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허가를 받았습니다.”

 

내게 찾아온 엘리엇이 짧게 전한 한마디.

그 허가가 무슨 허가인지는 달리 물어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 입을 다물었다. 좋은 표정도, 나쁜 표정도 짓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동생의 얼굴을 마주 볼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쓰는 여자보다는, 자신이 독점하는 여자를 갖고 싶단 의미겠지.

 

피와 땀. 술과 정액. 그곳에 찌들어서 광란의 난교 파티를 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다.

 

너는 달라진 게 없구나. 엘리엇.

세상 모든 것이 다 네 것처럼 여겨지고, 다른 것들을 모두 네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구나.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들을 네가 가져갔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잠시나마 꺾을 수 있을까.

 

속 안에서 부글거리는 못된 감정이 선명하게 꽃피운다.

 

“당신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어 제 스승이 되어주리란 것도, 이제부터는 제 아내가 될 거란 것도 말입니다.”

 

“…오늘 일과를 시작해야 하니, 식사부터 하시지요.”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저녁에 뵙시다.”

 

처음에는 처음 보는 반신 취급 정도 되더니, 아내로 삼을 수 있다는 말에 동급으로 격하되었다. 차라리 조금 어려운 상대로 남기를 바랐건만, 아쉽게도 발키리나 에인헤랴르나 다 똑같은 반신인지라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애초 발키리가 에인헤랴르의 위일 수가 없지.

발키리는 에인헤랴르를 위해 존재하는 거였으니까.

 

 

**

 

 

금발의 여인, 리라.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매우 고혹적이다.

 

온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에인헤랴르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일을 하거나 하지도 않았으니 건들 수 있는 사람 또한 많이 없었다.

허락되지 않은 발키리를 만지는 건 곧 프레이야를 모욕하는 것과 같아서 조심스러운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발할라에 막 입성한 엘리엇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이 여자에게 눈길이 가고야 말았다.

 

얌전히, 그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은 채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시선만 보낼 뿐인 여인. 다른 누구와도 섞지 않는 듯한 고고한 눈빛이 왜인지 모르게 더 가지고 싶어져서 속으로 안달이 났다.

 

이제 처음 본 사이에 발정 난 개처럼 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혹여 다른 발키리들처럼 더럽혀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성급히 굴어버리고 말았다.

 

오딘에게까지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간청했으니 말 다 했지.

 

한데, 왜인지 모르게 오딘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아름답고 깔끔한 여자라면 허락지 않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엘리엇은 이미 오딘의 근처에서 시중을 드는 여자들이 많아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가 다른 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락을 받고 나니 엘리엇의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곳에서도 아내를 들일 수 있다는 말에 기쁨이 차올랐다. 전쟁에 참여하느라 즐기지 못했던 여자와의 즐거움을 이곳에서 알 수 있을 거란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끝없이 나오는 고기와 술을 먹고 몸을 일으켰다.

 

각자 원하는 무기를 움켜쥐고 거대한 궁전에 서서 줄을 섰다.

 

“자, 가자! 용맹한 전사들이여! 오딘을 위하여!! 라그나로크를 향하여!!!”

 

앞에 선 전사가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렸다. 그 커다란 목소리는 드넓은 공간을 채운 다른 전사들에게 모두 들릴 정도로 전해졌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노니. 죽다 싸워라, 다시 일어나 싸워라!”

“우와아아아아아!!”

 

형식상 토해내는 말이지만, 고양감을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이미 그들은 싸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으니까.

 

달려, 달려. 그 말과 함께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아군은 오로지 같은 문에 서 있던 동료들뿐이고, 나머진 전부 적군이었다.

사실 맞닿는 공간으로 가는 순간 피아 식별 따위는 의미 없었다.

 

오로지 적을 죽이고 자신은 살아남는 행위를 하면 될 뿐이었다.

 

이곳에 영원한 패배나 승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죽지 않아 일어나니 다시 도전할 수 있다. 패배자가 없이 도전자가 존재하니 승리자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 싸움을 걸고, 받는 자만이 존재할 뿐.

 

거대한 메이스가 사람의 머리를 박살 냈다.

 

으직. 누군가 들으면 인상을 찌푸릴 법한 소리도, 그들에게는 듣기 좋은 경쾌한 소리였다.

 

“크아아아아!!”

 

칼질에 살이 썰려 나가더라도 울부짖거나 비명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기합으로 참아내었다.

 

“죽어라!!”

“죽어!!”

 

서로 죽고 죽인다.

그저 살육의 현장.

 

한 발짝 멀리서 보면 지옥이지만, 진정으로 싸우는 이들은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실실 웃었다.

 

죽으면 다시 열린 문 끄트머리에서 일어나 탁 트인 곳으로 달려 나간다. 죽어도 일어날 수 있다는 그 이점을 이용해, 죽이고, 죽고, 죽이고를 반복했다.

 

엘리엇은 그 속에서 무기를 마구 휘둘렀다.

아직은 손에 익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람 여덟은 죽이고도 남는 본능에 가까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손이 빠른 덕에 기술이 모자라더라도 만회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흐읍!”

“커헉!”

 

기합으로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쓰러졌다.

 

지치지 않는다.

지치면 죽고 일어나 다시금 정신 차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해가 뜨고 지는 순간까지도 계속 싸울 수 있었다. 아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평생을 싸울 수도 있는 게 이들일 것이다.

 

에인헤랴르.

 

그 일원이 되었음을 이번 전쟁으로 뼈저리게 깨달은 엘리엇은 전례 없던 황홀감을 느꼈다. 죽고 죽이는 환경 속에서 터지는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에 중독될 것만 같은 그 감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이, 신입! 잘 싸우던데!!”

 

서로 죽이던 사이였어도 해가 지고 밥 먹을 때가 오면 전부 잊고 동료가 된다.

모두가 같은 동료였다.

 

엘리엇은 씩 웃었다.

 

“제가 운만 나빴지, 실력은 이렇습니다.”

“크으! 젊음이 좋아! 젊음이! 현세에서 누리지 못한 영광을 이곳에서 맛보라고. 사실, 책임질 것도 없이 즐거운 곳이지만.”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큭큭 웃었다.

 

하루의 일과 중 가장 큰 대목을 차지하던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발키리들이 달려와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끝없이 나오는 고기와 술.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과 반신이 된 에인헤랴르의 불사 성격을 유지해 주는 특수한 식사가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음식 먹으면서 박는 게 그렇게 좋더라.”

 

“나는 먹으면서는 못하겠어.”

 

“에잉! 이런 날 것의 느낌이 있어야지!”

 

식사를 나르던 발키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엎드리게 시키더니, 구멍을 벌렸다.

밥을 먹는 시간과 여색을 즐길 시간을 딱히 나누지 않다 보니, 이런 일도 마주하게 된다.

 

곧잘 있는 일인지 다들 인상을 찌푸리는 일 없이 각자 먹어댔다.

 

엘리엇은 싸움까지는 좋지만, 저런 광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이곳에 있다 보면 저것도 하나의 풍경이라도 익숙해지려나 싶어 입술을 우물거렸다.

 

식사가 끝난 뒤엔 모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발키리를 움켜쥐었다.

 

마치 줄다리기라도 하듯 위아래 구멍을 전부 탐한다. 발키리 하나에 남자 셋이 붙은 경우도 볼 수 있었다.

그 많은 전사들을 전부 상대해야 해서 그런 건지, 발키리 수도 꽤 되었다.

 

와중에, 즐기지 않고 어디론가 가는 전사들 또한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엘리엇이 나지막이 묻자, 근육이 빵빵한 남자는 씩 웃으며 가던 곳을 가리켰다.

 

“나는 아내 보러 가지. 여색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나는 내 것이 있는 게 좋아.”

 

같은 생각을 가진 전사가 있으니, 엘리엇은 살짝 관심이 끌렸다.

 

“그렇습니까? 저도 사실 그러해 오딘 님께 부탁해 아내를 얻었는데, 사실 제가 어린 나이에 전쟁만 좇다 죽지 않았습니까?”

 

“그래 보이네. 어린 것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일찍 죽은 것이 아쉽다는 듯한 눈빛을 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아내가 있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선배 되는 분에게 뭐라도 조언을 뜨고 싶습니다. 이곳은 또 발할라다 보니까 이승과는 좀 다른가 하고…”

 

“뭐어! 여기서는 집안일 할 것도 없으니 다리나 잘 벌리면 좋은 아내지! 물론 남의 아내를 탐하는 놈은 가만두지 않아. 어차피 오딘과 프레이야께서도 그건 용납하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네.”

 

뭔가 도움이 안 되는 말이었다.

 

“저, 다리 잘 벌리기만 하면 좋은 아내입니까?”

 

한데, 이 남자는 그거 말고는 아는 바가 없었다.

 

“…나야 뭐, 혼자 즐기는 걸 좋아해서 그렇지, 고상한 건 또 아니어서. 차암, 어차피 저기서 저렇게 섞어대는데 숨길 것도 없나. 어차피 사랑으로 맺어진 것도 아닌데 일단은 몸을 섞고 봐야지. 떡정 아나? 떡정? 하다 보면 또 정이 생기고 그런 법이야. 처음에는 억지로 했어도, 지금은 아내도 날 좋아해 줘.”

 

“그렇습니까…?”

 

“그래, 그래. 난 아내가 기다리니 가볼게. 신입이 아내도 있고 참 좋은 길만 가는구먼.”

 

껄껄 웃으며 갈 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본 엘리엇은 고개를 갸웃했다.

 

억지로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정이 생긴다고?

 

이승의 지식으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지만, 광장을 돌아보면 이승의 상식을 들이미는 것도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했다.

 

어차피 두 신이 엮어준 관계라면 뭘 해도 부부 관계가 이어진다는 거 아닌가.

 

침을 꿀꺽 삼킨 엘리엇은 곧장 리라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 발걸음은 꽤 분주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