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올린 정보글에 넣을까 말까 고민했던 부분인데


최대한 문제가 없게끔 다듬고 수정해서 올려봄


내용이 조금 기니까 주의하고




고문이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고문의 효율성에 대한 의심'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음. 쉽게 표현하자면


'고문한다고 진실을 말하겠냐?'

'되는대로 지껄이는 말에 가치가 있겠냐?'

'쓸모없는 정력 낭비다'

'저런다고 진짜 정보를 실토할까?'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네


사실 이 부분은 나도 그렇고, 많은 장붕이가 공감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함. 고문은 비윤리적인 행위일뿐더러, 상황을 모면하고자 내뱉은 말에 가치가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각국 정보기관은 냉전부터 GWOT에 이르는 오늘날까지 고문을 사용하고 있음. 대놓고는 못하니 몰래 하는 식이지. CIA는 휴즈 라이언법(미국의 고문방지법)을 우회할 목적으로 해외에서 고문시설을 운영했고, 러시아 FSB/중국 MSS는 영장도 없이 휴대전화 감청하는 곳이라 고문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음. 반대하는 사람부터 잡아가니까


그런데 정보기관은 왜 이런 비효율적이고 야만적인 고문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도덕 9등급 맞은 사이코패스라서? 아니면 가장 편리한 수단이니까?


먼저, 간첩/테러리스트/국제조직범죄자 등을 고문하는 이유를 알려면, 정보기관이 어떤 곳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


정보기관의 4대 활동, 첩보수집-정보분석-방첩-비밀공작.


정보기관은 이름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생산하는 게 임무고, 고문은 '정보를 획득'하는 수단으로 사용됨



기관마다 수법이나 절차는 차이가 있지만, '고문 자체'를 은유하는 용어도 많이 있음. 특수정보추출기법, 향상된 심문기법, 심층심문 등등등.


하지만 고문은 되도록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는 편인데, 그 이유는 아래 문제를 보면서 설명해봄


(우가리스탄의 저자 첩붕이 분께서 제작한 인텔 오퍼레이터스 훈련 입문 모듈 테스트 : D-23형 中 일부 문항.)

문제 2번 '적절하지 못한 형태로 포섭된 공작원'을 묻는 질문의 5번 선택지. '감금된 상태에서 8인치 몽키 스패너로 뚝배기 5회 이상 가격 당한 후 작전 계획을 실토한 미얀마 군인'이라는 선택지 보임?


2번 문제의 정답은 바로 5번 선택지야.


현대 정보기관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국가정보학(국정원 7급공채 필기과목)에서 '무력을 동원한 정보원 포섭/심문'은 지양(止揚)해야 하는 행위로 통하거든.


왜냐고?


상식적으로 내 대가리를 후려친 놈이랑 잘 지내고 싶을리가 없잖아...


아무튼 상기된 이유로 정보기관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고문을 지양하는 편임.


하지만 반드시 정보를 얻어야 할 때,

그리고 '최대한 빨리' 얻어내야 할 때. 고문은 가장 신속한 수단으로 채택된다


'그래, 고문하는 이유는 알겠는데. 생각보다 부정확한 방법 아니야? 막말로 앙심을 품은 상대가 거짓말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상관 없음. 오히려 거짓말을 해주는 게 더 반가운 상황임


(NO EASY DAY - 빈 라덴 암살작전에 참가한 SEAL 대원의 자서전 中)

회고록이나 제로 다크 서티(CIA 고증 매우 잘해놓아서 전직 CIA정보관들 사이에서도 호평이 많았던 영화)로도 알려진 내용이지만, CIA가 빈 라덴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알 카에다 조직원들 덕분이었음


각기 다른 지역, 년도에 체포된 조직원들은 심문과정에서 '알 쿠와이티'라는 연락책을 무시하고, 평가절하하고, 모른다고 잡아뗐음. 걔가 빈 라덴의 연락책이었거든


하지만 알 카에다 조직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CIA정보관들은 이들이 기를 쓰고 숨기려드는 '알 쿠와이티'를 의심하기 시작했음


(영화 제로 다크 서티 - 블랙사이트에서 촬영된 심문영상을 돌려보는 주인공의 뒷모습)

우방국 정보기관들이 보내온 자료와 중동 스테이션에서 올라온 전문, 각지에 흩어진 블랙사이트(고문시설)에서 촬영된 심문영상을 모조리 취합해서 분석한 CIA는 알 쿠와이티의 신분/활동지역/가족관계를 파악하고 도청을 시작했고


결국 알 쿠와이티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거짓말(아들 어디야? 저 XXX에 있어요 - 실제로는 ZZZ에 있었음)하는 음성정보를 획득. 최종적으로 그가 자주 드나드는 가옥에 빈 라덴이 숨어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됨


오히려 그 거짓말이 '알 쿠와이티=빈 라덴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는 힌트를 제공한 셈이지


이렇듯, 고문 과정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음. 어차피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파악할 방법도 있고


밥 먹고 정보 빼는 것만 연구하는 정보관들이 거짓말 하는 놈을 어디 한두번 봤겠음? 당장 우리 어머니도 새벽에 김치찌개에서 돼지고기 안 빼먹었다고 구라치면 눈치채시는데



결론 : 거짓말이든 되는대로 지껄이는 헛소리든 충분히 활용가치가 있다.



'근데 진짜 모르면 어떻게 함? 원하는 대답만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괜히 생사람만 잡는 거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 방법이 있더라


일단 정보기관은 조사대상을 납치하기 전에 미리 뒷조사를 충분히 해두고(어디 아파트 몇동 몇호에 살고 가족은 누가있는지 알아야 납치할 거 아녀), 고문을 할 때도 역할을 분담해서 조심스럽게 하거든


이건 가상의 예시로 설명해봄



20xx년, 장르소설 채널에 전술핵이 투하됐다. 전술핵을 투하한 반고닉 'ㅇㅇ#69740000'은 악명높은 분탕충으로 3개월 전 '뒷광고' 사유로 영구차단된 유저다.


주딱은 완장 중 누군가가 분탕충의 차단을 해제했음을 인지, 분탕충 'ㅇㅇ#69740000'을 납치해 모처에 감금하고 정보추출을 지시했다.


정보소비자의 SRI(특별첩보요구) : 분탕충을 풀어준 완장의 정체 파악. 조사대상 : 'ㅇㅇ#69740000'/담당자 : 파딱A 외 2인.

▲ 파딱A는 '기술자(Vanguard, Scout으로 은유되기도 함)'고문을 담당한다. 파딱B와 파딱C는 각각 '간호사''아빠'를 맡으며, '간호사' 역할인 파딱B는 심문을 맡는다.

여기서 '기술자'인 파딱A는 고문만 담당하는 게 아님. 고문하면서 정보를 캐묻기도 함. 단, 질문은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를 잘 생각해서 물어봐야 함.


1. '분탕충'이 감금된 방에 '기술자'가 들어온다. 의자에 묶인 'ㅇㅇ#69740000'은 고개를 돌리려 하지만, 벽면을 바라보게끔 고정된 탓에 문을 확인할 수는 없다.


'ㅇㅇ#69740000'의 옆에는 긴 횡 철제 테이블이 있다.

플라이어, 메스, 나이프, 집게, 수건, 물통, 주사기, 도란스 같은 장비가 그 위에 놓여있다.

'파딱B'와 '파딱C'는 취조실 바깥에서 내부를 관찰 중이며, 모든 장면은 녹음 및 촬영되고 있다. 방으로 들어온 '파딱A'는 'ㅇㅇ#69740000'의 앞으로 걸어나와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Q : '너는 3개월 전에 뭘 하고 있었지?'

→ 고문의 목적(내통자의 정체 파악)과 전혀 상관없는 질문. 해당 질문은 분탕충에게 혼동을 주고, 파딱A의 진짜 의도를 숨겨줌.

☆통상 첫 단계에서 들어가는 질문은 미리 파악해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짐. 이름, 나이, 거주지, 가족관계, 직장, 직무, 대인관계...

이 질문은 의도를 숨기는 것 뿐만 아니라 조사대상이 구라를 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함.

★정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국가정보원이 탈북자를 조사할 때, 어째서 굳이 뻔히 아는 정보(국가정보원이 앞서 입국한 가족이나 친구 등을 통해 입수한 탈북자의 신상자료)를 물어보는지 생각하면 이해가 될 거임.


분탕충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파딱A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2. 파딱A가 묻는다. 조금 강압적인 목소리로.


Q : '나는 네가 여름에 한 짓을 알고 있다. 네 Gmail 계정과 비밀번호를 말해.'

→ 마찬가지로 목적과 연관성이 없는 질문. 특징은 앞선 질문과 동일.


분탕충은 고개를 젓고, 쿵!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친 파딱A가 침을 튀겨가며 소리친다.


Q : '네 구글 계정과 비밀번호를 내놔!'

분탕충은 다시 거부한다.

파딱A는 화가 난듯 안면을 후려친 다음, '손가락 잘리기 싫으면 당장 말하라'며 목에 핏대를 세운다.


설마 자르겠냐는 마음으로 고개를 젓지만, 파딱A는 진짜로 손가락을 끊는다. 분탕충이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끔 수건을 입에 쑤셔넣은 파딱A는, 녀석이 고통을 느끼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분탕충은 순순히 자신의 Gmail과 비밀번호를 털어놓았다.



3. 질문은 다음으로 넘어가고, 파딱A의 요구는 한층 더 대담해진다.


Q : '너 이 새끼 작가지? 아니면 노벨피아 계정 인증해봐.'

→ 1번, 2번과 마찬가지로 연관성이 없는 질문이지만 분탕충은 이게 핵심질문이라고 착각한다.

(예시랑 다르긴 한데 보통은 1번 질문과 연계되는 질문을 던짐. '너가 회사에서 맡은 직무가 뭐야?' ▷ '회사 전산망에 접속할 수 있는 계정을 내놔.' 이런 식으로. 이렇게 문답을 구성하면, 나를 납치한 게 간첩이 아니라 적대적인 기업이 고용한 깡패구나라고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음. 참고로 해외에서는 기업 간에 불법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분탕충은 파딱A가 자신을 '작가로 의심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조사 단계에서 분탕충이 작가라는 사실(3개월 전 차단내역)을 인지한 파딱A는 보다 강압적인 목소리로 겁박하지만, 분탕충은 필사적으로 대답을 거부한다.


파딱A는 그 즉시 무명지를 절단, 다시 질문을 반복하고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올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한다.


마침내 검지 손가락의 둘째 마디를 잘라냈을 무렵, 'ㅇㅇ#69740000'은 자신이 작가가 맞다며 실토하고 노벨피아 계정을 인증한다. 이는 전업작가(겸 커뮤니티 지박령)인 'ㅇㅇ#69740000'에겐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소중한 정보다.


정보를 확인한 파딱A는 즉시 보고한다. 잠시 뒤, '간호사'가 문을 열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간호사' 역할의 파딱B는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분탕충 'ㅇㅇ#69740000'의 상태를 확인한다. 간단한 응급처치를 마친 '간호사'는 '기술자'를 비난하며 강력히 항의한다.


내가 이러지 말라고 했잖냐 - 어쩌라고 - 너 진짜 그러면 안돼 - 내 일인데 신경 꺼라. 이 과정에서 '간호사'가 강한 어조로 힐난/약간의 구타/욕설 등등의 반응을 보이면 파딱B는 파딱A의 선임처럼 보인다.


이제부터 방법은 두 가지로 나뉜다.


[A - '기술자' 파딱A가 '간호사' 파딱B를 쫓아내는 경우.]

파딱A는 분탕충을 독방에 쳐넣어서 고립시키고, 파딱B는 몰래 독방을 찾아가 필요한 물건들(감기약, 항생제, 생수, 음식, 담요, 옷_고문 과정에서 수치심 유발을 위해 옷을 벗기는 경우_, 노벨피아에 접속할 수 있는 태블릿PC 등등)을 제공하며 친절하게 대해준다.


필요에 따라서는 파딱A나 간수가 'ㅇㅇ#69740000'을 구타, 음식을 주지 않고 굶기거나, 식도에 강제로 삽관해서 영양분을 공급하는 등 학대를 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파딱B의 우호적인 태도에 'ㅇㅇ#69740000'가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 파딱B는 낮은 수준의 질문을 던져가며 정보를 수집한다. '가족들이랑 사이가 어때요?' '직장에서는 무슨 일을 했나요?' '뭐가 제일 먹고 싶죠?'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런데 당신을 차단해제 한 완장이 누구였어요?' 필요로 하는 질문을 던지거나, 차근차근 퍼즐조각 맞추듯 정보를 모아서 취합한다.



[B - '기술자'와 '간호사'의 대립이 극한에 달했을 경우.]

파딱A와 파딱B의 감정싸움이 격해진다. 파딱A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테이블을 내려치거나 물건을 던지며 폭력적인 반응을 보이고, 파딱B 역시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며 힐난을 이어간다.


이때 '아빠' 역할을 맡은 파딱C가 난입해 두 완장을 중재한다.


'기술자'와 '간호사'를 내보낸 '아빠'는 직접 분탕충을 심문한다. 파딱A가 그랬던 것처럼 목적과 연관성이 떨어지는 질문들을 쭉 던지다가, 정말로 알고 싶은 질문_내통한 파딱의 정체_을 묻고, 마지막으로 쓸데없는 질문 몇 개 던진다.


A와 B. 두 선택지 중 어느 것을 취하든 파딱들이 정보를 얻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분탕충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거니와, 만약 정보가 틀렸다면 다시 족쳐도 문제 없다.



실제 고문방식/용어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고문은 단순히 조지고 패는데 그치지 않고 심리학, 사회과학 계열의 기술이 동원된다는 걸 설명하는 예시로 이해해주면 고맙겠음


수사학과 화술에 관심이 있는 장붕이라면 눈치챘겠지만 위의 예시는 전형적인 '굿캅 배드캅' 전략+질문자의 의도를 숨기고 대화의 핵심을 기억하지 못하게 막는 '모래시계' 화법이 융합되어있음


예시처럼 정보관은 사전조사+서버에 저장된 자료로 오답체크/사전에 계획된 질문/통제된 환경 속에서 조사대상을 압박하는 방식을 사용함. 필요하다면 조작된 증거(가령 정부에서 외교서한으로 '우린 그런 간첩 보낸적 없음ㅇㅇ'이라고 못박았다는 외조문서)를 보여주거나 블러핑을 쳐서 속이기도 하지


한 마디로 피 말려 죽인다는 소리야


※참고로 간첩을 배신 당한것처럼 속여서 전향 유도하는 건 냉전 시절에 줄기차게 써먹었음. 정보원 포섭동기 중에서 'E'가 상징하는 게 Ego(자아) 혹은 Extraction(강탈)인데 둘 다 의미는 비슷함. 상대방의 자아를 (조작된 증거로)강탈하는 거


그러니 '정보를 얻기 위한 고문이 정말 효과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회사 하기 나름'이라고 답할 수 있겠고(이것도 정보기관의 수준에 따라 갈림. 괜히 냉전 시기 CIA가 우방국 정보기관에서 고문훈련 위탁교육생을 받은 게 아니다)


'원하는 대답만 들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그것 때문에 고문하는 거다'라고 할 수 있겠네. 정보가 필요하니까 고문하는 거지 뭐 다른 이유가 있겠어?


아니, 애초에 자기들이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도 모르면 거긴 정보기관이 아니라 흥신소68이자나...



그래도 조사대상을 족쳐서 얻은 첩보(예시 기준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쓸모없는 것들)를 모으면 다른 정보 분석에서 보강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고, 다른 놈을 고문할 때 정답지로 활용할 수도 있음. CIA가 저 방식으로 빈 라덴의 연락책을 찾아냈던 걸 생각하면 떡을 치고도 남는다


한번 실토했으면 다음부터는 묻는 대로 정보가 술술 나와서 괜히 힘 뺄 필요도 없고(고문 받는 입장도 마찬가지)


정보를 빠르게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이다 보니 고문은 여전히 많은 회사에서 이루어지고 있음



고문저항훈련, SERE 내용까지 쓰고 싶었지만


써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고 너무 길어질까봐 이만 줄임


궁금증이 풀렸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