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놓여 있던 커피잔을 들며, 지금까지 지난 내 과거들을 되돌아봤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쳐있었다.

 

 

대학생 시절 교수님이 낸 문제에서 복수정답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걸 교수님께 말했을 뿐인데.

 

 

교수님은 나를 따로 연구실로 부르시더니, 연구실에 들어간 나는 대학원생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부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많은 일들이 있었던 거 같은데...

 

 

끊긴 기억 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석사과정을 마친 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옆에서 교수님이 좀만 더하면 박사까지 할 수 있는데. 아깝지 않냐는 말씀을 하셨고...

 

 

정신을 차려보니 박사과정이 끝나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어느새 내 나이는 30살을 훌쩍 넘겨 버렸다.

 

 

이젠 진짜 끝난 거라고 생각했지만, 교수님은 아까운 내 실력을 썩히면 안 된다면서 박사후연구원을 자리를 마련해놨다고, ‘너만 오면 바로 고’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들고 있던 삼각 플라스크로 교수님 머리를 내려치고 학교를 탈출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도파민이었다. 너무 달콤했다.

 

 

교수 새끼를 의식불명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대학교를 나와서 이제 무엇을 하나 고민했지만, 박사 학위증 덕분에 적당한 기업에 연구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기업에서의 연구원 생활은 대학원 생활의 연장선처럼 느껴졌지만.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바로 금융치료가 되어서 연구원 생활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행복한 노예 생활을 즐기고 있었는데. 최근 부모님께 계속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 얀붕아! 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엄마 친구들은 다 손주 보는데 나만 이게 뭐야! ”

“ 너 만나는 여자는 있고? ”

“ 없지? 언제까지 그렇게 혼자 살라고 해! ”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엄마의 폭풍 잔소리였고.

 

 

“ 많은 돈 들여서 공부시켜놨으면, 이제 효도해야 할거 아니야! ”

“ 내가 참한 여자 알아 놨으니까, 가서 만나봐라. ”

 

 

그렇게 내 의사는 묻지도 않으시고, 엄마는 이미 맞선 자리를 만들어 놓으셨고.

 

 

그래서 지금 내가 여기에 앉아 있는 거다.

 

 

“ 그냥 뭐... 공부만 하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진짜 이 나이 먹을 때까지 공부만 했습니다.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네요. 연애도 한번을 안 해봤고, 축제나 동아리 같은 것도 안 해봤고, 진짜 없네요. ”

 

 

“ 그러시군요... 박사 학위에 연구원이라고 하셨죠? 그러면 그럴 만 하네요. ”

 

 

맞은편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여성분은 이제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저는 말이죠. 지금까지 일만 했어요. 돈 버는 게 너무 좋았거든요. 대학생 때는 장학금 벌라고 시험공부는 기본이고 온갖 공모전에 봉사활동에 취업 준비까지. 취직 후에는 야근수당 타 먹으려고 없던 일도 만들어서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

 

 

“ 그래도 되는 건가요...? ”

 

 

“ 물론 가라 수당이죠. 근데 안 걸렸으면 된 거 아닌가요. 저도 연애는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연애하면 돈 많이 든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안 했어요. ”

 

 

“ 정확히는 안한게 아니라 못하신 거 아닌가요? ”

 

 

“ 말을 그런 식으로 하시면, 저 정말 서운해요. ”

 

 

“ 하하! 죄송합니다. ”

 

 

맞선 상대는 나랑 의외로 죽이 잘 맞는 거 같았다.

 

 

“ 그런데요. 솔직히 그쪽도 부모님이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해서 나오신 거죠? ”

 

 

여성분이 한 말에 마시려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 뭐... 그렇죠. 솔직히 말하면 이런 자리 굉장히 불편해요. 서로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끼리 만나게 시키면 뭐가 달라지나요? ”

 

 

“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

 

 

“ 네 그렇죠. 만약에 저희 둘이 결혼한다고 칩시다. 사랑도 없이 한 결혼생활이 과연 행복할까요? ”

 

 

“ 동의해요. 오래 알고 지낸 친구랑 같이 룸메이트를 하는 것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방금 알게 된 사람이랑 평생을 같이 산다는 건 말도 안되긴 하죠. ”

 

 

“ 네 맞죠. 그러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요? 그때는 어떻게 하죠? ”

 

 

“ 이혼을 하면 되긴 하겠지만... 만약에 아이가 있다면... ”

 

 

“ 진짜 골치 아픈 거죠. 저희 둘은 그렇다고 치는데 아이는 어떻게 해요. 불안정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만 진짜 불쌍하게 되는 거죠. ”

 

 

“ 애 키우는 데에는 돈도 진짜 많이 들 텐데... ”

 

 

슬슬 분위기가 아무 이야기나 막 하는 자리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는 게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라서 그런가. 

문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저희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괜찮은 생각이 난 거 같아요. ”

 

 

“ 뭔데요? ”

 

 

“ 어차피 지금 이 자리를 파한다고 해도 계속 선 자리가 들어올 텐데요. 그냥 저희 결혼해 버릴까요? ”

 

 

“ 어떤 의도로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거죠? ”

 

 

“ 어차피 서로 아무 감정도 없는데, 그냥 같이 사는 척만 하고. 집안에서는 각방 쓰면서 서로 터치 안 하면서 사는 건 어때요? ”

 

 

“ 부모님이 손주 보고 싶다고 계속 재촉하면요? ”

 

 

“ 그거는 저희 둘 다 불임이라고 구라칩시다. ”

 

 

“ 그런 얄팍한 수가 과연 먹힐까요? ”

 

 

“ 부모님들은 저희가 지금까지 연애를 안 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실까요? ”

 

 

“ 어... ”

 

 

“ 그렇게 살다가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깔끔하게 이혼하기. 어때요? ”

 

 

“ 나쁘지 않은 플랜이긴 한 거 같은데요. 결혼 이야기는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거 같아요... 근데 저 좀 급해서 그런데 화장실 좀 갔다 와도 될까요? ”

 

 

“ 네 갔다 오세요. ”

 

 

여성분은 갔다 오라는 말이 떨어지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많이 급하셨나 보네.

 

 

그나저나 저분 무슨 회사에 다니신다고 했더라? 외국계 기업이라 처음 듣는 회사였는데.

 

 

여성분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핸드폰을 꺼내 기업명을 검색해봤다.

 

 

프 뭐시기 그룹이였는데...

 

 

프르코스 그룹... 이건 아니고. 프러포즈 그룹? 이것도 아닌데. 프리코네 그룹? 여기는 애니 만드는 회사인가? 이것도 아니고. 프르노티 그룹? 아 시발 왜 야동이 나와.

 

 

갑작스럽게 핸드폰 화면에서 야동이 나오자 황급하게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손가락이 뚱뚱한 탓에 X를 제대로 누르지 못했고, 밑에 있던 광고를 눌러 버리고 말았다.

 

 

“ 10년 뒤에 당신의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핸드폰 화면에 지문인식만 해보세요! 바로 알려드립니다! ”

 

 

10년 뒤의 모습을 알려주겠다는 허접한 디자인의 이상한 광고가 핸드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딴걸 누가 믿는다고. 하지만 10년 뒤의 미래라... 흥미를 돋구는 문구였다.

 

 

화면에 손가락을 올렸다. 설마 이거 했다가 돈 결제 되는 건 아니겠지?

 

 

핸드폰 화면에 손가락을 대자. 곧바로 영상 하나가 재생이 되었다. SFM으로 만든 듯한 조잡한 퀄티리의 3D 영상이였다. 이런 퀄리티로 3D 야동을 만든다면 아마 아무도 안 볼 듯싶었다.

 

영상 속에서는 어떤 남성 한명이 나왔는데.

 

 

“ 하이고~ 힘들어라. 오늘도 늦게 퇴근했네. 근데 집에 와도 별로 기쁘지가 않네. 오늘은 좀 쉬고 싶은데... ”

 

 

영상속 남성은 한숨을 푹 쉬더니, 현관문으로 보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아빠 왔다~!!!! ”

“ 아빠 오셨어요!!! ”

“ 아버지!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

“ 빠! 빠! 빠! ”

“ 오늘은 빨리 오셨네요! ”

 

 

남성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5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남성을 반겨주었다. 자식들인가? 히야 이 남자 꽤 힘들겠네.

 

 

“ 아이고 우리 얀진이, 얀돌이, 얀석이, 얀희, 얀중이 오늘은 별일 없었니? ”

 

 

“ 오늘 제가 학교에서 말이에요! ”

“ 학교 급식으로 고등어가 나왔는데요. ”

“ 미술학원에서 아버지를 그렸어요! ”

“ 뜌땨땨! 땨! 땨! ”

“ 피아노 학원에서 새로운 곡을 배웠어요! ”

 

 

“ 애들아, 미안한데 한 명씩 말해줄 수 있니? ”

 

 

남성은 집단린치를 당하듯이 5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이더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육아 난이도가 정말 장난 아니네.

 

 

“ 애들아! 아빠 그만 괴롭히고 자러 가라! 잘 시간이야! ”

 

 

“ 싫어요! ”

“ 힝 자기 싫은데. ”

“ 그리던 그림마저 다 그리고 자면 안 돼요? ”

“ 뜌따이 우땨야! ”

“ 오늘 10시에 티비에서 프리코네 극장판을 해준데요! ”

 

 

“ 말로만 할 때 들으면 얼마나 편할까... 애들아 아직도 내 성격을 모르니? ”

 

 

아내인 것처럼 보이는 여성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효자손을 주우려고 하자.

 

 

“ 아 졸려! 자야겠다! ”

“ 잘 자요! 엄마 아빠! ”

“ 코오~ 쿨쿨 쿨 ”

“ 극장판은 다시 보기로 보지 뭐! ”

“ 사실 저는 그림 그리는 게 싫어요! 저는 피아노가 치고 싶다고요! ”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 고마워 여보. ”

 

 

“ 별말씀을. 근데 오늘도 늦게 들어왔네? ”

 

 

“ 요즘 일이 바빠서. 애들은 별일 없지? ”

 

 

“ 맨날 똑같지 뭐. 근데 여보 이제 일 그만두면 안돼? ”

 

 

“ 왜애? 우리 서로 일 관련해서는 터치 안 하기로 했잖아. ”

 

 

“ 어차피 돈도 내가 더 많이 벌고,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굳이 당신이 일을 해야 하나 싶어서. ”

 

 

“ 지금 하는 일이 나름 만족스러워서 그건 안될 거 같고. 나 피곤해서 그런데, 이만 내 방에 들어가서 잘게. ”

 

 

“ 어... 당신 방 말이야. 오늘 없애버렸어. 애들 줄라고. ”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난 이제 어디서 자라고? ”

 

 

“ 나랑 같이 자면 되지. ”

 

 

“ 우리 결혼할 때 했었던 약속을 잊은 건 아니지? ”

 

 

“ 잊은 건 아니긴 한데... ”

 

 

“ 근데 말이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혼하기로 한 거. 그거 아직 유효한 거지? ”

 

 

남성의 말을 들은 여성은 격분하기 시작했다.

 

 

“ 그 말은 갑자기 왜? 설마 따른 여자 생긴 거야? 아니지? 왜? 이혼하려고? 애들은 어떻게 하려고? 아니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하라고? ”

 

 

“ 아니... 그냥 말해본 거야... 왜 이렇게 과민 반응해? ”

 

 

“ 너 솔직히 말해봐. 한번 찔러본 거지?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같은 회사야? 하아. 이래서 내가 회사 그만두라고 한 건데. 안 되겠어. 불안해서 더는 안되겠어. 내일 같이 사직서 내러 가자. ”

 

 

“ 왜 이래! 너가 무슨 권한으로! 결혼식 때 약속을 잊은 거야? ”

 

 

“ 야. 혼인신고서에 도장 찍었을 때부터 너는 이미 내 소유가 된 거라고. 내가 주인인데 왜 나한테 권한이 없어? ”

 

 

여성은 남성을 밀쳐냈다. 이내 남성은 쓰러졌고.

 

 

“ 또 왜 이러는 거야... 이러지 마... ”

 

 

여성은 움직임을 막으려는 듯이 쓰러진 남성 위에 올라탔다.

 

 

“ 있잖아. 나 오늘 육아휴직 냈어. ”

 

 

“ 응? 이제 애들 어느 정도 다 자랐잖아? ”

 

 

“ 지금 새로 만들라고. ”

 

 

“ 어? 어?? ”

 

 

“ 당신 방은 우리 여섯째한테 주자? 아빠면 자식한테 양보 할 수 있지? ”

 

 

“ 아니 잠깐만. 안돼... 제발 그만해에... ”

 

 

영상은 끝이 났다. 

 

 

와 이 남자 진짜 불쌍하네. 이제 애가 6명이고 평생을 아내한테 꽉 붙잡혀서 살겠네.

 

 

그때 끝난 줄 알았던 영상에서 문구 하나가 떴다.

 

“ 이 영상은 이얀붕씨의 10년 뒤의 모습을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한 영상입니다. ”

 

 

어라. 이게 무슨

 

 

이게 내 이야기라고? 에이 이런 걸 누가 믿는다고...

 

 

.....

 

 

“ 아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

 

 

화장실에 갔었던 맞선 상대분이 자리로 돌아왔다. 

 

 

“ 아까 말씀하신 거 말인데요. 화장실에서 볼일 보면서 생각해봤는데. 괜찮은 거 같아요. 그렇게 진행 할까요? ”

 

 

“ 아니요! 아닌 거 같아요! 그래도 결혼은 아니죠! ”

 

 

“ 네? 갑자기 왜 말을 바꾸시나요? ”

 

 

“ 아니에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저는 그만 가볼게요! ”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가려고 했는데.

 

 

“ 잠시만요! ”

 

 

맞선 상대분이 가게에서 나가려는 나의 옷깃을 붙잡았다.

 

 

“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요? 저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남자한테 이런 대우를 받는 게 처음이라서요... 사실 남자가 처음이기도 하죠... ”

 

 

맞선 상대분은 눈에서 물방울 같은 것이 떨어질라 했고.

 

가게 안에 있던 종업원과 다른 손님들은 일제히 소란을 피우는 우리를 쳐다보았다.

 

 

“ 수군수군... 뭔진 몰라도 남자가 나빴네... ”

“ 와 저 찢어 죽일 놈을 봤나... ”

“ 여자가 눈물 흘린 거 보니까 일단 남자 잘못인거 같은데? 여자의 눈물이 그 증거지 뭐. ”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진 가게 분위기 속에서 일단 여성분을 진정시키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 그런 게 아니라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바로 결혼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저희 오늘 처음 만났잖아요? ”

 

 

“ 그럼 지금부터 서로 알아가 보는건 어때요? ”

“ 저는 말이죠. 커피에다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넣어 먹는 걸 좋아해요. 거기다가 각설탕 2조각까지 넣으면 끝장나죠. 그쪽은요? ”

 

 

“ 달게 드시는 걸 좋아하시는군요... ”

 

 

적당한 구실로 이분을 떨쳐내야 하는데... 근데 이 상황 어디서 많이 본 거 같다. 데자뷔라고 해야 하나? 대학생 시절 교수 새끼한테 붙잡혀서 대학원생이 되어버린 그때 그 모습이 지금의 모습이랑 겹쳐져 보이기 시작했다.

 

 

“ 저는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