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글을 작성해주신 다른 분들의 글을 보고, 저도 써보았습니다.


내 이름은 시마부쿠 카지  (島袋風) . 나는 1908년 일본 오키나와현 슈리 시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단 한 글자, 風 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어머니께서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라고 지어주신 이름이다. 난 내 이름이 너무 좋다. 


1920년대 초반, 공황기


알다시피 우리 동네 오키나와는 따뜻한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사탕수수 재배가 성한 지역이다. 섬이긴 하지만 어업이 성한 지역은 아니라는 게 우리 동네의 특징이다. 그런데 요새 우리 집을 포함해 사탕수수 농사가 잘 되어가고 있지 않다.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본토에서는 대만을 합병해서 거기서 제당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 집처럼 사탕수수 농사를 짓는 집들은 점점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 거기다가 정작 우리가 먹고 사는데 필요한 곡식들인 벼,보리,조 같은 것들은 거의 이 섬에서 재배되지조차 않는다. 오로지 먹을 수 있는 것은 고구마뿐이다. 아... 이 고구마도 이젠 신물나.... 


1920년대 후반, 소철지옥


올해도 사탕수수 농사가 망했다. 안 그래도 몇 년 전부터 이 동네의 경제불황은 심화되고 있었지만 정부에서는 조세부담을 완화시켜주지 않았다. 거기다가 우리의 주식이었던 고구마 또한 태풍과 해일에 염해를 입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하나 있긴 있네. 저렇게 딱딱해 보이는 걸 먹을 수 있어?라고 줄곧 생각해왔던 소철이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 소철에는 독이 있어서 독을 제거하지 않고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근데 어떡하지... 배고픈걸... 먹어야 살 수 있잖아... 어쩔 수 없다. 독이 있든 말든 대충 제거해서 먹어야만 한다. 옆집에 사는 내 친구네는 동생이 저걸 먹고 독에 중독되어서 죽기까지 하였다. 아, 진짜 이 섬에서 벗어나고 싶다...


1930년대,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다.

이 섬에서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건만 나는 여전히 슈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한답시고 오사카나 도쿄로 떠나가고 있다. 나도 떠나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아픈 부모님 내버려두고 떠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오키나와 전기에 들어가서 전차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다. 요새는 나하가 슈리보다 더 발전하는 것 같다. 하긴 이 좁아터진 슈리는 더 이상 발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난 내 고향 슈리가 좋다. 나하는 그냥 커지는 곳일뿐, 이 섬의 수도는 내 고향 슈리니까.


1940년대 초반, 말을 뺏겼다.


어엿한 30대가 되었다. 요즘들어 정말 짜증나는 일만 많다. 본토것들은 갑자기 우리 보고 오키나와 말을 쓰지 말라고 한다. 도대체 왜? 우리가 우리말을 쓰는 게 어때서? 하여간 이놈의 사츠마 것들 진짜 짜증난다. 몇백년 전에 강제복속 시킨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말까지 뺏어가려고? 참...대단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본토말을 쓰든 류큐 말을 쓰든 제발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자기네 말이 최고인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그러는걸까? 우리가 식민지냐고. 엄연한 일본 제국 오키나와현인데.


1945년, 오키나와 전투



말도 뺏어가고, 거기다가 우리 땅을 강제로 군기지로 쓰고 하여간 이놈의 나라는 미쳐돌아가고 있다. 대동아전쟁인지 뭐시기인지는 지는 것 같던데도 계속 하고 있으니까 정말 한심해 보인다. 난 지금 요놈의 전쟁 때문에 강제징집되서 나하의 한 부대에 있다. 필요할 때만 본토사람취급하는 이 양심 없는 놈들. 그때였다. 밖에서 펑 소리가 들리더니 타는 냄새도 나기 시작했다. 곧바로 중대장이 오더니 ''공습이다! 피해!'' 이렇게 말했다. 아, 이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어....  일단은 동료들과 같이 근처에 있던 동굴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며칠간 동굴 생활을 하던 중 투항하라는 류큐말이 하늘에서 들렸다. 그래, 차라리 미군한테 항복하면 이 망할 곳에서는 탈출할 수 있을거야. 결국 나와 동료들은 동굴 밖으로 나왔고 난 포로가 되었다. 근데 이상했다. 포로가 되어도 오히려 대접은 더 잘 받았다. 씻겨 주고 밥도 주고. 일본군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게 난 미군의 편이 되었다. 아마 나랑 같이 포로가 되었던 내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을거다.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된 후, 나는 미군한테 여자친구가 잘 있는지 보고 오겠다고 했다. 그는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당시 내 여자친구네 집은 나하시내에 있었기 때문에 가까웠다. 그런데 여자친구네 집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사람이 싸하게 없었다. 불길한 마음을 가지고 여자친구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여자친구의 어머님만 슬피 울고 계셨다. ''왜 우세요?''라고 여쭤보았다. 어머님은 나를 보시더니 ''그 아이는 강제로 어딘가에 끌려갔단다...이를 어쩌면 좋니...'' ''네?'' ''망할 일본군들이 끌고 갔단다... 거기다가 우리보고는 명예롭게 죽으라는 미친 소리를 지껄였지... 미군은 안 좋은 사람들이라고.. 그걸 믿은 옆 마을은 아예 사람들이 다 죽었고... 근데 그거 아니? 미군이 훨씬 좋은 사람들이었어...'' 참 참담했다. 내 삶의 전부였던 내 연인이 어딘가로 끌려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동시에 일본군에 대한 반발심, 증오감도 커졌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나를 포함해서 이 섬 주민들은 미군에게 일본군 위치를 제보하고 다녔다. 나에게는 최선의 복수였다. 내 모든 걸 앗아간 일본군에 대한 최선의 복수. 그리고 5월 30일, 슈리 성에 깃발이 꽂히면서 이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군 꺼지니깐 이젠 미군이 난리다

망할 일본 통치에서 벗어나 우리는 이제 미군정이 다스리게 되었다. 나는 이제 40대에 접어들었다. 미군정이면 더 좋은 세상이 열릴 줄 알았다. 웬걸, 반대였다. 본토의 미군기지들은 전부 다 우리 오키나와로 왔다. 또 강제로 나하와 슈리를 합치면서 공식 중심도시를 자기들 멋대로 나하로 만들어버렸다. 이건 전통적인 중심지였던 우리 슈리를 무시하는 행태다. 차라리 이것만 했으면 말을 안하겠는데 미군들의 사격 훈련으로 자연이나 농지가 훼손되고, 군사기지에서 나온 오염물질이 우물이나 하천을 오염시켰으며, 심지어 원자력 잠수함에서 방사능이 누출되기까지 했다. 아무튼 이러한 미군의 민폐는 우리 오키나와에서는 일상다반사였다. 그런데 옆동네였던 이시카와에서 미군 비행기가 추락해 200명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떨어진 장소는 소학교라는데 이걸 어쩌면 좋아...


더는 못참아, 차라리 본토로 돌아갈래


 60대에 접어들고 평범하게 아무 변화도 없는 일상 . 아직도 우리는 미군 땅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중 미군들이 또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진짜 이놈들도 민폐는 예전 일본군과 다를 게 없나 보다.  이럴 거면 차라리 일본 본토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참 미군 병사의 뺑소니로 인해 윗동네였던 고자시에서 고자 폭동까지 일어났다.  이걸 계기로 우리는 본토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였고, 우리는 1972년 다시 일본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다시 일본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20년이 흘렀다. 미군정 시대는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동네 미군기지는 그대로다. 이러다간 내가 죽고 난 후에도 미군기지가 우후죽순 더 생길까봐 걱정이다. 참 늙고 나니 여러가지 생각에 많이 잠긴다. 생각에 잠기다 보니 따사로운 햇살에 잠이 들었다. 잠이 드는 와중에, 그 아이의 순수했던 얼굴이 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그 아이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다음 생에는, 꼭 다시 만나서 같이 살아요...'' 눈물이 내 눈앞을 흐리게 했고 햇빛은 그런 나를 비춰주기만 하였다. 그 아이의 인생은 따뜻했을 거라고 나를 위로해 주기라도 하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