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대입에 관해 별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저 뺑뺑이로다가 근처 일반고에 기어들어 갔다.


 2월 입학 설명회 때, 교직원분이 ‘우리 고등학교는 노력만 하면 쉽게 내신을 딸 수 있다. 또, 야자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간다.’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가 발발했다. 야자고 뭐고 물거품이 되었다. 애초에 학교에 가질 못했으니까. 학생도 교사도 모두 온라인 클래스가 처음이라서 영 어색했던 기억이 난다.


 한 5월쯤 되니 코로나가 약간 누그러져서 다시 학교에 나갔다. 반 배정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그때야 다시 만났다. 얼마 안 있어 중간고사를 쳤는데 영어 빼고 나름 잘 쳤다. 조금 기고만장했다. 학교에서 영재 수업을 들어 보라길래 거기도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다시 기말고사를 치니 국어가 3등급이나 떨어지고, 다른 것도 영 아니었다. 2학기에도 별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였다. 영재반에서 교육청 상을 받았다는 게 그나마 눈여겨볼 만한 것이었다.


 2학년부터는 안주의 연속이었다. 여러 학원에 다니고, 수학 과외를 받으면서 이 정도면 나름 열심히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주변 얘들도 나하고 비슷했는지, 내 생각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내 분위기도 그렇다고 느껴서 나도 거기에 휩쓸려 갔다. 결국 내신 등급도 애매하고 해서 수시보단 정시에 힘쓰자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때 나는 1학년 마치고 학교가 공부하기 영 안 좋다며 탈출했던 같은 반 친구를 떠올렸을 뿐이다.


 그렇게 3학년이 되었다. 다들 수시로 가자는 생각인지 분위기는 더욱 안 좋았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친구들과 모바일 게임을 즐겼다. (그나마 얼마 안 하고 그만둔 게 다행이다) 그리고 집에 가서 공부한다고 했지만, 공부는커녕 딴짓을 더 많이 했다.


 그럼에도 정시에 대한 고집이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정시는 하지 말고 수시에 집중하라고 할 때 속으로 욕을 많이 했다. 관련된 두 가지의 이야기가 있는데, 첫 번째는 모 대학에서 강당에서 입시 설명회를 했을 때이다. 당시에 정시는 재학생들을 위한 전형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씩씩거렸다. 두 번째는, 유독 수시를 강조하는 교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이다. 그렇게 하면 수시로 갈 거라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내 속의 반발심이 불타올라 나는 더더욱 수능 준비에 매진하였다.


 그 고집의 이유 중 하나는 당시에 (내 기준에서는) 모의고사 등급이 높았다는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과 대입 상담을 할 때, 선생님께서는 이 내신으로 네가 원하는 정도의 학교 수시는 쉽지 않을 것이니 정시를 한 번 해보라 하시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내신 공부는 최소로 하고 정시를 준비했다. 중간·기말을 아예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학교에서 귀찮게 할 것 같아서 필수로 해야 할 것만 했었다.


 곧 수시 원서 접수 기간이 왔다. 고려대 한 장 적기로 했다. (다 안 되는 게 당연했지만) 서울대는 너무 높고, 연세대는 영어가 안 되니, 그나마 고려대라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수시 안 되면 수능으로 간다는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고대는 접수 마감이 빠르다는 걸 몰라서 원서 접수를 못했다. 그래서 한양대와 서강대를 적었다. 성균관대도 적으려다 자소서를 요구하길래 고집으로 적지 않았다.


 당시엔 국어 등급(4)만 좀 올리면 서성한은 갈 수 있겠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수학 등급도 2등급이고 영어와 과탐도 그럭저럭하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수능 날까지 금방이었다.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수능장으로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말이다.


 첫 수능은 국밥이었다. 시원하게 말아 먹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부모님을 맞았다. 차를 타고 자주 가던 복국집에 갔다.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내년에 더 잘하면 된다고 부모님과 얘기했던 것 같다. 그 울적했던 기분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점수표를 받아보니 수학만 2였고, 나머지는 죄다 4등급까지 떨어졌다. 결국 정시를 접수할 때 원래 가려던 대학들보다 등급이 조금 낮은 대학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예비로 떨어졌다. 


 우울한 재수 학원 순례는 그렇게 시작됐다. 집 근처에는 재종이 없어서 돌아다니기도 힘들었다. 3개의 학원을 돌아다닌 후 하나를 정하였다. SKY는 가겠다는 각오와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재수를 시작했다.




 가장 힘든 것이 두 개가 있었다. 수업을 듣는 것도, 인간관계도 아니다. 하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집과 학원 사이의 거리가 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고, 그게 상당한 고역이었다. 다른 하나는 밥이었다. 학교 급식이 꽤 괜찮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학원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서 아침에 단체조례를 했는데, 너네는 친구 사귀려 온 게 아니라 대학 들어가려고 여기 온 것이니 서로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해 주변 사람들과 어지간하면 대화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초반에는 재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니 열정이 활활 불타올랐다. 그런데 6월 7월 넘어 장마까지 오기 시작하니까 날씨처럼 내 몸과 마음도 처지기 시작했다. 권태와 무력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한동안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전 상태로 돌아가는데 2주는 넘게 걸렸다. 


 재수 학원마저도 2학기가 되니까 분위기가 영 안 좋아졌다. 이번에는 과거의 기억과 그 결과를 알았기에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다시 수시 접수 기간이 왔다. 이번엔 논술만 적어 넣었다.  연대 논술을 준비하기 위해 2과목도 준비했다. 과마다 과탐 선택에 제한이 있어서 나는 물리학 2를 공부했다. 결과는 뭐... 과학 문제는 다 풀었는데 수학은 다 못 풀었다.


 연대에 가기 전에 9월 모의고사를 쳤다. 국어가 4등급까지 떨어졌다. 9월부터 출제 기조가 확 바뀌었기 때문에 당황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분석했다. 공부 방법도 재검토했다. 6월 9월 모의고사 기출을 토대로 그전의 기출들을 공부하려 노력했다.


 수능장으로 갔다. 국어를 폈다. 처음에 언매 때문에 당황했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시험을 치니 국어가 그럭저럭 풀렸다. 국어를 잘 쳤다고 생각하니까 나머지 과목도 저번 수능보다 훨씬 좋게 칠 수 있었다. 


 다 치고 밖으로 나가니 비가 왔다. 저번 수능과 달리 이번에는 슬픈 표정을 짓지 않기로 했으니까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족을 맞았다.


   



 학원에서 가채점표를 가지고 연고대는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는데, 영 불안해서 서강, 한양 논술도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각각 당일치기했다. 결국 논술 시험 친 건 다 불합격해서 정시 원서를 접수했다. 영어 등급이 조금 걸려서 가군에 고려대, 나, 다군엔 성균관을 적었다. 


 성균관대 나군은 최초 합격을 했다. 그때 여기 글을 썼었는데,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려대는 바로 붙지는 못하고 1차 추가 합격에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