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https://arca.live/b/yandere/102127904?p=1

ㄴ여기서 이어짐


•••


오렌지빛 횃불이 지독하리만치 짙게 깔린 어둠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복도.


정적만이 흐르는 복도에는 맑은 구두 소리만이 또각또각 맑게 울렸다.


마리아는 아주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의 스폰이 보여줄 비참하고 애처로운 표정을 떠올렸다.


그가 애원하는 목소리는 기분 좋은 자장가가 되어주리라.


죄수동을 여유롭게 걷던 마리아는, 순간의 위화감 때문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전히 복도에는 정적만이 흐를 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자리에 가만히 서 숨을 크게 마셨다.


비릿한 피내음 사이로 풍겨져 나오는 아이작의 냄새.


언데드 특유의 쿰쿰한 냄새를 싫어하여, 항상 시트러스로 만든 향수로 냄새를 가리던 그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 풍기는 것은...


저급한 인간 여자의 살갗 냄새.


마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의 발걸음은 어느 사이에 점점 빨라져, 아이작이 갇혀 있던 방의 문을 열었다.


분명 식사를 마치는 대로 그녀의 침실로 오라 일렀건만,


그는 이미 '생각하는 방'을 떠나 있었다.


마리아의 명을 따르지 않은 채, 그녀의 침실로 오지 않은 채로.


그저 그가 흩뿌린 검고 붉은 오염된 피만이 바닥을 끈적하게 적시고 있을 뿐이었다.


'내 말을 거역해?'


창백한 마리아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스폰이 명을 거스른 일은 한두 번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마리아는 그를 철저히 짓밟고, 다시는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그를 몰아넣어 '교육'했다.


그랬기에 이번 불복은 그녀를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마리아는 바람과도 같은 속도로 식량 창고로 달려가, 벌컥 문을 열었다.


낡고 무거운 철문도 마치 얇은 나무 문처럼 힘없이 열렸고, 마리아는 그 안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무도 없었다.


살을 바르다 남은 해골, 피를 담아 둔 오크통들, 바닥에 낭자한 검게 굳은 피.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산 자의 기척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작...!"


아이작이 감히 스폰으로써 그녀의 명을 거역한 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마리아는 참을 수 없었다.


감히 그녀의 명을 거역하고 인간의 피를 취하려고 하는 건 어찌 넘어갈 순 있다.


하지만 그 먹잇감의 성별이 문제였다.


아이작이 그의 수려한 외모로 먹잇감들을 홀린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후에 최후의 선은 결코 넘지 못했다.


그것이 마리아가 그에게 내린 언령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아이작은 창부나 다름없는 삶을 살면서도, 정작 그의 정욕은 오롯이 마리아만의 것이었다.


그런 그가 도망쳤다.


인간 여자와 함께.


감정이 매마른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감정,


질투가 그녀의 굳은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순 없겠어..."


마리아는 손톱을 깨물었다.


"산채로 관짝에 넣어주지, 땅바닥에 3년 동안 묻혀 있으면 정신을 차릴 거야..."


그녀는 안개로 변해 순식간에 아이작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성큼성큼 복도에 구두 소리를 새겼다.


이글거리는 살의를 떠안은 채.


•••


"우선 힘을 되찾아야 해."


"그게 무슨 소리야?"


마리가 아이작에게 물었다.


"나는 스폰이지만 당주에게 뱀파이어가 된 순혈 발데마르 가문 사람이야. 뱀파이어의 힘을 되찾으면 해골들도 통제할 수 있겠지."


"그럼 방법이 뭔데?"


"그건..."


아이작이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젊은 마법사는 그녀의 상체를 향하는 스폰의 시선을 느껴 가슴팍을 손으로 가렸다.


"어, 어딜 보는 거야!"


"피."


"...뭐?"


"말할 수 있는 짐승의 피."


아이작은 스스로 말을 뱉으며 스스로 의구심을 느꼈다.


"인간의 피 몇 모금만 마시면 어느 정도는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스폰의 몸과 정신, 영혼은 오롯이 뱀파이어 로드의 것이기 때문에, 뱀파이어 로드와 스폰 사이의 규율은 그 무엇보다 무겁다.


이에 비견할 것은 악마와 영혼을 건 계약, 혹은 영혼의 한 올을 바치는 팔라딘의 맹세 정도였다.


생각하는 짐승의 피를 빨지 마라.


마리아가 아이작에게 내린 규율을 거부하는 것은 생각을 하는 것조차 역한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로 금지되는 일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이렇게 인간의 피를 빤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헛구역질을 하며 다시 그 말을 씹어 삼켜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뱉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이미 아이작은 고문이 끝나자마자 주인의 침실로 오라는 명령도 거역하고 있는 상태이다.


비록 무게감을 가진 규율이 아닌 그저 주인과 하인 사이의 명령이기에 어느 정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이작은 지금 당장이라도 마리아의 침실로 뛰어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너한테 피를 빨리면, 나도 뱀파이어가 되는 거야?"


"뭐?"


초조하게 아이작을 쳐다보는 마리를 향해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건 온전한 뱀파이어만 할 수 있어. 나 같은 스폰은 꿈도 못 꾸는 일이지."


"그러니까, 너한테 물려도 뱀파이어가 되지는 않는단 말이지?"


"그렇지."


"자."


마리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옷무새를 내렸다.


그리고 아이작을 향해 목을 내밀었다.


"바보냐?"


"뭐?"


"여기 널린 게 피인데, 왜 네 피를 빨아?"


아이작은 오크통 하나를 잡고 뚜껑을 열어젖혔다.


향긋하고 비릿한 피내음이 코를 간지럽혔다.


"좀 조신함을 갖춰, 마담. 그렇게 아무 곳에서나 훌렁훌렁 벗으려 하지 말고."


"이익...!"


이를 뿌득 갈며 그를 노려보는 마리를 뒤로 하고, 아이작은 잠시 오크통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정말, 마실 수 있는 건가?'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피웅덩이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끈적한 피가 그의 입을 가득 채우는 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맛보는 인간의 피.


세상의 온갖 진미와 값비싼 술도 이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아이작은 황홀감에 젖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피를 빠는 데 집중했다.


점성 있는 검붉은 액체가 목을 간지럽힐수록, 그 동안 심층 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그의 힘이 점점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야!"


"윽!?"


그렇게 무아지경 속에서 피를 빨고 있던 아이작은, 그의 등을 걷어차는 마리 덕분에 황홀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언제까지 빨고 있을 거야?"


"하아, 이제 충분해."


마리는 아이작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 조금 뒤로 물러섰다.


진주같이 말끔하고 창백한 그의 얼굴에 걸맞지 않는 피투성이 선혈이 그녀에게는 섬뜩하게 느껴졌다.


"가자."


"잠깐."


아이작은 그를 불러 세우는 마리의 말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뭔데?"


"딱 하나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


마리는 결연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아이작은 어디 말해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여기를 나가기 전까지는, 서로 해치지 않는 거지? 이것만 약속해 줘."


"아! 물론이지."


아이작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크롤을 못 읽는 나한텐 네가 필요하지. 그리고 너한텐 이 성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는 내가 필요하고. 우린 꽤 좋은 팀이 될 것 같은데."


"그럼 됐어."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작의 턱짓을 받아치듯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앞장서."


"그러지."


그는 다시 발을 놀리며, 흘리듯이 말했다.


"그런데 이 약속, 성을 나가는 순간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거 알고 있지?"


"넌 여기서 나가면 나한테 뒤졌어."


마리가 곱씹듯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작은 옅은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어두운 복도를 내달렸다.


탓, 탓, 탓, 탓...


돌바닥을 힘차게 내딛는 두 명의 발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복도 끝의 어둠 속에서 꾸물거리는 형체가 그 둘을 가로막았다.


눈두덩이 파랗게 빛나는 해골 검사 하나, 그리고 해골 궁수 하나.


경갑을 입은 두 해골은 한 사람과 한 스폰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멈춰라!"


아이작은 그 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입에 담기 싫은 그의 새로운 성을 입 밖으로 놀렸다.


"폰 발데마르의 명령이다. 길을 비켜라."


해골들은 그의 붉게 빛나는 눈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듯, 서서히 무기를 거두고 길을 내 주었다.


"가자!"


아이작은 마리의 손을 잡아 끌었고, 복도 끝의 계단을 향해 내달렸다.


서로 맞지 않는 체격 탓에 마리는 쓰러질 뻔 했지만, 간신히 중심을 잡고 그의 보폭에 맞춰 뛰었다.


수십 개에 달하는 높은 돌계단을 아이작은 풀려난 사냥개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렸다.


하지만 마리는 그의 속도를 따라오기 버거운 듯 헥헥거리며 뒤쳐지기 시작했다.


"젠장."


그는 몸을 돌려 마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를 홱 낚아채 안은 채, 그대로 계단을 내달렸다.


"너, 너너너너너 너...!"

"고맙단 인사는 나중에 해, 아가씨. 그럴 시간 없으니까!"


마리는 피투성이인 아이작의 얼굴만큼 시뻘겋게 얼굴을 물들인 채 아이작의 품에 안겨 단숨에 계단을 올랐다.


그의 몸에서 강렬한 시트러스 향과, 아주 옅게 언데드 특유의 썩은 버섯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몸을 통해 마리는 새삼 눈 앞의 이 존재가 언데드임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하지만 그 시간도 길지는 않았다.


아이작은 마리를 그의 품에 던지듯이 내려놓았고, 그녀의 눈 앞에는 고급스러운 카펫이 깔린 넓은 복도와, 그 끝에 있는 커다란 마호가니 문이 보였다.


"저기가 서재야."


"저기에 내 소지품이 있다고?"


"아니, 하지만 네 스크롤이 있지."


"그럼 내 물건은 어쩌고?"


"스크롤 빼면 금화 두 닢이랑 퀘퀘묵은 마법 이론서밖에 없더만. 목숨값이라 생각해."


아이작은 그녀와 함께 복도를 걷다 문득 생각이 나 마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니면 '지옥에서 건진 내 아가씨' 2권을 못 읽은 게 아까운 거야? 걱정 마, 아가씨. 서재에 비슷한 책이 있으니까 기념으로 하나 챙겨 가라고."


짝!


마법사는 물리력으로 스폰의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


아이작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묵직한 마호가니 문을 열었다.


고서 특유의 종이와 먼지 냄새가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2m는 되어 보이는 생명체가 그들 앞에 헐레벌떡 달려왔다.


"스폰! 스폰이다! 주인님의 장난감!"


그건 생명체라고 부르기도 힘든 몰골을 하고 있었다.


말라붙은 회색빛 피부에, 기괴하게 뒤틀린 몸의 구울은 아이작을 향해 초록색 침을 튀기며 재잘거렸다.


"넌 여기 못 들어와, 주인님의 허락 받아야 한다! 주인님, 예쁜 주인님!"


"이미 허락 받았어, 재키."


"거짓말! 거짓말!"


구울이 춤을 추듯 방방 뛰었다.


"주인님은 그런 말 없었다! 오호, 게다가 저 고깃덩어리! 주인님은 고깃덩어리가 서재에 들어오는 거 싫어한다!"


구울은 뻥 뚫린 콧구멍으로 마리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마리는 겁에 질려 아이작 뒤로 뒷걸음질쳤다.


"신선한 고깃덩이! 갈비에 붙어 있는 지방도 두툼하다! 하지만 주인님보다는 작다."


"장난칠 시간 없어, 재키. 찾고 있는 스크롤이 있어. 나한테 가져 와."


"거짓말! 거짓말! 주인님께선 아무 말씀 없으셨다!"


"그럼, 지금 여기 주인님을 불러서 확인해 볼까? 누구 말이 진짜인지?"


구울은 아이작의 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물론, 거짓말한 사람은 살가죽이 다 벗겨질 거야. 이거 재밌겠는걸."


"안 돼! 내 예쁜 살갖!!"


구울이 비명을 지르며 스스로를 껴안았다.


"아, 알았다, 스폰! 원하는 걸 말해라! 재키가 가져다 준다!"


"오늘 여기 들어온 스크롤이 있을 거야. 그걸 나한테 줘."


"스크롤, 스크롤! 텔러-포타 스크롤!"


"텔레포트겠지."


"세상에, 구울이 텔레포트의 주문을 알고 있다니."


아이작은 마리의 반응에 머쓱함을 느꼈지만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못해 그저 머리를 긁었다.


"여기, 여기 있다! 텔러-포타 스크롤!"


"역시 빠르네, 재키. 감사히 받지."


"빠름은 생명이다, 안 빠르면 내 예쁜 살갗 벗겨진다! 주인님, 주인님한테!"


자랑하듯이 떠벌거리던 구울의 움직임이 멈추고, 괴물의 시선은 활짝 열린 마호가니 문을 향했다.


"주인님?"


아이작은 피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서재 문 앞에서, 도끼눈을 치켜뜬 마리아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편에 얀순이가 공열안자경 쓰면서 존나 쎄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