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처럼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역경이야 조금 있었지만 이건 순도 100% 그 시절의 내가 잘못한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운이 심각하게 많이 따른 입시라서 공개할까 말까 생각해 봤는데 일단은 한 번 참가해 봄.

본문 보고 열 뻗칠 것 같은 사람은 지금 뒤로 가기 눌러서 나가도 됨. 사실 100%로 말했을 때 그 이야기 들은 애들 모두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날 봤으니 ㅋㅋㅋ

워낙 유니크한 이력이다 보니까 이력 중에서 중요한 것들은 어물쩡하게 넘길게. 다 까놓으면 작정하고 검색할 때 며칠 안 가서 실명을 찾을 수 있으니...



어릴 때부터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고, 초등학교 때~중학교 1학년 때는 모 대학 영재교육원에서 교수랑 질문 답변 핑퐁하면서 놀았다.

그 때는 정말로 거리낄 게 없었다. 하고 싶었던 대로 전부 됐으니까. 영재교육원? 재밌겠다, 넣어보자 하면 붙었고, 올림피아드? 재밌겠다, 준비해 보자 하면 상을 따 왔다. 물론 대상이니 금상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입상 자체가 힘든 게 올림피아드이니만큼 엄청나긴 했다.

이 오만은 중학교 3학년까지 커져만 갔다. 주로 관심 있던 분야가 아닌 쪽으로 넣었던 올림피아드에서 덜컥 합격한 것도 모자라서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메달까지 낚아 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정말로, 하면 전부 되던 때였다.



대학교 입학 전까지 내 관심사는 오로지 화학이었다. 그래서 그 올림피아드의 분야(A라고 하자.)에 대한 지식은 그렇게 깊지가 않았고, 무엇보다 흥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 탓에 고등학교 입시에서 최악의 병신 짓을 저지르고야 만다.

그 때는 세종이랑 인천이 없어서 영재고가 6개였다. 그리고 모든 영재고에 동시 지원이 가능했고. 광주, 대전, 대구과학고는 1차에서 한과영은 2차 시험에서 떨어졌고, 3차 서울과고 캠프를 통과해 놓은 상황. 설곽이랑 경곽 두 개 모두 경쟁률이 낮은 편인 마지막 면접고사만 남아 있었다.


면접에서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물어보는 족족 화학을 대답했다.


당연히 병신 중에서도 상병신이나 할 만한 짓이었다. 국제대회 수상이라는 이력을 주무기 삼아 돌파한다는 수를 쓸 생각을 안 하고 자기 관심사에 눈 돌아가서 그 쪽으로 떠벌대는 오타쿠 짓이었으니까.

둘 다 떨어졌다. 추후에 알아 본 바로 설곽은 예비 1번이었다더라. 그런데 설곽 합격증을 버리고 다른 데 가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과고 입시도 과정은 기억 속에 없지만, 결과만큼은 확실하게 남았다. 탈락이다.



그리고 공부를 놨다.

같이 비행기 타고 대회 치르던 놈들은 전부 과고 영재고를 갔다. 그 꼴받는 열등감이 멘탈을 가루로 만들어 놓았다.

중학교 3학년 이후로 고등학교 3학년, 6모때까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공부를 하지 않았다. 시험 당일까지 무슨 과목 어느 범위를 보는지도 모르는 상태였으니 말 다 했지.

기본 실력으로 우려먹은 내신은 영재고 입시로 단련된 수학 과학이 캐리한 대신 나머지 과목이 아작이 나면서 2등급 중후반으로 떨어졌다. 난생 처음 받아 보는 70점대에도 별 생각이 없었다. 모의고사도 반쯤 장난식으로 쳤다. 물2 화2 골라놓고 대가리 안에 있던 걸로 우려먹으니 석차가 어떻게 나왔겠는가.

교내 대회는 가능한 대회를 모두 나가서 상장만 열 몇 개를 받아 왔으나, 이것도 평준화 지역의 일반고라 그렇지 비평준화에 갔으면 맥도 못 추릴 실력이었다.

야자를 매일 째고 교통비를 빼돌려 일주일에 한 번씩 피씨방 가서 메이플이나 하던 놈. 그런 주제에 성적은 이상하게 선은 지키는 놈. 그게 2년 반 동안의 나였다.



여름 방학 때 어머니가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제발 세 달만 열심히 해 달라고.

그 부탁 듣고도 개무시를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학원을 몇 년 만에 다시 들어갔다.

미친 놈 널뛰기하는 것처럼 오락가락하는 내신으로는 국숭세단 언저리가 한계였다. 보완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학원 선생과 어머니와 나, 세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결론은 6논술이었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었고, 대충 쓴 시나 단편이 백일장에 들어가는 등 기본적인 문장력이 받쳐 준다는 판단 때문이었겠지.

그렇게 하루에 논술고사 하나의 답안을 작성하는 크런치 모드에 들어갔다. 60일의 기적을 어머니는 노리고 있었지만...



지원한 학교는 연세대, 고려대, 건국대, 동국대, 한양대, 성균관대. 우주상향 2 상향 2 적정 1 하향 1이었다. 학원 선생의 전략은 동국대는 보험이고, 기본으로 건국대, 가능하다면 한양이나 성균관 둘 중 하나를 따는 것. 연세랑 고려는 천운이 받쳐 줄 때나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전략이라는데 난 신경 안 썼다. 어차피 건국 위로는 바라지도 않았고. 그 정도로 성적과 자신감이 동시에 아작이 났던 상태였다.

그 자신감은 11월 1일, 건국대 논술에서 회복되었다.


그냥... 문제가 쉬웠다.


어 시발 왜 쉽지? 학원 선생이 준 논술이랑 이건 너무 다른데? 머릿속에 물음표를 수십 개 띄우면서 모든 문제를 풀고 나왔다.

어쩌면 한양이랑 성균관도 노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희망이 싹텄다.



11월 8일, 낮에는 연세대 밤에는 동국대 논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짐 한 개 던 마음으로 연세대 논술을 보러 갔다.

캠퍼스에서 네 번 길을 잃었다. 더럽게 넓고 더럽게 사람이 많을 뿐더러 건물도 더럽게 넓었다. 들어가면서 한 번 건물 안에서 한 번 시험 보고 나오는 건물에서 한 번 나오고 정문까지 가는 데 한 번.

이번에도, 문제가 쉬웠다.

그 때 자신감이라는 게 폭발했다. 건국대 논술보다 쉬운 체감 난이도에, 반쯤 포기했던 대가리가 미친 듯이 돌아갔다.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있는 힘껏 생각하고 고뇌하며 답안을 모두 작성하고 보니, 150분 시험 중 40분이 남았다.


손을 들었다. 감독관을 불렀다.

"혹시 답지 한 개 더 주실 수 있나요?"

남는 시간 동안 이미 완성된 답안을 전부 베껴 적었다. 그 와중 빠진 걸 채워 넣거나 과도한 걸 잘라 냈고. 그렇게 답안을 정제하고 펜을 놓고, 5분 정도이긴 했지만 여전히 남은 시간 동안 시계바늘만을 바라보며 안심했다.

이건 100퍼센트 합격이다. 시험장을 나와서 길을 잃으면서 확신했다.


그리고 동국대 논술을 보러 갔다.

경사도 45도의 계단을 땀 뻘뻘 흘리고 올라가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시발 여기서 대학생활 하면 다리에 근육은 붙겠네. 절대 안 간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연세대 논술에는 최저가 있었다. 4합7이라는 극히 높은 컷. 그리고 문제점은 내가 모의고사마다 국어를 3등급, 영어를 4등급 받아 왔다는 것. 아무리 잘 보면 뭐하나, 최저에 걸려 고꾸라지면 답도 없는 것을.

논술 보고 돌아오니 수능이 아흐레 남아 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수학 공부는 아예 안 했고, 물리1 화학1 공부는 10%만 했다. 나머지는 전부 국어랑 영어에 때려박았다. 안 그러면 가망이 없었다.


수능은 편하게 봤다. 나란 건 긴장하면 되는 것도 안 되는 놈이었다. 수십 번 시험을 다니면서 배운 경험으로, 편하게. 편하게 수능을 봤다.

가채점표는 안 가져갔다. 모든 것을 하늘에 맡겼다.

그리고 수능 끝나고 핸드폰을 돌려받자마자, 그 날 발표였던 건국대 논술전형의 결과를 알게 되었다.


합격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별 거 없다. 아슬아슬하게 4합7 딱 채워서 그 건국대 버리고 연세대행 엔딩.

건국대 8n학번 아버지는 언짢아 하셨지만... 어쩌겠어요, 납득하세요 ㅋㅋㅋ



별거 없는 비틱과 기만의 일지였지만...

이 경험으로 남에게 입시 조언 할 때 꼭 강조하는 게 두 가지 있다.

일단 들이박고, 깡을 가져라.

그러면 생각보다 결과는 좋으리라.


그렇다고 나처럼 하진 말고.

내가 손대는 주식마다 다 꼬라처박는 걸 보면 인생 운을 대입에 다 처박은 것 같은데... 우주의 기운 안 모였음 그냥 적당히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고등학교 3년 동안 함양하는 게 나을 거다. 천운에 맡기는 것보다는 실력으로 돌파하는 게 더 기분 좋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