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뜩 떠올린 건 센다이에 사는 마키코 짱이었다. 

마키코랑은 고베의 여자친구랑 사귀고 2달 지났을 때 알게 된 애인데...애인이라고 해야되나 여친이라고 해야되나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사이였음.

나는 또다시 술김에 라인을 함.

 


 

내가 센다이로 가겠다는 말을 듣자, 마키코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어왔다. 

2달 만의 통화.

나는 잘 지냈어라고 묻고, 잠시나마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다. 

원래 하고 있던 헬스클럽의 데스크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다음 달 부터 애플 스토어에서 일하게 됬다던가,

고향인 미야자키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센다이에 있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

도중 "오빠는 여자친구 생겼어?"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생겼을리가"라며 받아쳤다.

그리고 그녀가 10시쯤 알바가 끝난다는 사실을 듣고, 센다이역에서 만나기로 한 뒤 '잘 자'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전에 비해선 좀 이성적이게 된 듯 해서 다행이었지만 조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뭔가 시발 문체가 수필쓰는 것 마냥 감성적으로 변하네. 개오글;;

하여간 나는 전화를 끊고, 그대로 곯아 떯어졌다. 

 

참고로 얘랑은 어떤 관계였냐면. 

 

 

 

이랬다가

 

 

 

뭔가 존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차였다가.

 

 

 

다시 이랬다가

 

하여간 좀 독특하고 정신없는 얘였음. 나쁘게 말하자면 좀 멘헤라 기질이 있었음. 

물론 취미도 맞고, 가슴도 크고, 하는 짓도 귀엽고해서 나도 나름 얘를 좋아했다. 

그렇게 한 5번 정도 만나서 데이트 했나. 10월달 쯤 되서 일이 바빠지니까 내가 연락을 하도 안하는 바람에 자동소멸됨. 

 

여튼 그 다음 날 나는 11시에 일어나서 체크아웃 초과요금인 천엔을 내야했음. 

그리고 주차장이 어딘지 헤매다가 약 30분 정도 소비하고, 겨우 하룻밤 중에 눈덩어리로 변한 차를 뺄 수 있었는데 요금이 시발 5000엔 나오더라. 

하 니미 내가 왜 차를 여기다 댄거지 후회하면서 5000엔 넣어주고, 차를 반환하기 위해 삿포로 역으로 향함.

그리고 차를 반환한 다음, 삿포로역에 있는 에스타에서 비싼 카이센동을 쳐먹다가 깨달음.

 

'근데 센다이 어떻게 가냐.'

 

간다고만 말하고 아무런 계획도 안 세워 놓은 거임. 그래서 닥치는 대로 검색해봄.

 

일단 철도를 이용해 홋카이도 신칸센과 특급열차를 환승하며 가는 방법.

시간도 거의 7시간 존나 걸리는데다가 비용도 애미리스함. 

 

그 다음 페리를 타고 가는 방법. 

잔잔한 츠가루 해협의 겨울풍경을 즐기며 센다이항까지 16시간.... 

 

그렇다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일 빠르고 가격도 싼 교통편은 항공편 밖에 없는데

스카이 스캐너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내가 찾고 있던 항공편은 없더라고. 

그렇게 끙끙 앓던 중 눈 앞에 여행 센터 창구가 보여서 그대로 들어감.

안경 쓴 상담원 누님한테 '센다이에 가고 싶은데 지금 당장 이용할 수 있는 일본 국내 항공편은 없나요?'라고 물었더니

시간표를 꼼꼼히 찾아보고선 2시 50분 출발하는 ANA 신치토세-센다이행 뱅기편을 찾아줌.

덤으로 만 20세 이상은 카운터에 여권 제시를 하면 1만엔 대에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다는 팁까지 알려줌.

캬~사스가 갓본을 외치고 신치토세행 열차표를 산 다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ANA 발권 데스크로 가서 티켓을 구매함. 

출발하기 전 20분 동안, 친구들 나눠 줄 홋카이도 명물 시로이 코이비토랑 로이스 초코도 사재낌.

 

 

그렇게 센다이에 출발하기 전,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남으니까 다른 친구를 만나기로 함.

 

 

먼저 미사키상. 중학교때 채팅에서 만나서 6년 동안 계속 연락 나누고 있는 귀중한 친구임.

일본인들 중 그 누구보다 제일 오래 알고 지냈는데 고작 6년 동안 3번 밖에 만난 적 없어서 이참에 만나러 가기로 함.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알고 지내는 일본인 남자애인 요시키 군. 근데 실수로 4시에 도착한다고 말해서 예정을 겹치는 바람에 결국 다음 날 만나기로 했음.


 

그렇게 센다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또 차를 빌림. 이번엔 잘나가는 프리우스로 갈아탐. 

코롤라 악시오보다 월등히 좋은 승차감과 인터페이스가 나를 안정시킴.

(이 시점까진 앞으로 벌어질 악몽에 대해서 전혀 예상치도 못했음)

 

 

그렇게 센다이역에 도착해서 역 옆에 있는 파르코에 차를 주차하고, 나를 만나러 역으로 마중나온 미사키상과 만남.
 

 

전에 만났던 아오바구 이치반쵸의 이자카야에서 저녁을 먹음. 술은 못마셨음. 

(이 날 찍은 사진은 이게 전부임. 이 시점에서 배터리가 10%밖에 안남아서 사진같은 거 못찍음.)

하여간 만나서 오랜만에 썰도 풀고, 안부도 묻고.

 

이렇게 프리크라도 찍고 그러다가, 라인이 와서 봤는데 마키코였음.

 

 

10시에 끝난다고 들었는데 8시에 연락이 와서 당황스러웠음.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니까 급한 나머지 전파가 나쁘다는 핑계로 일단 끊음. 

혹시나 미사키상이랑 같이 있다가 마주칠까봐 일부러 천천히 걷기 시작함. 

마주친 순간 매도당할게 분명한 상황이었음.

 

내가 다른 사람과 선약이 있는 줄 모르는 미사키상은 해맑은 표정으로 "이번엔 시간도 충분하니까 XX군이랑 차분히 이야기할 수 있겠네~"라며

이 다음은 어디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내가 결국 "미안. 사실 이 다음에 만날 사람이 있어서"라고 말하니까,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아, 그래?ㅎㅎ 이번엔 누구랑 만나?"라고 자기는 괜찮다고 함. 

그 순간 뭔가 존나 자신이 인간 쓰레기 처럼 느껴짐. 아니 두말 할 것 없는 쓰레기였음.

생각해보면 미사키상이랑 만나는 날엔 언제나 선약이 있었음. 

5년 전 센다이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찻집에서 2시간 이야기하다가 시오가마에 있는 여자친구 만나러가고, 3년 전에 다시 센다이에 갔을 때는 쇼핑몰에서 점심만 먹고 가고, 재작년 크리스마스 도쿄에서 만났을 땐 겨우 30분 만나고 여자친구만나러감. 그래도 이해해주고 나를 여전히 친하게 대해주는 친구인데. 표정은 일부러 웃고 있어도 내심 섭섭해보였음.

하여간 존나 미안했음. 다음엔 꼭 약속했던 카나자와 여행 가자고 재차 약속한다음에 헤어짐.

 

그리고 센다이역에 있는 교토 페어라고 특산품 이벤트 하는 곳에서 서로 전화하다가 만남.

근데 막상 다시 만나니까 표정도 환하고, 왠지모를 생기가 넘치는 걸 보니 만나기 전에 삭막한 말투의 그 얘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였음. 볼을 쿡쿡 찔러보았는데 말랑말랑한건 여전했음.

하여간 약속대로 적당히 패밀리 레스토랑 들어가서 식사하기로 함.

기묘하게도 영업종료시간 1시간 전이라 손님은 우리 둘 밖에 없었음. 

그렇게 화이트 리조또를 시키고 이야기를 나눔. 뭔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나랑 연락 안하게 되서 한 동안 우울했다가 어떤 사람이 만들어준 카르보나라를 먹고 나서 활기를 되찾았다고 함.

그러다가 내가 어제 얘가 물어본 답변 똑같이 애인 있냐고 물어보니까, 부끄러운 듯이 "비밀"이라고 함. 그래서 좀 장난끼 발동해서 끈질기게 물어보니까 결국 있다고 대답함.

쓴웃음을 참으면서, 나는 "아, 그래? 잘됐네!"라고 말해줌.

 

식후 커피 한잔 하고 돌아가려던 중 얘가 나한테 애교할때 불렀던 노래를 불러서 뜬금포 터짐.

가게 밖에 나오니까 도착했을 땐 비내리고 있었는데 밤이 되니까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함. 

그래서 차로 데려다 준다고 하니까 괜찮다고 거절함. 

그리고 "언젠가 또 다시 만나면 좋겠네"라고 말한 뒤 눈으로 쌓인 육교 위에서 헤어짐. 뭐 시발 감격의 재회 그딴 건 없음.

하긴 나같은 엠창 병신 다시 한번 만나 준 것도 고마운 편이긴 하지

하여간 존나 만나서 뭔지 알 수 없는 씁쓸한 기분만 들었음.

 

시간은 11시가 되어가고 있었음. 또다시 마음을 후벼파들고 오는 공허감이 나를 괴롭게함. 

일단 마음을 다잡고 차 몰고 근처 편의점에 주차한 다음 갈 만한 곳을 검색하려 하니까 핸드폰 전원이 꺼짐.

 

난 당연히 차내에 USB 포트 같은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없더라고. 

일본 편의점은 충전 서비스 같은 거 안해줘서 스마트폰도 못쓰겠다, 결국 그날은 그냥 쳐자기로 결심하고 또다시 가까운 토요코인을 향해 시동을 걸음. 

20분 뒤에 벌어질 대참사는 꿈도 꾸지 못한채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