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좋아한다는 감정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분명 잊었다고 생각했다.

모두 정리했다고 믿었다.


다만 부질없다.


다시 마주친 그 순간.

심장이 처음으로 뛰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불어오는 바람은 뜨뜻미지근 해지며.


멈춰있던 시간은 비로소 다시 흐른다.


"유메이 입니다."


"알고 있어."


매일 나눴던 인사를 아무렇지 않게 해보았다.

니토리는 나를 바라보며 슬며시 웃는다.


조금만 더 일찍 와줬더라면, 같은 생각조차 허물어지듯 사라지고.

오히려 지금이라도 만나러 와주어서 기쁘다는 감정이 슬금슬금 차오른다.


'나도 참 알기 쉬운 사람이구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어째서 만나러 와주지 않았는지.

그리고 사라져버린 마지막 날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물어볼것은 산더미 만큼 있다.

하지만 내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니토리가 선수를 쳐버렸다.


"오늘 쉬는날이지? 맹우."


"네. 산책좀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럼 나랑 좀 어울려줄래?"


"저야 좋죠."


나는 니토리가 이끄는대로 천천히 니토리의 뒤를 따라갔다.

뒷짐을 진 채 어딘가로 향하는 니토리의 뒷모습은.

어쩐지 예전과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긴..'


마을에서 꽤 떨어진 공터.

언젠가 니토리와 불꽃놀이를 보러왔던 장소다.

그 때의 눈부신 기억을 되새김질 하고 있으려니 니토리가 말을 걸어왔다.


"맹우. 기억해? 그 날의 불꽃놀이."


"기억하죠."


내가 니토리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깨닫게 되었던 날.

그 날의 기억들이 다시 속속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자연스레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니토리의 곁에 다가가 선다.


"정말, 정말 즐거웠어."


"즐거웠죠."


니토리는 미소지으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본다.

그러고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부른다.

익숙한듯 어딘가 서글픈 음정.

니토리가 자주 흥얼거리곤 하는 노래다.


"있잖아 맹우."


"네."


"나 보고싶었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대답은 정해져 있겠지.


"네. 많이 보고싶었어요."


"미안해. 그동안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해 할 것 없어요."


오히려.

미안해야 하는건 나였다.


그 날.


니토리가 심하게 상처받는걸 마주쳤던.

비겁하고 추하게 눈물만 흘려버린.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왜 당당하게 나서서 막지 못 했을까.

니토리를 좋아하는 주제에 그런 간단한 행위조차 하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고.

니토리가 상처받는걸 막지 못 해서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사과의 말을.


"맹우."


"네?"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이요?"


"응."


니토리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말해보세요."


"이제부터는 맹우가 나를 데리고 다녀 줬으면 하는데."


"데리고 다녀요..? 어디를요."


"어디겠어."


니토리는 나에게 귀를 가져다 대 보라며 손짓한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이며 말했다.


"데. 이. 트."


"....!!!"


나는 화들짝 놀라 니토리에게서 떨어졌다.

니토리는 그런 나를 보며 꺄르륵 웃는다.


"맹우! 뭘 그렇게 놀라?"


"아.. 아뇨. 그, 그냥."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니토리와 어딘가 놀러다니고.

니토리와 함께 보냈던 모든 시간들을.

데이트라고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맹우끼리 데이트 좀 할 수 있는거 아니겠어?"


"그, 그런가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한 나는 귓가에 열이 오르는게 느껴졌다.

참 어린애 같았다.


니토리는 이런 이야기 아무렇지도 않...


'어라.'


니토리는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귀 끝이 빨갛게 변한 채.


"맹우. 그렇게 쳐다보면 여자애한테 실례야."


그렇게 말하며 다시 고개를 든 니토리는 장난스럽게 웃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금지."


니토리는 살며시 내 손등을 꼬집는다.


"알았어요. 꼬집지 마세요."


몸집은 니토리가 훨씬 작은데도.

어른스러운것은 언제나 니토리 쪽이다.


"그럼 오늘은 맹우가 잘 아는 인간 마을로 가보자고."


"괜찮겠어요?"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대놓고 마을을 돌아다닌 경우는 없었으니까.


언젠가처럼 요괴를 싫어하는 사람을 마주칠지도 모르고, 여우 가면을 쓴 사내와 마주칠 가능성도 있었다.

늘 니토리가 나를 데리고 다니고, 내가 니토리를 데리고 돌아다니지 못 했던 이유도 비슷한 이유로.

내 쪽에서 먼저 권하기엔 애로사항이 꽤 있었다.


"맹우가 있으니까 괜찮을거야."


엄지를 치켜세우는 니토리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은 없다.


'나를 믿어주고 있구나.'


"그럼 한 번 가볼까요."


"응!"


나는 앞장 서서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향한 장소는 각종 가게들이 즐비한 상점가다.

내가 일하는 가게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눈이 즐거워지는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도 많이 돌아다니고 언제나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상점가.

갓파가 은근슬쩍 섞여 들어가기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때요?"


"여기가 상점가구나."


"혼자서 와본적은 없는건가요?"


"이야기로만 들어봤어. 이따금 동료가 인간 마을 근처로 바자회를 열러 오곤 했거든."


'그러고 보니 갓파는 생각만큼 위험한 요괴라는 이미지가 강하진 않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니토리에게 상점가를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가게에 들어가 여러가지 물건을 둘러보기도 하고.

니토리가 흥미를 보이는 가게에 대해 내가 설명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상점가에서 시간을 보내던 도중.

우리는 한 노점상 앞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노점상은 여러가지 장신구를 팔고있다.


"맹우. 이 팔찌 어때?"


"예쁜데요. 잘 어울려요."


"그런가? 에헤헤."


'정말로 예쁜건 니토리, 당신이지만요.'


니토리는 웃는 얼굴이 정말로 예쁘다.

문득 나는 니토리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어져 니토리가 착용한 팔찌의 가격을 노점상 주인에게 물었다.


"예쁜 아가씨를 봐서 이 가격에 어때?"


"하나 주세요."


"고맙수다!"


"매, 맹우?"


"늘 받기만 했으니까요."


니토리가 나에게 해준것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보잘것없는 싸구려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니토리가 마음에 들어해준다면.

나는 무척이나 기쁠 것 같다.


"......"


니토리는 멍하니 팔찌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살며시 웃었다.


"고마워 맹우."


"다음엔 이쪽으로 가볼까요."


"응."


어느덧 저녁시간이 다가와 마을에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왕래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어느덧 줄어들고 활기로 가득찼던 거리는 어느새 조용해져 간다.


"오늘은 즐거웠어 맹우."


"저도 즐거웠어요."


우리는 마을 외곽을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볼까."


그렇게 말한 니토리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온다.


"?"


"자."


그러고는 팔을 벌린다.

무슨 의미가 있는 행동인지 몰라서 당황한 나는 니토리가 나를 껴안는 순간까지도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을 정도다.


"니, 니토리?"


"헤헤."


따뜻하다.

부드럽고.

애틋했다.


"맹우는 안는 느낌이 꽤 좋은걸."


"자, 잠시만요. 엑."


"하하하! 그럼 다음에 봐."


그렇게 니토리는 웃으며 달려갔다.

나는 아직도 무슨일이 벌어진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진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니, 니토리가.'


한참 동안이나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던 나는.

생생한 감각 때문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포근한 감촉에 잡념이 지워지질 않는다.


'......'


만에 하나.

억에 하나지만.

혹시 니토리 또한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거라면.

그게 자그마한 감정에 불과할지라도.

내가 품은 감정과 이어질 수 있는 감정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마음을 전해야만 할까.


용기를 내어야 하는 걸까.


처음 사랑을 알게된 어린애처럼 밤새 낯뜨거운 고민을 하다가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니토리는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니토리는 분명 다음에 보자고 말해주었다.

나는 니토리를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찾아온 다음 휴일.

아침부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자 니토리가 그곳에 있었다.


"안녕 맹우."


"흐아아음. 유메이 입니다."


"자고 있었어?"


"네."


생각해보니 머리조차 정리하지 않은 상태라 부끄러워졌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응. 알았어."


나는 재빠르게 단장을 마친 뒤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푸흐흐."


"뭐가 웃겨요."


"그냥. 맹우가 나한테 잘 보이려는 모습이 기특해서."


"그런거 아니거든요!?"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아님 말고."


혀를 낼름 내민 니토리를 보고 있으니 내가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로 데려가줄거야?"


"그렇네요."


오늘은...


"으음!! 마히써!!"


새로 열린 찻집에 들러보았다.

찻집이라고 해도 차만 파는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간식이나 디저트도 팔고 있다.

우리는 차와 더불어 여러가지 음식을 시켜 맛보기로 했다.


"이 양갱 정말 맛있는데!"


"그런가요?"


"인간들은 식문화 만큼은 정말 대단하다니까!"


'그 인간으로서 이 발언은 어떨까 싶긴 하네.'


나는 양갱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양갱은 무척 달다.


"너무 단 것 같은데요."


"맛있기만 한데 뭘."


그것을 증명하듯 내 접시에 담긴 양갱까지 니토리가 먹어치웠다.

니토리는 음식을 정말 맛있다는 표정으로 먹어서 보는 나까지 행복하게 만든다.


"으흐흠~"


'단 음식을 좋아하는구나.'


그러고보니 정작 나는 니토리에 대해 아는것이 별로 없다 싶었다.

그래서 물어보기로 했다.

찻집에서 충분히 음식을 즐긴 후 잠시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응? 좋아하는 색?"


"네."


"보다시피 파란색인데."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휙 쓸어넘기는 니토리.

확실히 파란색이 잘 어울리는 인상이다.

옷도 파란색이고.


"맹우는? 어떤 색을 좋아해?"


나는.


"파란색이요."


"그렇구나. 나랑 똑같네!"


"그렇네요."


굳이 니토리가 좋아하는 색이라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이라고 정해두고 있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니토리에게 빠르게 호감을 가지게 된것은.


"그래서? 더 궁금한거 없어?"


니토리는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물었다.

딱히 생각나는것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생각나면 물어봐. 뭐든 대답해줄게."


"뭐든지 대답해주는건가요."


"응! 맹우니까."


나는 물어볼것이 생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찻집에서의 계산을 마쳤다.


"이렇게 얻어먹기만 해서 미안한걸."


"니토리는 돈주고도 못 살 경험을 하게 해줬으니까 이정도는 괜찮아요."


그리고 실제로 모아둔 돈이 꽤 있다.

모으기만 하고 쓰질 않았으니.


"왠지 쑥스러운데~"


니토리는 그렇게 말하며 뒤통수를 긁적거린다.

우리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뒤 찻집을 빠져나와 광장으로 향했다.


'데이트라고 해도 생각나는건 별로 없단 말이지.'


결국 돌고 돌아 분수대였다.


분수대.

좋지 않은가.

흐르는 물 소리가 낭만적이라고 할까.


'사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여자와의 데이트?

그런건 진짜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안온다.


니토리는 내가 하자고 하는 걸 싫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어렵다.

차라리 이건 싫다 저건 좋다 말해주면 좋으련만.


'아아아아아아.'


정말 모르겠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졌다.

그런 와중.


"저기 맹우."


"네, 넷!?"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는 맹우랑 같이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기뻐."


"니토리..."


니토리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 순간.


나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있잖아요 니토리."


분수대 앞에 선 우리 둘.


"응?"


주변에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요."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로 광장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다.


"뭔데?"


주변의 소리가 잦아든다.


"니토리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커진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저질렀다.


"좋아하는 사람...?"


질문이 틀렸어.


"아뇨!"


대답하지 말아줘.


"응?"


내가 먼저 말하게 해줘.


"니토리, 좋아해요."


귀가 먹먹해진다.

심장이 멈춘것만 같다.


분수대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머리 끝까지 전율이 흐른다.

저질렀구나.


"맹우..."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