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다른 ~~의 시각으로 본 20세기 시리즈에 영감을 얻어 작성되었습니다. 필자 역량 상 오류나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쟝핑(蔣平)으로 1900년 2월 12일 청나라 장쑤성 푸커우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 아래로는 5살 터울의 남동생과 여동생 있었다. 나는 어릴적부터 공부를 잘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친지로부터 영재라고 기대를 많이 받았다. 



신해혁명

신해년 十월 十일, 우창 신군 八공영의 군인들이 멸만흥한,청조타도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다. 장쑤성도 청조에서 탈퇴했고 十一월에는 혁명의 대열에 합류했다. 온 거리에 오색기와 혁명정부의 깃발이 걸렸다. 그날 저녁,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침내 청조가 무너졌다며 기뻐하던 것이 기억난다. 




5.4 운동

 공부에 재능을 보였던 나는 부모님의 지원으로 베이양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위안스카이의 행태에 분노했다. 우리는 칭다오가 중국에 반환될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칭다오는 중국에 반환되지 않았고 정부는 일본의 굴욕적인 21개조 조약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에 우리는 정부가 21개조 조약을 받아들이는 5월 7일에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시위일정은 급히 당겨져 5월 4일로 변경되었다. 정부가 우리의 시위를 단속하려고 하자 학생회에서 재빠르게 시위날짜를 앞당긴것이다. 나를 포함해 학생 3천명이 천안문 광장에 집결했다. 선언문이 배포되고 대회가 끝난후 우리는 가두행진을 시작했다. 오색기를 들고, 매국노 삼인방의 두루마리를 들고서, 우리는 목이터져라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우리는 열강들에 항의하기 위해서 공사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찰이 우리를 가로막았고 2시간 동안이나 입장을 거부당하자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그러던 도중 어디선가 사람들이 "외교부로 가자!" "매국노 집으로 가자!"는 소리를 외치기 시작했다. 학생회와 시위 지도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황이 안좋아졌다. 일부 시위대가 집에 쳐들어가 불을 질렀다. 우리는 겁을 먹은 나머지 5시가 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뒤로 우리의 시위는 계속되었고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3파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정부는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 

군벌시대

위안스카이가 죽고 각지에서는 이미 군벌이 할거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1923년 즈음에는 중국은 산산히 찢겨져 있었다. 나는 5.4운동 이후 돤치루이 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세웠지만 정작 나아진것은 별로 없었다. 좌절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내가 무엇을 위해 대학에서 공부했던가. 그러던 중 대학동기던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친구는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쑨원의 국민당에 합류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 중산선생! 그분 만이 중국을 통일하고 열강으로부터 해방할수 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분명해졌다. 그날로 나는 광저우로 내려가 국민당에 입당했다.

국민당 입당과 당내갈등

나는 처음 당시 국민당의 정치가였던 랴오중카이의 비서관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 쑨원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국민당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당중앙은 전체회의에서 반제투쟁을 주장했지만 내부의 갈등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국민당 우파는 공산당이 국민당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계급투쟁이 중국에는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중산의 후계자가 누군지를 두고 갈등은 더 첨예해졌다. 그 시기 랴오중카이가 재정부장으로 추대된 이후 나도 자연스레 재정부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다. 랴오중카이는 종종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쑨원의 뜻을 이어 국공합작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었다. 그때문일까. 주요 직책의 책임자들은 대거 공산당원으로 교체되었고 우파성향의 당원들은 좌천을 맛보아야 했다. 자연스레 이 "개조"에 팔을 걷고 나섰던 랴오중카이에게 불만이 집중되었다. 양 진영간 대결은 더 첨예해졌고 우파성향 당원들은 나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맙소사! 랴오중카이가 괴한에게 피격당했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지고 말았다. 랴오중카이를 존경하고 그와 가까웠던 나는 다른 좌파,공산당원들처럼 우파에 분노했다. 당중앙에 의해 상당수의 우파 당원들이 숙청되었고 원로들도 화북으로 추방당했다. 우파는 당연히 당중앙의 이런 결정에 반발했다. 급기야 우파 중앙집행위원들이 서산에 모여 독자적인 회의를 열고 당이 2개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중앙당은 논의를 거쳐 이날 회의에 참석한 중집위원들을 제명했다. 

북벌과 중산함사건

황푸군관학교 학장, 장제스가 당내에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었다. 장제스는 두차례의 동정에서 뛰어난 군사적 실력을 발휘하여 천중밍을 완전히 축출했고 우파를 숙청하는데에도 협조했다. 장제스는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되고 쑨원의 유지를 이어 군벌들이내전에 휩싸여 있는 틈을 타 북벌을 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나도 장제스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었다. 베이핑에서의 대학생활 동안 내가 본 군벌들은 중국의 암덩어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공산당이 북벌에 반대하고 나오면서 장제스를 비난하며 장제스와 공산당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나는 이때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쑨원 선생의 유지인 북벌에 왜 어깃장을 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북벌을 주장한 장제스를 비난하는 것일까? 나는 좌파당원들의 모임에서 장제스를 두고 대판 싸웠고 그들과 점차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1926년 3월. 나는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군인들이 들이닥쳐 국민당과 국부군 내부의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해갔다. 소련고문들은 추방당했다. 왕징웨이는 돌연 외유를 떠나버렸다. 장제스가 당권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침내! 장제스의 지휘아래 북벌이 재개되었다. 

상하이 정변과 난징 합류

1926년 11월 당중앙은 우한천도를 선포하고 12월에 당중앙과 임시연석회의를 조직하고 27년 1월 1일 우한 국민정부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는데 나는 우한에 합류하지 않고 난징으로 향했다. 왜냐하면 장제스와 북벌군이 난징에 입성하여 나의 고향, 장쑤를 수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이미 지난 북벌찬성건으로 좌파 일색이던 우한 당 중앙에서 껄끄럽게 보고 있었다. 



1927년 4월 12일부터 반공정변이 일어나 공산당원들이 체포,숙청되었다. 그들과 한때 어울렸던 나 역시 추궁을 받았지만 조직부에서 일했던 대학 동기의 보증으로 풀려날수 있었다. 

4월 18일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되었고 나는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법폐개혁

1935년 11월 4일, 재정부장 쿵샹시의 주도하에 우리 재정부가 기획해온 화폐개혁이 마침내 단행되었다. 정부는 긴급조치를 통해 11월 3일, 모든 은을 중앙에 집중하여 국유화하고 은화 유통을 금지하며 은화와 태환된 국민정부 계열의 지폐만을 법폐로 중국에서 유일한 통화로 인정한다는 폐제개혁을 선포했고 화폐발행권 통일, 준비금 집중보관, 은 국유화, 외환가격 규정 등의 조치가 이뤄졌다. 마침내 중국의 돈이 은으로부터 자유로워진것이다. 신용이 있는 새 화폐를 통해 중국 경제를 안정화하고 정부가 통제할수 있을것이다.

중일전쟁




맙소사! 일본군이 중국을 침공했다! 루거우차오에서 한 일본군 병사가 실종되자 일본은 이것을 중국의 탓으로 돌리며 공격을 퍼부었다. 전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상하이가 함락당했고 다음은 난징이었다. 우리 부부는 우한으로 피난을 떠났다. 피난길에 우리의 첫 아이가 태어났다. 하지만 그새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우한까지 위협받자 결국 돌고돌아 쓰촨의 충칭에 도착했다.


 그러나 충칭도 안전한것이 아니었다. 일본군 비행기들이 수시로 날아와 폭탄을 뿌려댔다. 피할 수 있는 자리마다 피난민이 가득했고 피난민이 가득한 자리마다 미친 일본군들이 덮쳤다. 이제 충칭은 가는 곳마다 시체와 폐허만이 있었다. 어줍잖은 지위나 재산이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지는 못했다. 어느 장군은 결혼식 도중에 공습을 피해 하객들과 함께 방공호로 피했지만, 불붙은 기름이 방공호로 흘러들면서 모두 불에 타서 죽었다고 한다. 우리는 모기가 넘치는 통풍도 잘되지 않는 비좁은 방공호에서 마치 쓰레기 마냥 구겨져 폭격소리와 충격을 견뎌내야 했다. 그럼에도 중국 인민과 정부는 굴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단결할 뿐이었다. 장제스 총통은 끝까지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정부는 충칭에서 피난정부를 구성했다. 나는 피난정부에서 재정부 소속으로서 윈난의 은행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젠장! 윈난의 은행들은 사실상 군벌의 손아귀에 넘어가 있었다.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들과 여러번 입씨름을 해야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해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정부는 일본,나치독일,이탈리아에도 선전포고를 하였고 연합군에 가입하였다. 정세가 우리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종전

1945년에 접어 들어서면서 일본의 패색이 더욱 짙어졌다. 미국이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곧이어 소련도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결국 8월 15일 나는 충칭에서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천황의 항복방송을 듣게 되었다. 이제 난징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폐허와 시체가 넘쳐나지만 우린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그거면 충분하다. 

 국공내전과 국부천대

결국 우려하던 일이 나고야 말았다. 공산당과 또 전쟁이 터진것이다. 아직 지난 전쟁의 피해도 다 복구하지 못했는데 내전이라니!


1949년 12월 7일, 나는 아내와 아들,딸과 함께 타이완성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광조우 항구에는 배를 타러 온 사람들로 발디딜틈 없이 가득했다. 공산군이 화남지역을 석권하고 마침내 광저우까지 노리자 국민당은 타이완성으로의 피신을 결정하였다. 우리가 다시 고향, 장쑤로 갈수 있을까?


타이완으로 이주한 우리 가족은 권촌에 주택을 배정받았다. 이곳은 예전 일치시기에 일본이 건설한 주택이었다고 한다. 이웃들과 가끔 만나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군인 출신이다. 고향 장쑤 출신도 간혹있는데 그럴때마다 고향 생각이 자꾸만 난다. 행방불명된 동생들이 부디 무사하길 바랄뿐이다. 

진먼다오를 중공이 공격했다는 소식을 받았을때 우리 가족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부디 놈들이 실패하기를 바랄뿐이다. 


내 나이 어느덧 70을 넘겼다. 나는 정부에서 나오는 연금을 받으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아들 녀석은 타이베이 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다. 타 성 출신이라 진급이 빠른것 같다.

중화민국 유엔 탈퇴


1971년 10월 오늘은 내 인생 최대 굴욕의 날이다. 끔찍하다. 이제 저 비적 놈들이 중국을 대표한다는것 아닌가? 앞으로 우리는 "타이완"으로 저들은 "중국"으로 기억될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1975년 4월 5일, 장제스 총통이 세상을 떠났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나도 갈 때가 된 것인가국민혁명과 삼민주의를 위해 몸바쳐온 우리 세대도 점차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