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언젠가부터, 나는 도태되어 가고 있었다.


노력이 모자랐던 것은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것 또한 아니다.


단지 내가 한걸음을 겨우 내딛을 때 너희들은 뜀박질하여 저만치 멀어져 있었을 뿐 이었다.


슬펐다.


내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한다는게.


쓰라렸다.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 너희와의 격차를 실감할 때마다.


...아팠다.


너희가 나를 매도하고 무시할 때마다.


나와 함께했던 과거를 부정하고 짓밟을 때마다.

 

함께였던 행복한 시절이 너희에겐 빛바랜 기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게 아팠다.


그래서,결심했다.


너희들처럼 달릴 수 없다면 적어도 넘어지지는 않겠다고.


너희들이 얼마나 멀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느리더라도 너희의 뒤를 쫓겠다고.


그런다면 너희가 지나간 길에 발자국이나마 함께할 수 있을테니.


*

그로부터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때로는 휘청이고 때로는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끝까지 넘어지지 않고 걸어나갔다.


그러길 얼마였나, 언젠가부터 디디고 선 길 위에는 너희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부르던 호칭또한 바뀌었다.


둔재,우인,가문의 치욕 등의 멸칭은 어느새 선구자,길잡이,인도자 등의 이명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너희는 내게로 돌아왔다.


"...오랜만이야.카일.그나저나-"


"카,카일.나 지금까지 너를 오해해서-"


머리가 아팠다.


떠나갈 때는 언제고 지금에서야 다시 돌아오는건가?


그리고,너희는 내게 무엇을 사과하려 하는가?


오해? 수치? 비난? 폭력?


그저 필요했으니 행했던 일들이 어찌 사과를 받을만한 일이 되는가?


무지로 벌였던 일들에 너희는 어째서 사죄를 청하는가?


모르겠다.


끊임없는 의문이 머리속을 헝클였다.


복잡하다.


그저 걸어나가기만 하면 되는,한없이 단순한 길과 달리 너희와 얽힌 모든 일들이 내게는 참을 수 없이 복잡했다.


그 혼란 속에서, 끝내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터벅


다시금 한 발을 내딛는다.


아직 내가 모자라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이라면, 더더욱 나아가면 될 일 아닌가.


나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이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곳에 도달할 때까지.


*

"...카일이,떠났다고?"


"예.사용인들이 한사코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한다.'  한마디만 남기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랬,던가."


결국 내 어리석은 행동이, 너를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 모르는 광인으로 만들었구나.


..아니, 아직 늦지 않았다.


예전처럼 돌아가는것은 과욕이라 한더라도, 속죄의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당장 기사들을 풀어서 카일을 찾아와.다치게 하지 말고."


"...공녀님.아무리 가문의 힘을 전부 동원하더라도 그 '불굴' 을 생포하는건 무리가-"


"쓸 수 있는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데려와."


"...."


"반드시."


"...명을 받듭니다."



용서를 바라진 않는다.


그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으니.


그 아이가 다시 가문의 울타리로 돌아오길 바라진 않는다.


내가 직접 그 아이를 내몰았으니.


그저, 내가 저지른 죄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기를.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