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난 가족을 제외한 학교 친구들에게도 내가 자취하는 집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다.

 

쾅쾅쾅!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얀붕아 집안에 있는 거 알고 있어. 그러니까 문 열어줄래?”

 

그날 이후로 난 자취방의 불들은 모두 꺼놓은 상태로 지냈다. 학교도 가질 않았으니 내가 어딨는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철컥! 철컥!

 

"얀붕아 언제까지 선배를 밖에 홀몸으로 세워둘 셈이야?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감기? 달력을 보면 7월이라 적혀 있다. 아무리 지구온난화던, 이제 대한민국엔 계절이 두개밖에 없다 라는 말을 해도 7월엔 반팔 반바지로 밖에 있다고 해도 감기에 걸릴 일은 없다.

 

"정말~ 이렇게까지 나온다 이거지? 이걸 내가 직접 쓰고 싶진 않았는데."

 

철컥. 탁!

 

열쇠로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 예비 열쇠는 부모님이 가지고 있을 텐데? 선배에게도 준 적이 없다.

하지만 괜찮다. 요즘엔 남자라도 조심해야 한다면서 엄마가 전자식 잠금 장치도 달아 주셨다. 그것 만큼은….

 

스륵. 삑!삑!삑!삑!삑!삑! 삐리리릭!

 

"…열렸어?"

 

끼이이이익….

 

허무하게 두개의 잠금 장치를 뚫고 들어온 장본인은 지금 소름 끼치는 내 심정과는 상관없이.

 

밤하늘의 초승달처럼 매우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칠흑 같은 검은 스트레이트 헤어.

오래되고 뿌옇기만 한 복도의 형광등의 빛을 받아도 보다 더 밝게 빛나는 듯한 진주 같은 새하얀 피부.

연예인 기획사에게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적이 있다해도 그 누구라도 믿을듯한 오목조목하며 청초한 얼굴.

 

그 모든 게 합쳐져 내 눈앞에 서있는 것이 얀순 선배다.

 

“드디어 만났네?”

 

파지직!

 

그리고 푸른 전류의 불꽃이 튀는 것을 본 게 내 마지막 기억이다.

 

 

 

○○○

 

 

 

 

시간이나 때울 겸 학교 벤치에 앉아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낸다.

 

"하아… 역시 아버지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얀챈대학교에 입학한지도 3년째.


처음은 언제나 앞길을 설정해주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다. 재벌들 혹은 수재들만 모이는 학교에 입학 예정이었지만 TV에서 본 드라마의 영향일까?


좀 더 나이를 먹기 전 드라마의 청춘과도 같은 삶을 살길 원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옆에는 비서가 따라다니고 또래들은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의 재벌에게 연이 닿기 위해 그들의 부모가 보내는 아첨꾼들뿐.

흔히들 청춘이라 말하는 뜨거운 열정이나, 강렬한 사랑같은 걸 경험해볼 수가 없었다.

 

결국 달라붙는 떨거지들을 멀리하며 학업에만 집중, 그저 모범생이라는 판에 박힌 칭찬만 들을 뿐이었다.

그러면 눈을 높여 선생과 학생이라는 금단의 사랑을 하는 건 어떨까? 그러나 결국 사회의 어른들, 나의 뒷배경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장난정도만 받아줄 뿐 진심으로 그럴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이미 나도 모르는 새에 사라졌겠지.

 

"…흑."

 

이곳에 와서도 결국 다를 건 없었다. 평범해 보이기위해 비서가 상시 붙진 않았지만 등교때마다 타고오는 외제차, 다른 사람들 보다 관리 받아온 것이 보이는 외모와 고급 져 보이는 의복들.


학업에 집중하며 살았으니 당연한듯 받아내는 높은 점수들. 여러 정황들이 맞물려 나를 마치 학교의 여신처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걸 깨닫고 바꾸어 봤자 소문은 이미 겉잡을 수 없이 퍼졌다.

 

남자들은 내 외모와 돈을 보고 다가가지만 그들의 저질스러운 욕망을 눈치채고 멀리했다.

여자들은 그런 내게 남자가 꼬이니 시기와 질투만 할 뿐, 뒷배경을 어렴풋이 눈치채거나 어디선가의 묘한 압박감에 해코지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친해지는 사람도 없었다.

 

자신은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밖에 살지 못하는 걸까? 이대로 재벌2세라는 딱지를 가지고 정해진 사업체와 더 많은 부를 위해 정해진 남편을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만은 싫다. 적어도 남편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고싶다. 하지만….

 

"적어도 더 좋은 곳에서 졸업을 해야 그나마 괜찮은 사람을 붙여주시겠죠."

 

갑작스레 편입의사를 밝히더라도 아버지께선 그저 잠깐의 방황으로 생각할 뿐 다시 제 품으로 돌아왔다 생각하며 기뻐하실 거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조금씩 마음을 다 잡아갈 때 눈앞에 손수건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기… 괜찮으신가요?"

 

"네…?"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온 이 남자는 누구인가. 울고 있는 내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만나는 척 흑심을 가진 남자인가?

 

"일단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눈물부터 닦으세요. 혹시 꽃가루 알레르기면 눈물부터 닦으신 다음 코도 푸세요."

 

스윽

 

왜일까. 분명 이것과 비슷한 만남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손길을 쳐냈을 뿐, 이렇게 직접 손수건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일단 닦아 내시고 가까운 병원이나 약국에라도 가서 처방받으세요. 요즘은 꽃가루가 심해서 괜히 참기만 하면 더 고생이래요. 그럼 이만."

 

그는 자기 할 말만을 하고선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나간다.

 

"아, 저기!"

 

"아, 손수건은 버려도 돼요!"

 

"그… 이름을…."

 

무슨 급한일이 있는지 그는 저 멀리 가버렸다. 거리가 멀어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일어나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서있을 뿐. 그저 손안의 손수건이 소중하다는 듯이 꽉 쥐었다.

그리고 자의론 쓴 적이 거의없는 권력을 꺼내 들었다.

 

뚜루루루

 

"비서님? 네. 잠시 부탁할 일이 있어요. 네. 어떤 남자의 신상정보를 좀."

 

잠깐이었지만 그 남자의 얼굴은 기억했다.

 

그 후 한 호텔의 스위트룸 거실에서 비서가 건네준 파일들을 훑고 있었다.

 

"이름 감얀붕. 올해 신입생인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나온 따끈따끈한 서류철이다. 만난 건 단 한순간이지만 내 머릿속엔 이미 그의 모습만이 아른거린다.

난 마치 홀린 듯이 서류와 노트북 화면을 번갈아가며 정보를 확인한다.

 

"키는175, 몸무게는 적당하고 근육도 좀 붙어있네."


그 누구에게나 잘생겼다는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훈남이라고 불릴정도의 외모도 갖췄다.


"학과는 나랑 같은 학과에 집은 자취중인가, 남자 혼자선 영양학적으로 걱정인데."

 

자취생이라니 남자 혼자선 제대로 챙겨먹지도 않을 테니 벌써 그의 건강까지도 걱정된다.

 

"비서님 앞으로 얀붕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조사해서 저에게 보내주세요. 당연히 아버님껜 비밀로 하시고요."

 

"네."

 

"…후후훗. 일단 그와 친해져야겠지."

 

서류철에 찍힌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쓰다듬으니 몸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천천히."

 

 

 

 

○○○

 

 

 

 

요 몇 개월간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미행하는듯한 그런 느낌.

 

스윽.

 

혹시나 하여 뒤를 돌아봐도 복도엔 쥐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아무도 없이 고요한 것이 소름 끼칠 뿐.

 

"…빨리 다음 강의실로 가자."

 

그저 이 꺼림칙한 기분을 숨기기 위해 굳이 말로 내뱉으며 강의실로 향할 뿐이었다.

 

끼익

 

"어맛!"

 

"엇!"

 

그리고 강의실의 문을 열자 타이밍이 안 좋았는지 문 건너편의 사람과 문이 부딪힐 뻔했다.

 

"앗, 저기 괜찮으신가요? 어디 다치신데는?"

 

"아, 네. 괜찮아요. 어디 부딪히진 않고 그냥 놀라기만…!"

 

그녀는 말하다 말고 내 얼굴을 보자 방금 보다 더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혹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난 잠시 내 얼굴을 긁을 뿐이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저 기억 안 나시나요? 그때 벤치에서!"

 

"벤치? 어, 언제를 말씀하시는지."

 

"여기, 이 손수건도 건네주셨잖아요."

 

벤치? 손수건? …아!

 

"아 그때 울고 계시던 여성분!"

 

"앗 잠깐만요. 목소리가 너무 커요."

 

그녀의 말대로 강의실의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괜한 소란을 일으킨 것 같아서 괜스레 얼굴에 열이 난다.

 

"일단 자리를 옮길까요? 여기 서서 얘기를 계속하는 것도 뭣하니 카페라도 가도록 하죠."

 

"네? 아니 저 곧 있으면 강의 들어야 하는데."

 

"그 정도는 괜찮아요. 자 따라오세요."

 

"어어, 잠시만요!"

 

그녀는 막무가내로 내 손을 맞잡곤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뿌리칠 생각도 못 한 채 그녀에게 질질 끌려 결국 근처의 카페에 앉혀졌다.

 

"아~ 같은 학과 선배셨군요."

 

"나도 이런 후배가 있는 줄은 몰랐네. 입학하자마자 여자의 눈물을 훔치다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상하죠."

 

"후후훗."

 

그녀, 그러니까 얀순 선배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여태껏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강의를 빠졌지만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거다.

그런데 학과도 같은데 몇 개월이나 못 마주칠 수 있나? 이렇게 예쁘시면 눈에 띄었을 텐데.

 

"어머 내 얼굴은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걸까?"

 

계속 쳐다보았길래 기분이 나쁘셨던 걸까? 

 

"그으게에 예, 예쁘셔서요."

 

"돌직구? 이걸 남자스럽다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하하하."

 

긁적긁적

 

너무 당황해서 생각한 걸 그대로 내뱉어 버렸다. 선배가 내게 호의가 있단 걸 느끼곤 있지만 이런 게 괜히 안 좋게 보일수도 있는데. 앞으론 조심하자.

 

"하지만 너라면 그런 말을 들어도 괜찮아. 오히려 더 듣고 싶은걸?"

 

"하하하."

 

조심하지 않아도 괜찮을지도?

 

 

 

 

○○○

 

 

 

 

그 이후로 선배와 전화번호도 교환하고, 같은 강의에선 바로 옆자리에 앉거나, 가끔씩은 쇼핑이나 신작 영화 보러 가는데 끌려다닌다. 솔직히 말하자면 데이트다.


행복했다. 처음 며칠은 뇌가 따라가질 못했다. 나에게 이런 행운이 온다는 것을. 또 몇 주간은 즐거웠다. 나에게 이러한 인연이 생긴 것을.

그리고 자연스럽게 난 얀순 선배와 연인이 되었다. 만난 기간도 짧고 아직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것이 많지만 그게 무슨 문제인가 서로가 좋아한단 것만 알면 됐지.

 

가끔은 데이트 때 그리 비싸진 않지만 알바하며 모은 돈으로 액세서리나 화장품을 선물해줬다. 인터넷으로 여친에게 알맞은 선물을 찾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럴 때면 선배는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보물로서 간직할게."라는 말을 한다. 난 그때마다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니 막 쓰라곤 하지만. 선배를 만날 때마다 관리한 듯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는 팔찌나 선물해 준 립스틱을 바르고 온 것을 보면 괜스레 흐뭇하다.


그러고 나면 선배도 나에게 선물을 사주신다. 처음엔 엄청 비싸 보이는 시계를 주시려고 하기에 한사코 거부하고 운동화 정도로만 서로 타협을 했었다. 하지만 선배는 이걸론 부족하다며 내가 자취생인 걸 알자 여러 반찬들을 사주셨다. 난 내 자취방을 보이기엔 부끄러워 그저 반찬통만을 받아들고 집으로 가져왔다. 들고 올 땐 힘들었지만 가득 찬 냉장고를 보면 앞으로 반찬 걱정으로 돈 쓸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고 여친의 사랑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하면 기쁘다.

 

평소와 같은 날, 연인이 된 후엔 점심시간을 같이 할 때가 많지만 오늘은 선배가 중요한 일이 있다며 따로 먹기로 하였다.

 

"오늘은 돈까스에 제육인가"

 

팍!

 

"윽!"

 

"오~ 얀붕이 요즘 너 선배랑 분위기 엄청 좋다?"

 

"얀돌아 등 좀 치지 말라니까. 쏟을 뻔했잖아."

 

대학에서 사귄 친구인 얀돌이다.

이놈은 나랑 학과는 다르지만 어쩌다 보니 친해져서 점심은 거의 같이 먹는다.

 

"내가 말했지 얀붕이좀 그만 괴롭히라고."

 

"미안 미안 그렇게 아팠쪄?"

 

"아니다. 됐다 됐어 어른인 내가 참아야지."

 

그리고 얀돌이 뒤를 따라오는 여자는 얀진이.

서로 어릴 때부터 친한 소꿉친구라고 하고 심지어 둘 다 운동을 하는 집안이라 덩치가 어마어마하다.

잘 어울리는 근육 바보 커플이지.

 

"그런데 얀붕아 너 그 선배랑 용케도 친해졌다? 절벽 위의 꽃을 용케도 얻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 선배 소문 들어보니까 엄청난 재벌기업인의 딸이라던데?"

 

"어?"

 

"얀돌아 그걸 왜…!"

 

분명 선배가 잘 사는 집안이란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재벌이라고 불릴 정도의 집안이라고?

얀진이는 그 말을 듣곤 얀돌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그보다 얀돌이의 말이 더 빠르게 나왔다.

 

"엉 그래. 듣기론 선배가 입학하고 나선 엄청나게 대시를 많이 받았고, 매일매일 다른 남자들이 꽃을 들고 왔다던데. 그런데 그 선배 엄청나게 철벽이라서 전부 찼다더라. 그래선지 쓰레기통에 꽃이 비는 날이 없어서 청소부 아저씨가 자기 일이 정원사인지 청소부인지 헷갈리셨다고 하던데."

 

"어, 어어…."

 

그 정도라고? 하지만 내가 선배랑 다니면서 느낀 건 그냥 친절하고 예쁜 여자라는 것뿐이었다.

인기가 많다고 하기엔 선배 주변에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여자조차도.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그 선배가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재벌은 언제나 우릴 장난정도으그으윽!!”

 

"얀붕아. 얀돌이 말은 들을 필요 없어. 우린 잠시 다른 자리로 옮겨서 밥 먹을게. 야 너 식판 똑바로 들고 따라와."

 

"윽, 그러면 잠시 옆구리를 놔주으으으읏!!"

 

얀진이는 그렇게 얀돌이를 끌고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얀순 선배가 재벌에 엄청난 인기인? 그런데 나를 왜?'

 

분명 얀돌이는 선배가 엄청난 철벽이라 하였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선배는 그러한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선배 쪽에서 내게 먼저 다가왔었지.


그럼 도대체 이유가 뭘까 그렇게 돈이 많고 인기인인 선배가 월세 자취방에 알바하면서 근근이 먹고사는 나 같은 놈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이유가.


단순한 동정심일까? 얀돌이가 말한 대로 잠깐의 유흥을 위한 장난?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부정한 생각들이 몰아친다.

나는 점심을 다 먹고 나서도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집에 갈 땐 언제나 내 얼굴을 보고나서 떠나던 얀순 선배는 오늘 하루가 지나도록 만날 수 없었다.

 

 

 

 

○○○

 

 

 

 

일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네가 얀붕이냐?”

 

“어, 네.”

 

깔끔하게 포마드 헤어스타일로 넘긴 머리에 정장을 입은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

오늘도 선배와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우울한 기분으로 하교도중 내 앞에 나타났다.

 

“난 네가 알고지내는 얀순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콜록.”

 

“앗! 안녕하세요!”

 

얀순 선배의 아버지? 나는 곧장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한다.

 

“그래 그나마 예의는 아는 것 같구나.”

 

“저기 얀순 선배의 아버지께선 무슨 일로?”

 

틱! 스읍 후우. 크흠.

그는 담배를 꺼내더니 곧장 불을 붙이곤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피우기 시작했다.

 

“이유가 뭐가 있겠냐 너라면 잘 알 테지. 더 이상 얀순이를 만나지 마라.”

 

“……네?”

 

“분명 몇 달 전만 해도 얀순이의 표정을 보고 본인이 선택한 길이 잘못된 걸 깨닫고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엔 갑자기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아주 매일매일 웃는 얼굴이더군.”

 

무슨 말일까, 돌아온다? 잘못된 길? 이해를 해보려 해도 아는 것이 없으니 추측도 불가능하다.

 

“비서실장에게 물어보니 요즘 그 애가 회사 인력을 멋대로 쓰고 있던게 있더군. 딱히 상관은 하지 않으려 했다만 그게 고작 남정네 때문에 연인 놀이나 하는데 써먹다니. 괘씸해서 나도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었지. 좀 이르긴 하다만 XO재벌의 장남과 맞선을 보라고 했지.”

 

“맞… 선….”

 

그럼 그날 선배를 못 만난 것도.

 

“여기까지 말해줬으면 아무리 너라도 이해했겠지 넌 얀순이랑 어울리지 않아. 뭐 이런 것도 줄 필욘 없겠지만 그래도 표정을 보니 상심이 커 보이니 내가 다 불편하군, 자 받아라.”

 

덥썩

 

그는 정장의 안주머니에서 새하얀 봉투를 꺼내더니 내 손에 쥐여주었다.

 

“현금으로 들고 다니면 불편할 테니 수표로 넣어줬다. 잠깐이긴 해도 네가 얀순이를 즐겁게 해준 대가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다시는 얀순이 앞에 나타나지 말거라. 너나 얀순이에게나 그편이 서로 좋을 테니. 크흐흠.”

 

제 할 말만 한 그는 다 피운 담배꽁초를 도로 쪽에다가 버리고는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도 않아선 도로가에 검은 차량 한 대가 다가오더니 자연스럽게 뒷좌석이 열리고 들어간다. 이윽고 뒷좌석의 문이 닫히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저 앞으로 나아가 사라질 뿐이었다.

 

“난….”

 

난 그저 손에 쥐어진 수표 봉투를 버리지도 주머니에 넣지도 못한 채로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난 다음날부터 집에만 박혀 살기 시작했다.

 

 

 

 

○○○

 

 

 

 

“그게 이유였니? 최근 내 전화나 문자도 무시하고 답장이 없던 이유가?”

 

“느, 네.”

 

나는 내 자취방이 아닌 창문도 없는 어느 화사한 방의 침대위에서 그동안 만나지 않았더 이유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 그런데 선배 제 자취방은 어떻게, 아니아니 도대체 여긴 어딘가요? 전 왜 묶여있죠?”

 

눈을 떴을 땐 눈앞에 선배가 있어서 비몽사몽한 상태로 의심 없이 대화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뒤엔 지금의 상황이 매우 이상하단 것 정도는 알 수가 있었다.

 

커다란 2인용 침대 위에 나는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누워있고 팔목과 손목에는 절대 끊을 수 없을듯한 구속이 되어있어 난 내 사타구니를 숨길 수도 없어 날 쳐다보는 선배를 보며 그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만을 느끼고 있었다.

 

“난 정말로 걱정했잖아. 얀붕이가 아무 말도 없이 학교에 나오지도 않고 답장도 없으니 혹시 사고라도 당한 건 아닐까 마음을 졸였다고.”

 

“선배, 도대체, 도대체 이게…!.”

 

 

갑자기 내 입을 손으로 막은 선배는 조용히 하라는 듯이 자기 입술에도 검지를 올리곤 쉬잇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방의 한구석에 있던 TV를 가리키더니 리모컨을 조작해 화면을 킨다.

 

[……라는 상황으로 갑작스럽게 건강이 안 좋아진 김OO를 대신하여 그의 딸인 김얀순 양이 그의 대리로서 가업을 운영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녀는 기자들 앞에서…….]

 

화면에선 며칠 전만 해도 건강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었던 얀순 선배의 아버지가 폭삭 늙은듯한 모습으로 인공호흡기를 단채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곤 다시 화면이 바뀌어 얀순 선배가 여러 기자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앞으로 기업을 어떻게 이끌겠다는 방향성 등, 재벌의 딸은 이런 것이라는 모습을 보여주며 기자들의 플래시를 받고 있었다.

 

“설마 아버지가 그렇게 빨리 행동할 줄은 몰랐어. 맞선 당일날에 먹여드렸는데도 설마 효과가 돌기도 전에 널 만나러 갈 줄이야. 역시 밑바닥에서 올라오신 분이라는 걸까 행동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해.”

 

“선배 먹여드렸다니?”

 

“응? 아아. 짜증 나게 맞선이나 보게 하고 말이야. 나에겐 얀붕이밖에 없는데 말이지. 아마 눈치채신 거 같아서 방해받지 않도록 치울려고 죽지는 않으시게 약을 좀 태워다 드렸지. 오랜만에 딸이 커피를 태워다 드리니 기뻐하면서 마시더라고.”

 

기이하다. 자기 아버지가 방해가 돼서 치웠다니. 보통의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발상이고 행동들이다. 그리고 그게 나 때문?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다.

 

끼이익

 

내가 묶여있는 침대의 정면에 있던 문이 열리더니 깔끔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숏컷의 여성이 은색 카트를 끌고 들어온다.

그녀의 하얀 셔츠와 장갑엔 방금 묻은듯한 붉은 물감이 묻어나있고, 자세히 보면 정장의 검은색에도 희미하게 보이는 붉은색이 있었다. 그리고 뚝뚝 떨어지는 듯한 모습과 비릿한 철분의 냄새가 느껴지는 걸 보면 저건 물감이 아닌 방금 묻은 피가 분명하다.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비서실장도 끝났어?”

 

“네. 가족을 들먹이니 금방이더군요. 다른 분들과는 달리 손톱만으로 끝나서 의외로 싱겁더군요.”

 

“당신은…?”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얀순 아가씨와 얀붕 도련님을 보좌할 비서입니다. 그리고 처음이지만 지금부터 몹시 실례가 될 일을 할 터라 양해해 주시길.”

 

그녀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까지 은색 카트를 끌고 오더니 거기서 약병을 들어 주사기로 내용물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 그건 도대체?”

 

“이래 봬도 의학 관련 지식은 충분합니다. 실수로 이상한 곳을 찔러서 멍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약의 내용물도 조금 강한 강장제와 발정제입니다. 인체에 유해한 부작용은 없으니 안심하시길.”

 

“그런 게 안심이 될… 읍!”

 

그녀는 주사를 맞지 않기 위해 발작하듯 움직이던 내 얼굴에 약품이 발린 수건을 가져다 대었다. 난 그 냄새를 맡자마자 몸의 기력이 빠지고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여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얌전해진 걸 확인하자 내 팔엔 약이 주사되고 이윽고 얀순 선배에게도 무언가를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의 고통을 줄여줄 겁니다. 이건 쾌락을 좀 더 올려줄 거고요.”

 

“비서님이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야.”

 

“10분 뒤면 마취도 풀리고 주사한 약의 효과도 올라올 겁니다. 준비하시죠.”

 

“카메라로 잘 찍어야 해~”

 

“걱정 마시길.”

 

그녀는 그 후 곧장 카메라를 설치하더니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직후 약을 먹은 선배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며 옷을 한꺼풀씩 벗어던지며 결국 그 진주와도 같은 매끈한 나신이 드러내며 조금씩 조금씩 내 몸과 살결을 부대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선배는 말한다.

 

“미안해 얀붕아. 좀 더 천천히 너와 연인으로서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어. 여기저기 여행도 다녀보고, 사진도 찍고, 너에게 선물도 주면서 너의 추억을 나와 함께하는 청춘으로 물들이고 싶었어. 순수한 추억은 고작 몇 개월뿐이었지만 괜찮아. 오늘 이후에 하는 경험이라도 재벌로서의 돈과 권력이라면 너도 분명 즐거울 거야.

 

오늘 일은 그 시작이야. 처음은 너의 자취방에서 덮쳐주거나 좋은 분위기의 호텔에서 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충분히 로맨틱하지 단 둘만의 세이프 하우스에서라니 후후.


걱정 마 네 몸에 들어간 약물은 다른 재벌들이 쓰는 약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니까. 아마 너도 그 행복감에 겨워서 허리를 멈추지 못할 거야.”

 

“아가씨 슬슬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천장을 바라보며 저항해 보려 참고 있던 내 욕망은 선배의 나신을 바라보자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며 점점 고간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 몸 위엔 선배가 겹쳐져있어 볼 수 없지만 아마 인생 최대의 크기로 커져있을 것이다.

 

“이거 까딱하단 내가 죽을 거 같은데.”

 

“……크흠. 주인 되실 분께선 훌륭하시군요.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제가 옆에서 지켜볼 터이니 걱정 마십쇼.”

 

“그럼 얀붕아 같이 정열적으로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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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성분이 좀 부족한거 같은데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