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동안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던 시선이 내 얼굴을 돌아봤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맞물린 잇새에서 신음과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으, 혹시,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한 번도 내게 존대를 쓴 적 없는 말투로 거듭 물었다. 투명하고 커다란 눈망울이, 그 속에 만성적인 좌절이 드러나는 눈이 성큼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렸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외면하고 싶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절망의 악취를 풍기는 그 얼굴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후우.”


한숨으로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짙은 한숨에 겁먹은 듯, 다가오는 움직임이 주춤했다. 


우리는 늘 이랬다. 한 사람은 겁이 많았고, 다른 한 사람은 일부러 겁을 주곤 했다.

그 역할은 여전하지만, 서로의 배역은 달라졌다.


“똑똑히 들어.”


한 때 최전선에서 동고도락했던 친우에게, 이젠 그 흔적은 기억과 구전에만 남아있는 여인에게, 나는 씹어뱉었다.


“너는 원래부터 여자였어.”


여자의 눈이 더 크게 띄였다.


“너는 한 번도 남자였던 적이 없어.”


작은 입과 분홍색 입술이 뻐끔거렸다. 


“그 가슴은 원래부터 머리통만했고, 엉덩이도 마찬가지였어. 키 좀 큰 거 빼고는 너는 천상 여자였어.”


차별적 발언이자 저열한 신체 언급에도 여인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너는 푼돈에도 웃음 지으면서 그 몸뚱이를 팔았고, 그 돈마저 뺐겨도 쳐웃기 밖에 못하는 그런 여자였다고.”


말투가 거세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어? 너는 원래부터 누구든지 극존칭을 붙였고, 대검은 커녕 부엌칼조차 제대로 못다루고, 간단한 셈도 못하는 멍청한 년이었다고.”


오히려 말하는 내가 화가 났다.


“네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사로서의 기억’이니, 용사였던 기억 그런 거. 사라지는 게 무섭다고 지랄했던 그거! 죄다 네 망상이라고. 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 가?”


목소리가 지나가던 사용인이 들릴 정도로 커졌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쓸 수 없었다.


“너는 8서클 마법사도 해주 할 수 없는 개좆같은 저주에 걸린 게 아니라, 너는 원래부터 그냥 여자, 아니, 가랑이 벌리는 천한 암캐였다고! 알아 들어?!”


마지막 말은 숫제 비명에 가까웠다. 손을 대어보지 않아도, 얼굴이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인은 그 폭언을 듣고서도 그저 멍청하게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움직일 수도, 입을 열 수도 없었다. 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입을 연다면, 내 말을 알아들었냐고 소리 칠지도 몰랐다.


팔다리를 움직인다면, 계속 그렇게 병신년처럼 서있을 거냐고 멱살을 잡을지도 몰랐다.


“후우, 후우, 후우…….”


사실, 그렇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기만할 수 없었다.


입을 열어 너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와락 달려들어 온몸을 꽉 끌어안고 싶었다. 


그런 꼴로 변해버렸어야 했던 건 네가 아니라, 8서클에 오르고서도 저주 하나 풀지 못하는 병신 같은 나였다고 외치고 싶었다. 


갑옷은 커녕 투구도 쓰지 못하는 몸을, 나와 키가 엇비슷한 몸을 두 팔로 끌어안고 큰 소리 쳐서 놀라지 않았냐고 속삭여 묻고 싶었다.


땀내와 담배연기 대신 은근한 향기와 비누 냄새가 나는 네 몸을 끌어안고, 장난 삼아 나를 번쩍 들어올리곤 했던 거대한 체구를 떠올리고 싶었다. 


용사였던 너에게 창녀의 몸가짐과 말투가 스며들 때, 위로는 커녕 계속된 해주의 실패에 되려 짜증을 냈던 나를 용서해 달라고.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이 사라지는 게 무섭다고, 내 손을 붙잡고선 제발 도와달라고 했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내 무능함을 욕해달라고.


네가 더 이상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아니. 사실 그런 너를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어서, 남아있는 희미한 기억조차 말소해버리려는 나를 용서. 아니,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우리 서로 한평생을 살아가자던 약속을 못 지켜서, 이젠 남아있는 너마저 지워버리려고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숨이 콱 막혔다. 하고픈 게 너무 많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정신분열할 것만 같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허어, 허억, 허어어…….”


숨은 모자란데 호흡이 느려졌다. 한 손으로 가슴을 꽉 부여잡았다.


원래도 나는 허약한 체질이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죽을 것 같았다. 이대로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죽고 싶었다.

하나뿐인 친우를 제 손으로 지워버린 무능한 년에게 어울리는 최후다.



“괘, 괜찮으세요?”



그 때, 뭔가가 내 몸을 붙잡았다.


“으흡! 저, 천천히…….”


낯선 손길, 하지만 낯익은 상황.

이 기시감. 소중한 줄 몰랐던 감각. 그리웠던 느낌.


여인이 턱없이 약한 힘으로, 티 없이 희고 작은 손이 내가 넘어지지 않게 꽉 붙들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머리가 부딪히거나 하지 않고, 천천히 엉덩이부터 바닥에 닿을 수 있었다.


“저, 괜찮으세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면서, 나를 들여다보는 눈에게 물었다. 

많은 걸 묻고 싶었지만, 내 입은 짧은 단어만 흘릴 수 있었다.


“왜, 왜……?”


신음처럼 탁한 의문에 큰 눈망울이 깜빡거린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하려는 듯이. 


그리고는.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외치면서 바닥에 반쯤 누운 나한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저, 저같이 천한 년이, 아니, 암캐가! 감히 붙잡아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



소리가 멀어진다. 대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흐흐흐…….”


마른 입술 사이로 갈라진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물어보고 말 것도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똑같은 말만 반복한다. 그 큰 가슴이 출렁거리는 게 아프지도 않은 건지, 긴 머리카락이 치렁거리는 게 불편하지 않은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조아리면서.



“흐, 흐흐. 흐흐으…….”


우스웠다. 이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했던 말과 했던 동작을 지치지도 않고 반복하는 몸매 좋은 여자. 

반려까지 약속했던 친우를 싸구려 창녀로 만들어버린 8서클 마법사. 


“흐흐흐……흐으, 흐으윽…….”


나는 아예 뒤로 누웠다.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내 목소리와,

‘창녀’의 사죄가 내 머릿속에 울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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