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을 사고가 미처 따라가지 못한 시대.


팽창주의로 몸집을 불리던 신흥강국 제국과 역사 깊은 전통강호 왕국이 한 차례 맞붙게 된다.


계기는 사소했으나 수백년 묵은 감정도 터는 김에 어차피 손 좀 보려던 라이벌이었던 겸사겸사

국력을 총동원해 상대의 전력을 말살하겠다는 일념과 광기로 물든 전쟁이 터졌다.



노인들은 연단에서 애국심과 피, 영광과 명예를 부르짖었고,

젊은이들은 열렬한 호응과 함께 앞다투어 군에 투신했다.


열의와 광기, 끓는 피와 불타는 의지로 점철된 군대들이 대륙 전역에서 충돌했다.

그들 모두 각자 그동안 적을 꺾고자 갈고 닦은 신무기들로 무장했고, 고도로 훈련됐으며, 실제로 그럴 능력이 충분했다.



그러나 다만,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을 사고가 미처 따라가지 못한 시대.

그것이 온 세상을 휩쓴 거대하고도 지독한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떤 강을 사이로 오 만의 생명이 증발했다.

어떤 언덕을 두고 칠 만의 별이 졌다.

어떤 산을 넘어서 십 만이 숨을 잃었다.


하루 수 천이 숨을 잃었다.

하루 수 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하루 수십 만이 집결했다.

하루 수백 만이 행군했다.


끓는 피가 식었다.

넘치는 투지는 사라졌다.

광기의 빈 자리는 공포가 대신했다.

훈장과 영예 대신 내일의 해를 바랐다.


찰리는 몸의 절반이 없어졌다.

마르크는 빗물로 가득 찬 포탄 구덩이에서 나오지 못했다.

세 시간을 울부짖던 헨리의 목소리가 점차 들리지 않았다.

이성을 잃고 참호 바깥으로 뛰쳐나간 발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에 수 천이 숨을 잃었다.

하루에 수 만이 빛을 잃었다.

하루에 수십 만이 길을 잃었다.

하루에 수백 만이 신께 빌었다.







왕립 육군의 애송이 소위 리처드 역시 빛을 잃었고, 길을 잃었고, 신께 빌었다.


그는 도무지 말을 듣질 않는 다리를 움직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쏟아야만 했다.

무거운 진흙에 절여진 코트는 진즉 어딘가에 버렸다.


밤중에 장대비처럼 쏟아진 포격은 무시무시했고, 

혼돈에 빠진 왕국군의 참호에 제국군이 일제 돌격을 감행했다.


중대장이 고래고래 악을 지르며 대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더 커다란 함성이 일었고, 그마저 더 커다란 포성에 묻혔다.



그의 기억은 그 곳에서 끊겨 있었다.


그물에 끌려올라간 물고기처럼.

그렇게 갑작스럽고도 순식간에, 리처드의 눈이 떠졌을 뿐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땅과 전투의 흔적들.

'살아서' 움직이는 거라곤 오로지 자신 뿐이었다.

새 소리도, 바람마저도 없는 기분 나쁜 적막과 시체들만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리처드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감각이 없는 왼 발을 절며 어떻게든 그 곳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죽음이 강림한 땅에 산 자가 있을 곳이 없기라도 한 것 마냥 공포에 질려 어느 방향으로든 전장이었던 곳을 벗어나려 애썼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물에 끌려 올라간 물고기처럼.

좀 전 그가 눈을 떴을 때와 같이, 한 순간 급작스럽게.



그는 어느 숲 속 한 가운데에서, 진흙 투성이의 소총을 움켜쥔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길게 늘어진 나무들의 그림자만이 어느 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사지의 감각 따위 이미 없어진 지 오래.

징징 울려오는 느낌만이 그 곳에 고통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해 주었다.


몸도, 마음도 움직이는 법을 잊어버린 듯 했다.

리처드는 아무런 의지가 들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는 그나마 제일 가까운 나무를 찾아서, 간신히 밑동까지 기었다.

의지 자체를 거부하는 심신을 억지에 억지를 거듭해 움직이며 겨우 몸을 기댈 수 있었다.


리처드가 자리를 잡고 비로소 모든 것을 놓아버렸을 때엔 이미 해는 져버린 지 오래였다.

다리는 완전히 망가져버린 듯 했다.







다만 의식이 이상하게도 맑았다.


어쩌면 삶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일지도 몰랐다.

리처드는 문득 어두운 참호에서 누군가 피우던 담배가 생각났다.





혹은 어쩌면,


어쩌면 그의 귓가에 스치듯 들려온 잎새 소리 때문일런지도 몰랐다.


한새벽의 참호 속 벙커처럼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

샛노랗게 빛나는 두 눈 때문일런지도 몰랐다.






생물의 위대한 생존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감각 없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왔는데.'


그 지옥에서 어떻게 살아왔는데.


'고작 이렇게.'


이제 힘드니까 그만 놓아주자는 내면의 소리를 찍어 눌렀다.

고작 산짐승의 한 끼 밥으로 끝을 보기 싫었다.

풀려가는 시선으로 포식자의 눈을 거꾸로 좇았다.




'그것' 역시 리처드의 시선을 알아챈 듯 했다.


숲 멀리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다가오던 '그것'이 두 다리로 일어섰다.


눈높이로만 어림잡아 3m 는 되어 보였다.

어렸을 적 동물원에서 보았던 커다란 불곰도 저 만큼은 아니었을 텐데.




무너져가는 눈꺼풀과 의지를 다그치며,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진흙이 말라붙은 소총이 달그락거렸다.



그의 이름, 리처드 몬스워드.

자랑스러운 알튼버러 백작가의 일원이며


'그것'이 점점 다가온다.


앨런 몬스워드와 로라 몬스워드의 

사랑스러운 셋째 아들이었고


더 가까이, 신중하면서도 더 과감히.


란체스터 숲을 누비던 숙련된 사냥꾼이자

왕립 육군 제 3군 보빙턴 독립연대 제 3보병대대 A중대 1소대 장교로써


한 걸음, 또 한 걸음


반드시 한 방 먹여줘야만 직성이 풀릴 것이었다.




'와라..!'




총알은 재여있던가.


상관없었다.


진흙이 많이 묻었는데.


상관없었다.


이미 망가져있진 않을까.


상관없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이 억울했을 뿐이다.

그가 겪어온 생지옥의 끝이 무력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참혹한 전투 끝에 모든 것을 놓아버려서, 울지도 웃지도 않는 인형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의 동생과

예정된 죽음의 운명 앞에서도 살고자 온 몸을 버둥거리던 전우들의 마지막 모습 앞에서


그들을 이 잔혹무도한 길로 몰아넣은 세상의 앞에서


그런 세상을 만든 어떤 빌어처먹을 개자식들 앞에서


지금 이 순간 어디서도 그렇게 눈을 감고 있을 어떤 불쌍한 이들 앞에서



그저,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이윽고 '그것'이 다가와 그의 앞에 섰다.



사람이라기엔 너무나 커다랗고

짐승이라기엔 너무나 사람같았으며

여인이라기엔 너무나 야만적이고도

야수라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야말로 '그것'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샛노랗게 빛나는 오만한 눈동자와 날카로운 시선.

곧게 선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 갸름한 턱선.

하늘을 반 쯤 가릴 듯한 풍만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에 대비되는 넓은 골반.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리는 머리칼.

탄탄함의 수준을 넘어선 근육질의 몸.

늑대와 개의 그것처럼 쫑긋대는 귀와 이리저리 흔들리는 꼬리.



장담컨대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압도적인 야수이자 지배자였다.


가만히 그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는 것 만으로도 절로 복종심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리처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다하다 헛 것을 보다니.


자신이 이렇게나 뒤틀린 욕망을 갖고 있었음을, 삶의 끝에 다다라서야 알게 될 줄이야.


그러나 한 편으로는 또 유쾌한 최후가 아닌가.

솔직히 믿기 힘들 정도로  - 만일 사람으로써 받아들인다면 - 끝내주는 미인이었다.

그의 두뇌가 주인에게 화끈한 선물을 안겨주었으니 끝까지 즐기다 가는 것이 예의겠지.






그녀가 리처드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의 곳곳을 훑었다.

마치 미식가가, 포식자가 탐식을 앞에 두고 그 향을 먼저 음미하듯이.


굉장한 미녀가 사람의 코를 가지고 강아지마냥 찡긋이며 킁킁거리는 모습은 퍽이나 우스웠다.


그녀가 두 손으로 리처드의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그녀의 삶을 증명하듯 거칠고 굳은살 배긴 손바닥이었지만, 손길은 보드라웠다.


반쯤 감긴 리처드의 눈을 마주보던 야수 여인이 그를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그녀의 거대한 젖가슴은 오랜 기간 긴장감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사내를 완전히 탈력시키고야 말았다.


리처드의 눈꺼풀이 힘없이 감겼다.







야수 여인은 거추장스러운 소총과 철모를 리처드에게서 떼어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것은 이제 여인과 사내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었으므로.

그녀의 품에 안겨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한 사내의 얼굴은, 그제야 사내라기에는 조금 앳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공주는 이 연약한 신랑으로부터 피와 철과 죽음과 공포의 냄새를 맡았다.

이 대륙 전역에, '게이트' 너머에 급격히 흘러넘치는 그 냄새를.


최근 곳곳에서 '신랑'을 구했다며 혼례를 올리던 이들의 집에서 나던 그 냄새를.



이 젊은 신랑들이 도대체 어째서 피투성이가 되고 나서야 그들의 앞에 나타나는지.

그녀들의 배필을 감히 해하는 자가 누구인지.


앳된 남편을 보며 호선을 그리던 그녀의 눈이 차갑게 가늘어졌다.




알아봐야 할 것이 많았다.








며칠 뒤.


대륙 전역에서 쏟아져 나온 정체 불명의 아인들이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전선을 휩쓸어버리고는 

왕국과 제국을 포함해 모든 국가를 뒤엎고 인류가 대혼란에 빠진 가운데 '인족 보호령'을 선포했다.


감히 주제를 모르고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몬 국가 수뇌부들은 전부 '천국'형에 처해졌으며

젊은 미혼 남성과 상이군인들의 행방이 종종 묘연해지는 일이 급증했다.







원래 낙오된 정찰대가 통째로 마수족 아씨들에게 납치순애혼 당하는 거 쓰고 싶었는데..


누가 좀 더 써줘...



써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