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당신이 건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국정원 지하에 발을 들일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갇힌 곳은 원룸보다 조금 큰 방이었다. 별다른 가구가 없어 내부를 한눈에 파악하기 쉬웠지만, 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방에서 특징적인 요소를 꼽으라고 하면, 오른쪽 벽의 절반을 차지한 유리창을 가리킬 것이다.


익숙한 공간은 아니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공간 또한 아니었다.

영화를 보면 저런 유리창 너머로 높으신 분들이 지켜보고 있던데.


실제로, 벽 너머로 기척이 느껴졌다. 그 수는 십여 명에 달했다.

그 밖에서 대기하는 인원까지 합하면 세 자릿수는 족히 넘을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저어······ 귀환자 분?

"아, 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널찍한 테이블의 맞은편에는 사뭇 긴장한 기색의 여성이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지레 겁을 먹은 모양이다. 너무하네. 아, 도시를 조금 부숴버리긴 했지만······ 사람 안 죽었으면 됐지.

애써 자기합리화를 마치고 있는데, 여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음, 아무거나요. 귀환자라고 해도 좋고. 그보다, 이런 건 왜 물어봐요?"

"호칭에 민감한 분도 계셔서."


이름 좀 잘못 불렀다고 칼부터 휘두르고 보는 놈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모든 메뉴얼은 피와 땀으로 쓰였다고들 하던데. 어쩐지 지나치게 조심스럽더라.

나는 다짜고짜 칼부터 휘두르고 보는 야만인이 아니다.


"호칭 따위는 상관 없으니까, 저 밖에 있는 사람들 좀 물러 주시죠."

"그건······."


단, 매복은 예외다. 기습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는, 명백한 적대적 의사니까.

눈앞의 여자도 언제 돌변해서 나를 찌를지 모른다.


그래, 그 때처럼 말이다.



***



평소처럼 하늘을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때였다.


멸망하는 세상에 움직이는 것은 거의 없다. 녹슨 구조물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시체를 파먹던 까마귀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전부.

그 외에는 조금씩 변화하는 하늘만이 유일한 볼거리다.


이곳은 어두운 세계였다. 이중적인 의미로. 살아가기 퍽퍽하다는 뜻도 있지만, 잿빛 하늘의 태양은 말 그대로 어두웠다.

무채색 원의 경계 너머로 밝은 빛이 세어나온다. 이곳의 태양은 사시사철 일식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생명이 자라지 못하고, 있는 것들은 썩어가는 게 당연했다. 햇빛은 생명의 근원. 태양신 아크르투스가 살해당한 이후로 대지에 짙은 어둠이 드리웠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천천히 바스러져 가고 있었다.

그런 설정이었다.


저 특징적인 검은 태양 덕분에 내가 소울류 게임에 빙의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울라이크란 무엇인가.

제대로 확립된 정의는 없다. 그러나 시초가 되는 게임을 살펴보면, 몇가지 공통점을 알아낼 수 있다.


한정된 스태미너를 효율적으로 분배해 최적의 움직임을 취해야 한다. 그 말인즉슨, 게임의 모든 것을 꿰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잘 만든 소울류 게임은 도전 욕구를 불러 일으키며, 깊은 성취감을 준다.

어렵다는 얘기였다.


물론 난이도가 높은 만큼 도전의 기회는 무한했다. 하지만 이곳은 현실. 한 번 죽으면 바로 저승행 티켓을 끊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나는 이 게임의 보스에 빙의한 것 같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조금 센 필드보스 정도가 아니라 최종보스,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로.

가녀린 외모에 비해 무력은 상당했다. 이미 죽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녀석들도 본능적으로 가까이 오기를 꺼렸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와중,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가뜩이나 감각도 뛰어놨으니 이질적인 발소리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나타난 것은 정체불명의 괴물이었다. 일단은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긴 했다. 팔 다리가 멀쩡히 달려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 뿐이었다. 피부는 선명한 보라색이었고, 이목구비만 따로 두 배 정도 확대해 놓은 것처럼 생겼다. 입술은 붉었고, 쓸때없이 촉촉해 보였다.

별다른 장비는 없다. 하반신을 가린 사각 팬티와 나무 몽둥이가 유일한 무구였다. 썬글라스를 무구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팔을 대충 휘둘렀다.

어지간한 놈들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저 끔찍한 생명체는 당장 치워버려야···· 뭐야, 안 죽었네?


다시 검격을 날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어나서 검을 내리찍었다. 그러나 괴물은 죽지 않았다.

흥미가 생겼다. 그 흥미가 짜증으로, 이윽고 분노로 바뀔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괴인'은 모든 공격을 회피하며 내게 몽둥이 찜질을 해댔다. 이래 봬도 꽤 단단한지라, 꾸준히 대미지가 박혔다.

분명히 휘둘렀다. 분명히 맞을 것 같은데, 미묘하게 닿지 않는다.

녀석은 나를 철저히 유린하고 있었다.


이를 갈며 덤벼들었다.

놀랍도록 효율적인 움직임이었다. 괴인의 몽둥이에 맞을 때마다 몸이 비틀렸다. 녀석은 그 틈을 파고들어 내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갑옷이 일그러지고, 생채기가 늘어간다.


상황이 지속될수록 우위는 명확해졌다.

나무몽둥이는 검격을 받아내기에는 약하지만, 내 갑옷을 부수기에는 충분히 단단한 모양이다. 찌그러진 갑옷이 바닥에 떨어지고, 유효타가 들어왔다.


위기감이 느껴졌다. 비단 키 때문만이 아니라, 녀석이 나를 내려보고 있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자폭을 시도했다.

전력을 다한 적은 없었다. 그야, 대부분 이전에 찢겨 나가는 걸.

나조차 놀랄 정도로 광대한 폭발이었다. 마치 핵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주위가 초토화됐다.


괴인은 죽지 않았다. 분노가 점차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녀석이 씨익 웃으며 나무 몽둥이로 내 머리를 강타하는 모습이었다.



***



나는 별 볼일 없어 보이던 보라색 괴인을 떠올렸다. 눈앞의 여자는 적당히 강해 보였지만, 칼질 한 번이면 상반신이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다. 힘을 숨기고 있거나, 보라색 괴인처럼 괴상한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절대로 속지 않을 것이다.







이런 먼치킨인데 수상할 정도로 상대를 경계하는 틋녀 보고싶다...


하급 던전에서 뿔토끼를 잡을 때도 필살기를 쓰는 틋녀, 그래서 던전이 통째로 무너지고...


훨씬 약한 상대를 마주해도 최선을 다하고, 방심하지 않으며, 경계하는 틋녀!







그리고 나도 글 잘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글 잘 쓰는 작가님들이 너무 부러워...


나도 그런 소설들처럼 쓸 줄 알면, 보고싶은 소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