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벌려.”


아버지의 숨에서 풍기는 짙은 술 냄새에 난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순순히 입을 벌리고, 혀를 말아 아래 잇몸에 숨겼다. 그러지 않으면 주먹이 날아든다는 걸 알았으니까.


아- 하고, 쩍 벌린 입 안으로는 투박한 노인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씁쓸한 송진 맛이 윗 어금니를 타고 긁으며 아랫니를 차례대로 훑는다.


그리곤 노인은 손가락을 빼내곤 침을 묻힌 엄지손가락을 가죽 치마에 쓱쓱 닦는다.


수북한 수염을 버석버석 쓰다듬으며 계산을 하던 노인은, 이내 무심한 눈빛으로 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려 보였다.


“말랐지만 상태는 나쁘지 않군. 헌데 윗 턱의 젖니가 덜 빠진 나이로는 제값을 받기 어려울 걸세. 그래도 괜찮은가?”

“하! 지 애미 시체에서 기어 나온 새끼한테 풀 먹여서 키울 돈이 더 아깝소. 내 돈이나 주시오.”

“정 그렇다면.”


노인은 아버지가 내민 손바닥 위로 작은 동전 주머니 하나를 툭 놓았다.


그 동전 주머니를 받은 아버지는 손바닥을 꽉 쥐더니,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발길을 되돌려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절룩거리는 발걸음으로 주정뱅이와 창녀가 뒤섞인 인파 속으로 파묻혔고.

이내 내 시야에서 지워졌다.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내게 노인은 무심한 듯 말했다.


“들었느냐. 네 아비는 널 나에게 팔았다.”

“.......”

“너는 자식으로서 아비에게 귀속된 존재이니, 아비가 너의 인신을 매매하는 것은 정당하지. 아직 거추장스러운 미련이 남아 있거든 얼른 털어버려라.”


아버지가 날 팔았다.


그런 모독적인 언사는 노예상으로 살아온 노인의 무심한 말본새로 빚어져 나왔다.


어리광이 가시지 않은 여느 아이였다면, 억울함과 비통함에 울부짖었겠지만. 난 노인의 오른손에 들린 어리고 굼뜬 것을 다룰 때나 쓸 기름 먹인 회초리를 보고 냉정함을 유지했다.

내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저 회초리가 아버지의 주먹을 대신하겠구나- 하고 말이다.


어쩌면, 반항을 모르고 살았던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납득한 걸지도 모르겠다.


다만, 여물지 않은 어린 맘에 호기심이 있었는지. 마차를 정리하는 노인에게 물은 것이 있었다.


“얼마였습니까?”

“흠?”

“아버지에게 치룬 값. 얼마였습니까.”


내 질문을 들은 노인은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더니, 입가를 따라 자란 덥수룩한 수염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15 동전. 그게 너의 값어치이다.”


15 동전.

고작 싸구려 에일 5병을 살 수 있는 푼 돈이다.


그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매긴 값이었다.




* * * * * *




나는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값이 매겨진다고 생각했다.


저 자신의 쓸모에 따라서 말이다.


자갈 밭에서 쟁기를 끌 힘이 있는 건장한 중년 남자가 20 은전, 힘은 약하지만 몸이 건강한 젊은 여성은 30은전이다.

하지만 저울질과 계산을 할 줄 아는 등이 굽은 노인은 3 금전이다.


쓰임새가 값을 정하고, 사용되며 가치를 알게 되는 것.

노예인 나에게는 당연한 이치였다.


노예들은 명부에 매겨진 가치에 따라 대우가 달라졌고, 몸값이 높을 수록 좋은 음식과 깨끗한 옷을 배급 받았다.


그러므로 15 동전의 값이었던 나는 쓰임새가 적었다.

나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산욕열으로 죽였고, 때문에 아버지는 날 미워하고 원망했다. 밭 일조차 도울 수 어린 나이에 끼니도 자주 굶어 몸이 허약했다.


그래서 매매 당시의 내 가치는 낮게 잡혔다.

아버지는 헐 값에 팔아 치운 것이다. 아예 내가 팔지도 못할 폐품이 되기 전에 말이다.


나는 노인의 노예 상단에서도 가장 값싼 노예였다.


그래서 매일 식사가 끝나고 남은 빵 부스러기를 먹었고, 그마저도 없는 날은 개울가에서 허거풀*('빈자를 채우는 풀'이라는 의미의 수생 식물)을 뽑아다 배를 채웠다.

입을 옷은 다른 노예들이 입다가 찢어진 헌 옷을 받아 입었고. 잘 곳은 비만 피할 수 있는 외진 그늘 뿐이었다.


내 쓰임새는 마차를 청소하거나, 쥐와 이를 잡고, 변소에서 변을 푸는 허드렛일 뿐이니까.


상단의 노예 사이에선 값어치에 따라 누가 더 귀하고 천한 지를 겨루었는데, 나는 항상 내 값보다 비싼 이들의 잡일 또한 도맡아 해야 했다.


억울하진 않았다.

내 값어치가 낮을 뿐이었으니까. 난 15 동전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난 내 자신의 가치를 높여보고자 했다.

값싸고 쓸모없는 노예는 팔리지 않는 매물로서 낭비될 뿐이다. 녹이 슬어 상자 구석에 처박힌 쓰이지 않는 검처럼 말이다.


나는 낭비되기 싫었다.


먹고 버린 뼈에서 살점을 발라 먹으며 몸이 닳지 않도록 했고, 물을 기르고 진흙 무더기를 옮기는 등의 힘을 쓰는 잡일을 해서 몸을 키우려 애썼다.


눈은 멀었지만 글을 쓸 줄 아는 늙은 현인의 수발을 들으며 문자와 세상의 지식을 배웠고, 상단의 주인인 노예상에게 복종하며 천천히 신임을 한 닢 씩 차츰 쌓아갔다.


사람은 자신의 값을 매길 수 없다. 그렇기에 값을 매기는 타인에게 증명해야만 한다.

나는 당신에게 쓰임새가 있다고, 나는 당신에게 유용하다고, 나를 당신이 부디 써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식을 배반하는 사람과 대면하게 됐다.

그건 명부에 쓰인 내 값어치가 은전 세 닢으로 고쳐졌을 때였다.


“힐트.”


힐트, 노예상의 가죽 구두를 수선해주고 얻은 이름이다.

이름의 뜻은 '검자루'라고 기억한다.


노예상은 '동급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매물'이라고 나를 인정했고, 때때로 집무실에 불러 일을 내려주곤 했다.

난 그가 부를 때마다 발치 앞에 무릎을 꿇고 낮게 조아렸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그래, 네가 지금부터 맡을 일이 있다.”

“말씀만 해주십시오.”


노예상은 이채 서린 눈빛을 조아려 숙인 내게 내리쬐며, 손바닥을 떡갈나무 기둥의 천막 입구를 향해 뻗었다.

그러자, 엄숙한 몸가짐의 시종 노예들과 함께. 작디 작은 몸집의 여자 아이가 들어왔다.


그 아이는 흰 단색 원피스와 양가죽 신을 신고 있었다.

몸은 작고 체격도 외소하지만, 희고 고운 피부와 금색의 머리칼은 움직임에 따라 찰랑거렸다.


하지만, 푸른 눈동자는 탁하게 죽어 있었고 초점을 잃어 있었다.

소녀는 여시종의 손길에 이끌려 노예상의 옆에 무력한 듯이 서게 됐다.


노예상은 옆에 세워둔 소녀를 지그시 쳐다보고는, 조곤조곤한 투로 내게 말했다.


“힐트, 너는 앞으로 이 아이의 곁에 머물며 아이를 지키도록 해라. 내가 단검 한 자루를 줄 테니, 누군가 이 아이를 해를 가하려거든 가차 없이 단검을 뽑아 내질러라. 물론 그것의 목숨을 끊어도 좋다.”

“.......”


그 말은 즉 여자아이의 값이 다른 노예들보다 훨씬 비싸다는 뜻이다.

내가 의문을 품기도 전에 노예상은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네가 이 아이를 감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나에게 일에 관해 지시를 물을 필요도 없다. 너는 그저 친근한 친구처럼 행세하며 곁을 지키도록 하거라.”

“.......”


노예상의 말이 끝나고 그가 허락하자, 고개를 올려 여자아이를 두 눈으로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작고 왜소하고 손도 작고 곱다. 실 바늘을 꿰는 법도 모를 것이고, 흐르는 물속에 손을 담그고 빨랫감을 다져본 적도 없었으리라.

그런데 왜 그리 비싼 것일까?


그때 난 어렸고, 작은 호기심이 들었다.

맘에 돌부리처럼 박힌 호기심이라면, 빼내고야 마는 것이 나의 가장 나쁜 버릇이었으니까.


“저 아이를 제가 지켜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겁니까?”


내 물음에 노예상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일전에 보여주었던 표정을 지었다.

그와 처음 만나, 내 값을 물었을 때 지었던 표정을 말이다.


“힐트, 너는 상단이 물꽃자리 군도를 거쳐 남방을 지날 때 기둥이 높은 성을 본 적이 있을 것이야.”


고개를 끄덕였다.

가치에 대해 민감했던 나는 그 성의 값어치를 물은 적이 있었고, 9백만 금전이라는 대답을 얻었다.

1백 금전이 쉴세 없이 이틀 동안 질주할 수 있는 말을 살 수 있는 돈이고, 기둥 높은 성의 값어치는 말을 9만 필에 필적하는 어마어마한 값어치였다.


노예상은 내가 기본적인 셈을 그의 어깨 너머로 배웠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그 계산을 끝낼 때까지 점잖게 기다렸다.

그리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가 어림 잡은 가치를 답해주었다.


“이 아이는, 그러한 성을 열 채를 받친다 해도 팔 수 없는 값어치다.”

“......예?”


난 그 대답이 혼란스러웠다.

성이 열 채. 그럼 9천만 금전이다. 이 대륙의 어느 노예상도, 내 앞에 있는 저 노인조차도 그런 금전을 손에 쥐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럼 노예상이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님, 저 여자 아이는 내가 모를 이해타산으로 인해 터무니 없는 값이 매겨진 걸까.


알 수 없다.

그저 마음 속의 동요를 억누르고, 의문을 절제해야 했다.


내가 노예상은 품 속에서 단 검 한 자루를 꺼내어, 내가 받쳐 올린 두 손 위에 올려 두었다.


“명심해라. 만에 하나 너의 부주의로 이 아이의 값어치가 상한다면. 내가 직접 인두를 달궈 너의 쓸모없는 두 눈을 지져 멀게하고 산 채로 창자를 꺼내 잘게 잘라 개 먹이로 줄 것이다. 그것이 두렵다면 단검을 도로 내 손으로 돌려놓고 방을 떠나거라.”

“.......”


노예상은 혓바닥으로는 겁을 주면서도 나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목숨을 담보로 한 기회 앞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저 여자 아이를 충실히 지켜낸다면 내 가치는 은전 세 닢은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오를 것이다.

또한 노예상이 건넨 기회를 거절한다면, 그에게 있어 내 가치는 떨어질 거다.


나는 노예상의 명부 아래에 사고 팔린 수많은 노예의 행적을 기억한다. 노인은 유능한 노예 상인으로서 노예들의 삶을 계산 해오며, 50대의 마차를 가진 대상단을 일궜다.


그의 셈법을 어깨너머로 배운 나는, 이제 내 가치를 계산할 줄 알게 됐다.


“주인님께 실망감을 돌려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노예상이 몸을 기울여 활짝 펼친 손바닥을 내밀었지만, 나는 단검을 돌려놓지 않겠다는 듯이 품 안으로 감추었다.

노인은 무언가 미련이 남는 듯이 손바닥을 되돌려 걷고는, 목소리를 짐짓 무겁게 내리 깔았다.


“너는 이미 나의 경고를 받았다, 힐트. 내게 주어진 단검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라.”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의 발치 아래에 또 한 번 조아리며 단검을 꽉 쥐며,


내 쓰임새가 하나 더 늘었음을 기념했다.




* * * * * *




단검을 쥐게 된 후로 스무 밤이 지났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조용했고 말이 없었다.

헤어 나오지 못할 깊은 충격에 가로막혀, 항상 눈가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다.


어린 나이의 노예에게서 으레 찾을 수 있는 반응이었다.


한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어, 평생을 누군가의 손을 거칠 운명이라는 걸 이해하긴 어려우니까.

나처럼 주어진 처지를 받아들이는 건 특별한 경우다.


금발의 여자아이는 어떤 일에도 동원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종들의 수발을 통해 따뜻한 음식과 깨끗한 옷을 제공받으며, 어느 때는 노예상보다 더 풍족한 대우를 받았다.


곁에서 지켜본 그 여자아이의 일과는 하잘 것 없었다.

들꽃이 핀 녹색 벌판을 둘러보거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거나, 맑은 개울에 여린 발을 잠시 담글 뿐이었다.


간혹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곤 했는데, 그런 시선 외에는 나와 말을 섞지는 않았다.


간혹 노예들 사이에서는 ‘몰락한 귀족의 영애’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허무맹랑한 소문이었다.


볼모로 잡힌 귀족 자제는 친족이 몸값을 지불하기에 노예로 팔릴 일이 전혀 없거니와, 몰락한 영애라도 고귀한 핏줄 한 갈래이기에 노예상이 다루었다간 제국의 역적으로 낙인찍혀 처형당하게 된다.


노인의 노예 상단은 대륙에서 크게 이름이 알려진 상단이기에, 귀족의 여식을 노예로 다룰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견디기 힘들었다.


저 여자아이가 가진 어떤 쓰임새가 가치를 매긴 걸까.


호기심을 억누르는 것은 항상 고역이다.


그리고 그건 여자아이에게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안 돼.”

“.......”


숲길로 들어가려는 여자아이의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그 아이는 미처 내가 먼저 말을 걸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지, 뻐끔거리는 입술에서 얕은 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아이에게 다시 말했다.


“숲은 위험해. 가면 안 돼.”


숲은 항상 위험하다.

특히 주변에 마을이 없고 길조차 나지 않는 수림이라면 더더욱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손가락으로 어두컴컴한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토끼.... 아까 덤불 안으로 들어갔어.”

“안 돼. 토끼 근처에는 여우나 늑대가 나올 수 있어.”


내 단호한 태도에도 여자아이는 토끼에 대한 미련을 꺾지 못했는지.


“시, 싫어! 토끼 볼 거란 말이야...!”

“잠..., 숲은 위험하다니까.”


살짝 눈매를 찡그리면서 나를 지나쳐 갔다.


솔직히 그 아이 정도는 내 힘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내 손톱에라도 긁힐까봐 손을 대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저 뒤를 천천히 따를 뿐이었다.

살금살금 숲 안쪽의 덤불을 타고 들어가는 여자아이 뒤에서, 나는 어디선가 나올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청각을 집중했다.


내가 그러건 말건, 여자아이는 옷깃과 팔에 나뭇잎과 흙을 묻히며 숲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점점 더 깊어지다 못 해, 나무 아래에 그림자로 가둬져 호롱꽃*(푸르게 빛나는 야행성 꽃)이 빛을 내는 지점까지 오게 되자.


더는 불안감을 참을 수 없었다.


“더 깊숙이 들어가선 안 돼. 길을 잃을지도 몰....”

“쉿... 조용.”


그 순간, 여자아이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짓눌러 막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시선이 고정된 곳에는.

작게 파진 굴에 어미 토끼와 작은 새끼 토끼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었다.


“귀엽다...”

“.......”


토끼 가족을 보는 여자아이의 표정은 순수한 미소도 있었지만, 동시에 무언가 씁쓸한 우울감도 동시에 느껴졌다.


수많은 노예와 대면하면서 알게 된 표정이다.


부러움.


여자아이는 굴속에서 웅크려 있는 토끼 가족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잠시.


- 아우우우우우-!


차가운 공기를 가로지르는 날카롭고 소름돋는 울음이 울려 퍼진다.


여자아이는 그 짐승의 울음을 듣자마자 몸이 굳었고, 나 또한 신경이 곤두세운다.


“뭐, 뭐였어? 여우인 거야?”


여우였다면 좋았겠지만, 여우는 저렇게 길게 울지 않는다.


“늑대야. 한 마리인 거 같아.”

“느, 늑대...?”


난 품속에 감춰두었던 단검을 꺼냈다.


나는 늙은 현인에게 여러 지식을 얻었고, 야생의 생태 또한 병수발의 대가 중 하나였다.


늑대는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사냥도 이동도 정찰도 떼를 지어 활동한다.


그런 늑대가 홀로 다니는 경우라면.

무리에서 버려진, 매우 굶주린 늑대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 냄새를 쫒아온 것 같아.”

“.......”


침착해야 했다.

나는 늑대를 잡지 못하고, 여자아이는 늑대와 같은 짐승을 보면 몸이 굳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숲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아니, 여자아이를 빠져나가게 하는 방법 뿐이다.


“내가 늑대를 유인할 테니까, 너는 호롱꽃이 덜 빛나는 쪽으로 달려 나가.”

“너, 너는?”


- 크르르르륵-!


그르렁거리는 흉포한 짐승의 발자국이 더 가까워지자.


난 목청껏 여자아이에게 소리쳤다.


“당장 도망쳐-!!!”


그렇게 말하자, 여자아이는 내 등 뒤로 뛰기 시작했고, 나는 단검을 꺼내 들어.


쉭-


내 손등을 베어 흘러나온 피를 팔목에 칠했다.


굶주린 늑대는 피 냄새를 지나치지 않으니까.


그리곤 곧장 여자아이가 도망쳐 나간 방향과 반대로 뛰기 시작했다.


더욱더 깊숙한 숲으로 들어갈수록, 늑대가 여자아이를 쫒기에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내 보폭은 늑대에 비해선 너무도 좁았고.


- 크르르륵!


“.......”


족히 성인 두 명 크기의 커다란 늑대가 내 걸음을 가로막았다.


놈은 덩치에 비해 야위고 아물지 않은 상처가 가득했지만, 날카로운 맹수의 이빨에서는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 커엉-!


놈은 내 피 냄새에 식욕이 돋았는지, 땅에 발바닥을 찍으며.

내 목덜미를 한 번에 물고 늘어질 거리까지.

느긋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나는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생각 따윈 없다.


이제는 반항을 모를 만큼 무력하지 않다.


“와라.”


나는 단검의 날을 늑대의 앞으로 세우고 달려들기 기다렸다. 그러나 늑대는 무리에게 버림받았을지언정 노련한 포식자인 건 변함이 없었다.


놈은 천천히 거리를 두고 돌며, 내 피 냄새에 입맛을 다신다.


하지만, 주린 배를 껴안고 달려온 놈의 인내심이 그리 길진 않을 것이다.


- 크륵! 크그르르륵-!


내 예상대로 늑대는 커다란 입을 앞세워 송곳니를 앞으로 들이민다.


내 예상보다 너무 재빨랐고, 그리고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발악조차 하지 않고 굳어있을 수는 없다.


“흐읍-!”


나는 숨을 삼키며 늑대가 몸을 던져온 맞은편으로 몸을 던졌다.

늑대는 한 번의 도약으로 지치는 기색도 없이, 곧장 몸을 획 돌려 다시금 달려든다.


그 반응에 굼뜨지 않게, 내 작은 몸을 죽은 나무 뒤로 숨겼다.


그러자 성이난 늑대는 큼지막한 발톱을 날려 나무를 할퀸다.


카가가각-!


“으으윽!”


요란하게 찢기는 소리와 함께 나무 파편이 날리지만, 다행히 짐승의 공격은 한 뼘 차이로 빗겨나갔다.


솔직히 난 날랜 몸놀림 하나만큼 자신감이 있었다.


늑대가 지칠 때까지, 시간을 벌고 나무 위를 올라 타거나 다시 도망가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또 다시 늑대의 이빨을 피해 등을 돌리는 순간.


- 크르르륵!


솨아아악-!


등에 무언가 스치더니, 화끈거리는 열감이 줄기처럼 타올랐다. 그리곤 곧바로 몸에 힘이 빠졌다.


아무래도 한계치를 넘는 고통에 몸의 힘이 탈락해 버린 것 같다.


“허억....”


숨소리가 잘 세어나가지 않는다.

등이 축축한 물기로 젖어가고, 저릿거리는 열감으로 등이 불타오른다.


늑대의 샛노란 눈동자가 내 깜깜한 시야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큭... 윽...”


신음을 뱉고 있는 나에게 늑대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내게 입을 쩍 벌린다.

놈은 내 살점에 정신이 팔렸는지 내가 있는 힘껏 가슴팍을 찌르는 팔은 보지 못했다.


푸욱-!


- 께겡!!! 께엥!!


늑대의 약점은 가슴 정중앙.

핏줄과 허파가 모인 급소이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 단검을 깊숙이 박아 넣었고, 늑대는 껑충 뒤로 뛰더니 바닥에서 몇 번 뒹굴었다.


- 케헥-! 켁- 께에엥-!


발작을 몇 번 일으키며 목에서 피 끓는 소리는 내더니 이내 자기 피에 질식하며, 풀썩 쓰러진다.


“하... 하아... 하....”


나는 숨을 쥐어 짜내기도 힘들었다.

겨우 내쉬는 날숨과 배가 터질 듯이 들이마신 한 모금의 숨이 겨우였다.


몸에 힘이 빠지고, 바람결이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죽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잘 도망쳤을까.”


난 그저, 여자아이가 숲 밖으로 무사히 도망쳤을지가 궁금했다.


그 아이를 지키는 게, 내 쓰임새였으니까.

어쩌면, 나는 내 값어치를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은전 세 닢의 값어치를 말이다.


난 그걸로 족했다.


“.......”


바람이 숲을 간지럽히는, 그런 사그락대는 소리가 점점 먹먹하게 멀어져만 간다.


그렇게 내가 세상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걸 느끼는 찰나.


- 두두두두-


땅을 때리는 여러 개의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진다.


이윽고 희미하게 뜨고 있던 눈꺼풀은 완전히 감기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2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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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판타지를 집착 얀데레 소재와 버무려서 한 번 써보고 싶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