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주의) 유혈, 고어, 식인 요소가 있습니다.



내가 썼는데 내가 내상 입음

흑흑 너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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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라는 마족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마왕의 딸도 아니었고, 강력한 무력을 지니지도 않았다.

그저 여타 마족들처럼 자연치유 능력이 뛰어날 분인, 마계 변방의 한 농부의 딸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풍족하지 못했다.

마계의 척박한 기후는 풍작을 불가능하게 했고,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행복했다.

착하고 귀여운 여동생과 자상하신 부모님.

푹신하진 않지만 따뜻한 침대와 매일 두 끼 먹을 수 있는 식사.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줄 알았다.


착한 성정을 가진 아리아는 동생과도 사이가 좋았다.

언제나 배려하고, 용서할 줄 알며 같이 장난치고 같이 잠들었다.

서로의 머리를 땋아 주고, 화관을 만들거나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인간들의 왕국에서 용사가 나타나 마왕을 죽이러 온다는 소문은 아리아가 사는 시골 깡촌에도 들려왔다.

소녀는 그때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영지가 바빠지고, 세금이 늘어났다.

가끔씩 무장한 병사들이 지나가는 게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삶은 조금 힘들어졌지만, 아리아는 불만을 내색하지 않았다.

밥이 조금 더 묽은 스프로 바뀌고, 더 바쁘게 일해야만 했지만 그녀는 그 와중에도 여동생을 위해 자신의 밥을 나누어 주고, 동생의 일을 일부 덜어 자신이 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열다섯이 된 아리아는 여동생과 산딸기를 따러 근처 숲 속으로 들어갔다.

왜인지 오늘은 운수가 좋아, 평소보다 늦게까지 열매를 따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녀들은 한 바구니 가득히 담긴 각종 열매들을 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맛있는 나무열매 잼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소녀는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돌아간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두 소녀는 주워 온 열매 바구니조차 내팽개친 채 집으로 달려갔다.

마을 광장에는 시쳇더미만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아리아는 장대에 걸린 부모님의 머리를 보며 반사적으로 여동생의 눈을 가렸다.

여동생은 울먹이며 부모님은 괜찮을지 물어봤지만, 아리아는 그저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마을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소녀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밤에는 서로를 꼭 안고 잠을 청하고, 낮에는 정처 없이 떠돌았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둘 중 아무도 몰랐다.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이 한순간에 모두 죽어버린 그녀들은 몸을 의지할 곳이 아무데도 없었으니까.


몇 달을 떠돌았을까, 수도 없는 폐허를 지나고, 수도 없는 시체를 보았다.

열매를 주워먹고, 폐허를 뒤져 식량을 찾고, 낙엽 속에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떠돌던 그녀들은 길가의 나무 밑에서 잠을 자던 도중 누군가의 발길질에 의해 걷어차였다.

반사적으로 동생을 감싼 아리아는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인간들을 보았다.


활짝 웃는 남자와 쓰게 웃는 여자.

로브를 눌러쓴 누군가와 광기에 찬 눈동자를 번들거리는 여자.

중갑을 입은 채 고개를 돌리는 기사.


마왕을 죽이고 돌아가던 용사 파티였다.

원래라면 진작에 왕국으로 돌아갔겠지만 용사의 강권에 마계를 ‘청소’ 하던 중이었다.

용사 파티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직접 막아서지 않고 참여만 하지 않는 수준의 방관자로 남을 뿐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지도에 나온 마을과 도시를 전부 부수고, 죽이고, 폐허로 만들고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이 없자 그제서야 돌아가는 길에 오른 것이다.

아리아의 마을도 ‘청소’된 마을 중 하나였을 뿐이다.

천운으로 그 재난을 피한 소녀들이 하필이면 용사가 돌아가는 여로의 중간에 있었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불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잔혹했다.



활짝 웃는 남자 - ‘용사’는 아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갈 곳이 없으면 같이 가는 게 어떻겠니? 이 주변을 둘러보니 야생동물이 많더구나. 집도 없어 보이는데 둘이서 다니기에 힘들지 않겠니?”

아리아는 친절한 말을 건네는 이 남자가 방금 왜 자신을 발로 찼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착한 아리아는 자는 사람을 걷어차는 걸 상상할 수 없었기에 방금의 충격은 발로 차인 게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며, 자신의 착각이라 생각해버렸다.

그렇게 순진한 소녀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부모님의 원수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남자의 손을 잡았다.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오랜 방랑으로 지친 자신들을, 피로에 쓰러진 여동생을 도와줄 것이라 믿으며.


소녀는 너무 순수했기에, 믿음을 너무 쉽게 주었다.




그날 밤, 아리아는 강제로 처녀를 잃었다.

갑작스레 덮친 거친 손길에도 그녀는 혹시나 옆에 잠든 여동생이 깰까 고통과 수치심에 새어나오는 비명을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강간당하는 와중에도 아리아가 느낀 것은 고통이나 쾌락이 아닌 동생은 멀쩡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하지만 아리아의 고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용사 파티가 왕국으로 돌아가는 여행길 동안 아리아는 거의 매일 밤 강간당했다.

여동생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면야 그녀는 무엇이라도 해 줄 수 있었다.


식량도 처음에는 평범한 2인분을 주더니 갈수록 양이 적어졌다.

아리아는 제 먹을 것까지 동생에게 양보하며 굶었다.

하루이틀 굶는 일은 예사가 되었다.

가끔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기사가 몰래 음식을 챙겨주었기에 아리아는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다.



당연히 도망치려고도 해 보았지만, 농부의 딸이 마왕조차 죽인 실력자들이 모인 파티의 눈에 띄지 않고 빠져나가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용사에게 잡혀 얻어맏으며 작은 몸을 최대한 펼쳐 동생을 감싸는 아리아는 너무도 쓰디쓴 무력감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마계를 벗어나 왕국 국경에 도착한 용사는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다.

색종이와 꽆잎이 비처럼 내리고, 환호성과 박수소리, 용사를 보러 서로를 밀치는 소년소녀들의 얼굴이 어디에나 보였다.

용사 일행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두 명의 마족 소녀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용사가 즐길 만큼 즐겼으니 풀어 준 것일까?

아니면 국경을 넘어오기 전에 어딘가에 죽여 묻어버린 것일까?



불행하게도 용사는 마족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용사는 애써 얻은 귀한 장난감을 들키기 싫다는 듯 두 소녀를 아티팩트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사방에 어둠이 깔린,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공간 안에서 아리아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이 여기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두 소녀는 가끔 주머니가 열리고 떨어지는 음식물 찌꺼기를 먹으며 어둠 속에서 버텼다.


어느 날 주머니가 뒤집히고 자매는 돌바닥에 처박혔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환한 빛에 둘은 눈조차 뜨지 못하고 바닥을 빌빌 기었다.

거센 발길질이 그녀들을 반겨주었다.


빛에 겨우 적응을 한 눈이 겨우 본 것은 차가운 철창과 용사의 비릿한 미소였다.


이날 이후로, 아리아는 죽을 때까지 햇빛을 보지 못했다.




두 소녀가 들어온 계절은 겨울이었기에 차디찬 혹한이 감방을 가득 채웠다.

그녀들에겐 당연하게도 모닥불은커녕 담요도 제공되지 않았기에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용사는 둘을 이곳에 던져놓은 후 말 한 마디 없이 작은 주머니칼을 한 자루 던져주고 몇 주간 오지 않았다.


칼을 받은 지 사흘이 지나고 아리아는 칼의 사용법을 알아버렸다.

마지막 남은 가족을 반드시 지키고자 다짐한 소녀는 천천히 자신의 허벅지로 칼을 가져다댔다.



마족에게는 월등한 자연치유력이 있다.

잔병치레에도 걸리지 않고 다쳐도 금방 낫는다.

이 마법적인 힘 덕분에 자매는 몇 주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동생은 그녀를 말렸지만 아리아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연약한 동생의 손을 뿌리치고 묵묵히고통을 견뎠다.

용사가 핼쓱해진 자매를 찾아온 것은 2주 뒤였다.


“이야, 이걸 사네?”

그는 웃으며 그녀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리아는 칼을 잡고 그를 노려보았지만 위협이 될 리 만무했다.

“이 악마년 성깔이 아주...그래, 재밌는 게 생각났어.”

용사는 아리아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각종 고문을 가할 동안 기절하거나, 정신줄을 놓지 않고 버티면 여동생은 건들지 않아주겠다고.


아리아는, 여동생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 무엇이라도 해 줄 수 있었다.
 
그 무엇이라도.



다음날부터 각종 고문이 준비되었다.

용사는 영악하게도 냅다 아리아를 잡아다 고문을 시키지 않았다.


“고문을 받으면, 음식을 주마. 잘 고르면 고기를 먹을 수도 있을 거야.”


용사는 아리아가 ‘스스로’ 고문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즐겼다.



손톱 뽑기, 이빨 뽑기, 손가락 꺾기부터 시작해서,

몸을 잡아 늘리거나 관절을 부수고, 녹슨 톱으로 천천히 팔다리를 썰어내기도 했다.

어느 날은 산 채로 배를 째기도 했다.

친절한 용사는 심장과 간, 허파와 위 등등의 위치와 역할을 하나하나 붙잡고 설명해주었다.


아리아는 여동생의 이름을 되뇌며 견뎠다.

고향의 작은 오두막집을 생각하며 견뎠다.

풀밭에 누워 장난치던 기억을 떠올리며 견뎠다.



지나친 고통에 의식이 멀어지려 할 때는 억지로 눈을 부릅떠 가히 초인적인 의지력으로 의식을 고통 속에 유지했다.

여동생을 위해서.

 
고문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엔 다다음날까지 음식은 물론이고 고문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한번 거절한다면 사흘을 물도 없이 꼼짝없이 굶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쉴새없이 비명을 지르느라 목이 쉬어도, 장기가 뒤틀리고 뭉개지며 입에서 피를 토해도, 그녀는 감방으로 돌아와 동생이 무사한 것만 확인한다면 아리아는 버틸 수 있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의와 모든 고통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그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매일매일을 불안과 환청 속에서 살았지만, 그녀의 품 안에 안긴 동생의 온기를 느끼면 환각은 잦아들고 포근함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사방이 혐오와 고통으로 그녀들을 찢어버리려 하는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의 존재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다.


용사는 그게 꼴보기 싫었다.


어느 날, 용사 파티의 마법사가 용사에게 부탁했다.

왕실의 명령으로 죄인을 고문하는 기계를 개발했는데 테스트 대상이 필요하다고.

의자가 움직이며 연결된 장치가 순서대로 동작하는 원리였다.

“뭐, 한 사이클이 돌면 살아서 나오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마법사는 웃으며 용사와 함께 찻잔을 기울였다.

용사도 좋은 생각이 났기에 마법사의 실험 요청을 흔쾌히 받아 주었다.



아리아는 용사가 동생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자 화들짝 놀랐다.

자유에 대한 희망은 죽은 지 오래기에 꿈조차 꾸지 못하고 하루하루 버티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 살고 있었는데, 자유?

당연하게도, 대가는 비쌌다.

자동 고문 기계의 체험이 그 대가였다.


용사는 인간이라면 죽어버리겠지만, 마족은 재생력이 뛰어나기에 살아서 나올 수 있다고도 말해주었다.


여동생에게 주어질 자유는 하루의 생존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다.

아리아는 거부하지 못했다.


용사는 아리아의 동생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했다.

기계 설치할 자리가 모자라다는 이유였다.

여동생에게 무슨 짓을 할 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리아는 동생을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


영악한 용사는 희망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라. 조금이라도 고통을 가했다면 너희를 둘 다 풀어주마.”

당연하지만,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거짓말에라도 매달리고 싶었기에 그 말을 믿었다.

용사는 동생의 손을 붙잡고 감방을 나섰다.


아리아는 동생을 보며 웃어주었다.

여동생도 아리아를 보며 웃어주었다.

용사도 활짝 웃었다.


그렇게 스스로 의자에 묶인 아리아는 자신의 손으로 천천히 압착기가 내려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손뼈가 박살나며 살점을 파고들었다.

손가락은 제멋대로 꺾여 비틀렸다.

손이 말 그대로 으깨지는 고통에 아리아는 비명을 질렀다.

압착기는 묵묵히 자신이 할 일만을 할 뿐이었다.


이것은 그저 첫 번째 단계일 뿐이었다.


다음은 물고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소를 찾아 갈구하는 그녀에게 기계는 끓는 물 속으로 얼굴을 처박는 걸로 답했다.


다음은 칼날이 살점을 저몄다.

다음은 손톱 사이에 바늘을...

다음은 달구어진...

다음은...


아리아는 모든 고문을 억지로 견뎠다.

사랑하는 동생이 이런 고통을 겪게 할 수는 없었기에.

이것만 견디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기에.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견디며 혼자 지낸 지 일주일은 되었을까, 밥만 대충 던져주던 간수 대신 용사가 직접 찾아왔다.
 
오늘이 자신의 결혼기념일이라던가, 그런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해 마족 노예인 아리아에게도 고기를 먹을 수 있게 자비심을 발휘해주겠다 했다.

아리아는 기뻤지만, 여동생도 같이 음식을 먹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인지 마음 속에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이 무색하게도, 용사가 가지고 온 것들은 정상적인 고기 요리들이었다.

잘 구운 스테이크, 정갈히 놓인 쪽갈비들...

농민의 딸이었던 아리아는 평생 구경도 못 해본 호화로운 만찬이었다.

더욱이 노예의 신세로 전락하고 난 뒤로는 개밥보다 못한 음식물 찌꺼기로 연명했기에 더욱이 화려한 음식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에 침을 꼴깍 삼키는 아리아를 보고 용사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잘 포장된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아리아가 모든 것을 바쳐 지켜 주려던 여동생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아리아는 악을 쓰고 용사를 저주했다.

원망과 원한을 쏟아내고, 분노를 토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그를 저주했다.


“음식을 만들어줘도 불만만 많은 년 같으니.”

용사는 침을 탁 뱉으며 아리아의 머리를 짓밟았다.


더러운 신발 밑창과 더욱 더러운 바닥 사이에 끼여 숨조차 못 쉬는 무력한 소녀는 꺽꺽대며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쯧, 기껏 시간을 내 줬건만 기분만 잡쳤군. 개같은 년.”

용사는 간수에게 말해 돌아다니는 개 몇 마리를 잡아오라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여동생의 고기가 들개 무리에게 던져져 뜯어먹히는 것을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용사가 떠나고, 감방 안에 남은 것은 아리아와 여동생의 머리 뿐이었다.

아리아는 너무 가벼운 머리를 꼭 껴안고 엉엉 울었다.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나오고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울다가 지쳐 기절하고, 깨면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기력을 모두 소모해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아리아는 너무 배가 고팠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용사는커녕 간수조차 보이지 않았다.


칼도 없기에 제 살을 썰지도 못했다.

죽은 눈으로 감방을 둘러보던 아리아는 자신의 품 안을 내려다보았다.


시취를 풍기며 천천히 썩어가는 머리를.



아리아는 자신을 저주했다.

한순간이라도 그런 마음을 먹은 자신을 저주했다.

단단한 돌벽에다 머리를 박으며 자해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리아는 여전히 굶주렸고, 썩는 냄새는 이제 향기롭기까지 할 정도로 아리아를 유혹하고 있었다.

하루가 더 지나자 아리아는 그녀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여동생의 머리도 감방 저 편으로 던져둔 채 반대쪽 구석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이었다.

소녀는 당장이라도 머리를 향해 뻗으려는 손을 반대쪽 손으로 꼭 잡고, 욕망을 잠재우고자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극심한 배고픔은 잠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며칠이 더 지났다.


피곤과 끔찍한 굶주림에 미쳐버린 아리아는 결국 입을 벌리고야 말았다.


썩은 고기는 너무나 달콤했다.




용사는 이 모든 걸 아티팩트로 보고 있었다.


 

굶주림이 가신 아리아가 자신을 돌아볼 때는

입가에 썩은 피가 가득한 채 여동생의 머리에 얼굴을 처박고 뜯어먹는 짐승새끼만이 하나 보일 뿐이었다.

감방에는 지성체의 것이라 보기 힘든 괴성만이 울려펴졌다.





아리아는 그날 이후로 자아를 잃어버렸다.

마음도, 영혼도 전부 산 채로 썩어버린 그녀는 살아있는 인형이 되어버렸다.

의지가 꺾이고 부서져 짓밟힌 마음은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불쌍한 아리아는 몸만 남기고 죽어버렸다.



고문을 하면 움찔거리지만 그뿐. 고통에 의한 반응 말고는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

강간을 해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며칠을 굶겨도 밥을 달라 애원하지도 않는다.

음식이든, 음식이 아니든, 음식이라 부르지도 못할 무엇을 던져줘도 조금이라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하는 일 없이 그저 덤덤히 씹고 삼킬 뿐이다.

죽은 눈으로 그저 허공을 바라보는 아리아는, 아리아의 껍데기는 그렇게 ‘재미가 없어’졌다.


‘쯧’

용사는 혀를 한 번 차고는, 가볍게 아리아의 목을 돌려버렸다.


뼈를 부쉈다기엔 너무나 가벼운 오도독 소리와 함께 마지막 힘마저 잃은 몸은 바닥에 쓰러졌다.

아까운 장난감을 잃어버린 용사는 투덜대며 제 방으로 올라가 읽던 책을 다시 잡았다.

용사가 떠난 뒤, 숨을 죽이던 간수가 다가와 널부러진 시체를 무심하게 마댓자루에 처넣고 쓰레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소녀는 달조차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밤에 쓰레기 옮기는 마차에 실려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아리아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마왕을 물리친 용사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동화책을 끝맻는 이상적인 관용어구지만, 용사는 그런 삶을 현실로 만들었다.

소꿉친구와 결혼하고, 마왕의 보물을 팔아 대저택을 샀다.

좋은 부부관계 사이에서 아이도 많이 낳고, 자식들과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그 자식들이 장성해 손주들을 낳고, 가문은 번창하며 명예는 드높았다.

금화로 산을 쌓는 부와 영웅의 핏줄이라는 영예 아래에서 모두가 용사를 칭송했다.


그 이면에 있는 무고하게 멸절된 수많은 마족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끔찍한 고문과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은 두 소녀도 기억되지 못했다.

아무도 몰랐으니,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리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용사는 수명을 다했다.

왕국 전체가 슬픔에 잠겨 검은 깃발을 내걸었으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용사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투명한 관에 눕혀져 꽃으로 감싸인 용사의 시신은 평화로운 웃음을 지어,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화려한 마차에 관이 올려지고, 성대한 장례식 행렬이 대성당으로 향했다.

큰 대로를 지나는 동안 모두가 용사를 향해 경의를 표했으며, 온 나라의 고관대작과 용사의 가족이 참석한 장엄한 장례식이 끝나고 용사의 시신은 화려한 관에 감싸여 성당 깊은 곳의 카타콤에 놓였다.

카타콤의 문이 닫히고,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하늘로부터 한 줄기 빛이 내려오더니 용사의 관을 따스하게 감쌌다.

젊은 모습의 용사의 영혼이 천천히 일어나 눈을 뜨더니, 자신을 인도하러 온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빛을 따라 나아갔다.



생전 너무 큰 고통과 절망에 이승에 묶여 떠나지 못하는 망령이 되어 의식조차 잃지 못하고 용사의 행복한 일생과 온화하고 장엄한 최후까지 모든 것을 지켜본 아리아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여신님...저는요...저는요....?”

검게 썩은 영혼은 실체 없는 눈물을 흘렸다.





수백 년이 흘렀다.


여신은 신탁을 통해 새로운 마왕이 나타났다 알리고, 당대의 용사에게 성검을 내렸다.

그렇게 새로운 용사는 마계로 원정을 떠났지만 아무런 마물도 보지 못했다.


수백 년 전의 용사가 마왕을 처치한 이후로 어떤 마물도, 마족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무려 마왕이 새로 등장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조용했다.

여행길은 평화로웠지만, 그럼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용사 일행은 마왕성에 도착했다.


마왕성은 전대 용사가 떠난 이후 한 번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폐허였으며, 안에서는 생명은커녕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왕이 있어야 할 알현실은 텅 비어있었고, 천장에 뚫린 구멍에서 햇빛만이 들어와 부유하는 먼지를 비췄다.

하지만 신탁은 신탁.

마왕성 안에는 분명히 마왕이 있을 것이기에 용사파티는 돌바닥 틈새로 자라난 잡초를 즈려밟으며 폐허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마왕성에서 ‘새로운 마왕’을 찾아냈다.

어두운 마왕성의 지하. 아무리 봐도 감옥으로 쓰였을 공간 한구석에서는 공포에 떨며 웅크린 검은 안개같은 무언가가 보였다.


새로운 마왕.

그것은 억울함과 절망에 망령이 되어버린 아리아의 영혼에게 똑같이 억울하게 고통 속에 사라진 수많은 마족들의 갈 길 잃은 원한과 원망이 붙어 만들어진 선대 용사의 유산이었다.

이 ‘마왕’이라 불리는 원망 덩어리는 그저 자아조차 없이 대상 없는 무언가를 원망하고 두려움에 떨며 무기력감과 절망에 빠진 채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웅크려 숨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왕을 토벌하는 것은 용사의 사명이기에

용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에게 성검을 꽃아넣었다.


안식조차 허락되지 못한 원한은 그렇게 흩어져 영원히 사라졌고,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