠식당한 신관이 그에게로 서서히 다가왔다. 마치 다리가 모두 잘려 도망칠 수 없는 벌레를 밟아 죽이려는 듯이 천천히. 신관에게서 광기에 가득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망가진 순환을 끊겠다. 넌 나를 막지 못하리라.”

그는 자신의 비참한 운명이 여기까지임을 알아챘다. 더 이상 전우들과 그가 평생토록 사랑하고 아꼈던 동족들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또한 그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자신은 결국 자기 세대가 그토록 돌아오길 원했던 이 땅에서 모든 종족이 하나 되어 사는 모습을 볼 수 없을 테지만, 그러나 저 젊은 신관은 그 사회를 볼 수 있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대모에게 죽어서나마 용서를 빌 수 있을 테니. 마지막 남아있던 모든 힘을 쥐어짠 제라툴은 차원검에 불을 밝히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내 목숨을.. 아이어에..”

 

 

p.s 제라툴에 대해 최대한 스타크래프트 공식 스토리설정을 따라 살을 붙이는 형식으로 써봤습니다. 솔직히 제라툴의 이야기를 다 쓰자니 너무 길어서 줄였는데 줄이고보니 좀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네요.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