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조 때

북방을 지키던 부원수 이괄이 일만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내려와 무려 한양을 점령하고 왕은 충청도까지 도망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괄이 이끌고 내려온 군사는 후금을 막기 위해 모아서 북방에 박아놨던 조선 최고의 정예군이었고, 한양까지 신속히 진격하면서 나름 주도면밀한 작전과 꾀를 잘 썼던 까닭에 막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른 이 이괄의 난을 진압한 주요인물 중에 광주 출신의 정충신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괄 토벌의 총지휘관은 장만이라는 인물이었지만 사실상 이괄을 깨부술 작전을 입안하고 실제전투를 이끈 게 바로 이 정충신이라는 분이었지요.


이 공으로 정충신 장군은 '금남군' 이라는 봉호를 받게 되는데, 바로 금남로 지명의 유래입니다. 

('금남로' 지명의 도입은 1947년)


정충신 장군은 살아온 생애가 흥미롭기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원래 신분은 노비였는데 (아버지는 중인, 어머니가 노비. 노비종모법에 따라서 노비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임진왜란 때 면천을 한 케이스입니다.


어린 나이에 전라도 육지를 방어하던 권율 장군 휘하에서 종군을 하면서 하루는 자청하여 정탐을 나가 왜군의 목을 베고 수급을 가지고 돌아온 일도 있었고, 


왕이 있는 의주의 임시조정으로 장계를 전달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당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병사에 불과했던 정충신 장군이 홀로 자청해 왜군의 점령지를 미친듯이 돌파해서 의주 행재소에 장계를 전달하는 공을 세우게 됩니다.


바로 이 때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선조에 의해 면천을 받게 되고 그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지요.


당시 전란중에도 과거시험은 틈틈이 치뤄지고 있었기에 정충신 장군도 금방 과거를 준비해서 합격하게 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군관이 되어서 임진왜란 때는 적 정탐 등의 임무를 하고,

왜란이 끝난 뒤에는 북방에서 근무하게 되는데요.

광해군시절 실록에 그 이름이 여러번 등장할만큼 정충신 장군은 북방의 중요한 인재였습니다. 

국경수비는 물론이고 무섭게 일어나던 후금을 상대로 첩보작전을 하고 실제 후금 조정에까지 들어가 광해군의 외교를 수행하던 사람이 바로 정충신 장군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북방통' 이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일대기를 다 적으려면 너무 길어지기에 여기까지만 하구요. 

정충신 장군은 지장, 덕장, 선비의 면모를 가졌고 여러권의 저서도 남겼으며,

스승인 이항복의 유배생활을 뒷바라지하면서 유교사회의 모범이 되기도 했고,

성공한 삶에 비해 청빈한 생활로 당대 사람들에게 감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충신 장군은 조선의 아홉 충무공 중 한 분이시기도 합니다. 


천민에서 충무공으로,


총기 어린 앳된 병사에서 유명한 조정 권신의 문하생으로, 그리고 마침내 국란의 영웅으로.


소설 같은 일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