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남자 인간 x 여자소인 임.

클래식한 맛으로 병약 남캐 x 활달 여캐 교감 순애물 써보고 싶었음.

글재주도 별로 없어서 노잼일 확률 겁나 높음.


어디 채널로 올려야되나 여기가 맞나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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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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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알코올 냄새와 소독기 돌아가는 소리와 기력을 잃어가는 냄새가 어우러진 이곳은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지. 사람들은 작은 희망을 걸고 병원에서 지내. 건강을 되찾는게 가장 중요하니까. 반면에 죽음만을 기다리기도 하는 곳이고.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환자만을 생각하는 간호사의 발걸음은 어느 입원실 앞에서 멈추었어. 문은 열려있었고 짐은 모두 정리한 채로 깨끗했지. 그리고 그의 뒷모습이 보였어. 그는 겉보기엔 멀쩡한 젊은 사내였어.


"오늘 퇴원이시네요."


그 말에 그는 뒤를 돌아봤어. 그동안 병원에 입원하면서 자신을 돌봐준 간호사님이 말한 것이었으니까. 반가움은 곧 아쉬움과 슬픔으로 덮힌 눈빛으로 변해갔지만 그는 무덤덤한 척을 해야했어. 그녀를 마지막까지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으니 말이야.


"쾌차해서 퇴원 하는게 아니여서 좋은건 아니긴 하지만요."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가방을 어깨에 매고 캐리어 손잡이를 손에 쥔 채 떠날 채비를 마쳤어. 사실 다른 짐은 이미 모두 요양을 보낼 시골 저택에 옮겨놓은 상태였지.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의 말에 "그곳에서도 편하게 지내세요."라고 간호사는 안부를 마지막으로 그의 뒷모습을 쓸쓸히 지켜봤어. 그는 병원에서 오랫동안 지내왔거든. 30대라는 젊은 나이에 큰 키, 건장한 체격, 겉으로 보기엔 건강해보였지만 일하면서 그는 자신의 몸 속에 있던 병을 인지하지 못했고 결국 치료의 시기를 놓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어. 병원에서 온갖 치료를 해봤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겨놓은 외딴 시골집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기로 한거야. 작은 가방을 메고 캐리어를 끌며 스산한 저녘에 도시 속 불빛과 사람들로 넘실 거리는 곳에서 겨울 바람이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갈 때즈음 그는 마음 속에 외면하고 있던 꽤나 깊고 깊은 우울감에 빠져버렸어.


자신만 불행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외톨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감정을 마구 휘두르고 싶진 않다는 마음이 더 컸을 정도로 그는 상냥한 사람이었어. 문득 목덜미 아래가 진갈색 머리카락에 덮였다는 걸 알은 그는 조금 길게 자란 머리끝을 매만지며 그냥 자르지말고 묶을까, 라고 시시콜콜한 생각하며 앞으로 지낼 집으로 향했지. 


이미 그곳에 누군가가 몰래 숨어 살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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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살고 있던건 작고 귀여운 소녀였어. 은처럼 반짝이는 긴 회색머리에 손수 만든 털점퍼를 입고 종횡무진 필요한 물건이나 먹을 것을 가지러 다녔지. 아 물론 작다는 건, 정말 작다는 말이었어. 보통 인간의 체격은 160-170cm 내외인데 소녀의 키는 고작 10cm였거든. 작은 몸으로 헤쳐나가기엔 이 세상이 너무나도 거대했지만 소녀가 슬퍼할 틈도 없이 살아가는데 바빴지. 소녀에게 가족인 부모님이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모두 의미 모를 병으로 죽었고 그렇게 몇 개월간 홀로 이 집 아래를 은신처로 삼아 살아남아야 했어. 물론 저택엔 어느 인간도 살고 있지 않았기에 풀이나 열매, 물고기, 쥐, 벌레고기 등을 먹어야했지만. 혼자 살아나가기엔 너무나 연약해보이겠지만 그건 인간의 시점이었고 소녀의 몸은 생각 이상으로 강인했어. 가뿐히 풀숲을 뛰어다니고 바위도 맨몸으로 잘 올라가고, 쥐의 급소를 한번에 창으로 찔러넣을 줄도 알았으니까.


의외로 소녀를 괴롭히는건 외로움이었어. 살아가는데 슬퍼할 겨를이 없었지만 잠을 청할 때는 늘 악몽을 꿨거든. 네발달린 짐승이 되어 울부짖으며 평생을 혼자 떠도는 꿈이었어. 가족들이 죽고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말없이 생존에만 몸을 움직이고 생각하는건 한 사람으로써 너무 비참한 인생이거든. 간신히 악몽에서 깬 소녀는 식은땀을 닦으며 문득 '거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해졌어. 한번도 거인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예전에 부모님은 거인을 본적이 있으셨고 몇 가지 들은 기억나는 이야기라면 그 존재들은 굉장히 컸고, 훨씬 발전 된 도구를 쓴다는 거야. 배고픔이나 추위에 대한 걱정도 없고. 한마디로 같은 생각을 하고 지성이 있고, 크기만 다를 뿐이지 모두 같다는 것이지. 물론 말도 통할 거고 말이야.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기꺼히 보여준다니 아무리 인간을 못만난 어리고 호기심 많은 소녀라지만 그건 어리석고 멍청한 생각이라 바로 판단했지. 거인이 자신을 보고 무조건 호의적이진 않을테니까. 그리고 한번 잡힌다면 두번다시 바닥에 발을 딛을 수도 없을테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테니까. 두려운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외로움에 미쳐버릴 것 같았기에 조금은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막연한 소원이 있었어. 그 소원이 곧 이뤄진다는 사실은 소녀는 전혀 알 수 없었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고 눈을 뜨면 평온하게 해가 뜬 아침이 되길 바랬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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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눈뜨게 한건 겨울의 차가운 한기도, 햇빛도 아니었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엄청난 굉음이었지. 소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고 은신처 천장의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며 방 안의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느꼈어. 그 말은 즉슨, 외부의 엄청난 힘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었지. 그녀는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부리나케 간단한 나무창과 밧줄, 그리고 항상 입고 있는 겉옷을 급하게 걸치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은신처를 빠져나왔어. 다행히 무너지진 않았지만 이런 재난을 만든 존재가 무엇인지 꼭 확인해야겠지. 당황스러움은 곧 억울함과 분노로 바뀌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은신처 바로 위가 거인들이 살던 집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비록 빈집이었지만 튼튼하고, 거대한 날짐승은 얼씬도 하지 않아 안전했지. 그런데 누군가 왔다는 것을 너무나 요란하게 말해주고 있었어. 머리 속에서는 제발 거인이 아니길 빌었지만 사실은 거인이 불편한 방문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소녀는 몰래 그 거인의 모습을 지켜봤어. 말 그대로 엄청나게 컸고,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까마득했지. 


'진짜 크다....'


그를 처음 본 소녀의 감정은 경멸과 두려움보다는 경외심이 더 컸어. 가슴이 두근두근 요동치는걸 한 손으로 꾹 누른 채 소녀는 몰래 숨어 그가 무엇을 하는지 전부 지켜봤어. 그에게 있어 단순히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었지만 소녀에겐 엄청난 규모의 환경이 순식간에 바뀌어졌으니까. 소녀라면 절대, 평생 해낼 수 없는 것이겠지. 그렇기에 소녀는 그가 두려웠고, 한편으론 대단해보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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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삶은 그가 오고나서 생각보다 훨씬 윤택해졌어. 그가 쓰는 물건이나 먹을 것을 조금씩 몰래 가져온다는 것은 이제 먼지 잔뜩 뒤집어쓴 더러운 천이 아닌 깨끗한 물에 빤 천으로, 역한 냄새가 나는 썩은 고기가 아닌 맛있고 영양 넘치는 한끼로 바뀌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느껴지는 무력감은 지울 수가 없었어.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고 느꼈거든. 사실 소녀는 그가 없기 전에도 스스로 헤쳐나가며 살아갔는데 말이야. 그 마음은 점점 소녀를 갉아먹어갔어. 사람은 서로 함께해야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와 절대로 만나서는 안되는 관계니 괴로워지는건 그의 존재만을 알고있는 소녀 뿐인거야. 종종 소녀는 상상했어. 만약 저 거인이 정말로 착하고 자신의 삶에 관여 안할 정도로 이상적이라면 대화를 해보는 상상 같은 거 말이야. 그런 상상은 몸과 마음이 지친 소녀를 잠시나마 위로해주었지. 소녀는 은신처에 기대 꾸벅꾸벅 졸며 다음엔 무얼 가져와야 할지 머리 속에 정리하며 잠에 빠져들었어.


한편 그녀가 살고 있는 은신처 바로 위, 이 집주인은 요 며칠 생긴 기묘한 현상에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고 있었지. 큰건 아니었지만 작은 소모품이나 소량의 음식들이 사라져있었어. 몸이 아파 괜히 예민해졌나 싶었지만 확인해보니 정말로 사라져있어 조금 당황스러웠어. 사실 얼만큼 가져가던지 상관없었지만 그는 가져가는 존재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궁금했어. 그도 그 나름대로 엉뚱한 상상이라 생각했겠지만 물건들을 가져가는 존재가 아주 작은 사람이라 생각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철저히, 정밀하게, 조금씩 가져가는건 불가능했으니까. 다만 자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알고있는 그는 남은 시간 동안 그 존재를 최대한 도와주다 가고 싶었어. 그럼 조금은 뜻깊은 삶을 살다 간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 삼고 싶었거든. 정말 그 작은 존재가 있는지도, 자신을 지금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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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 남자와 몰래 숨어 살고 있던 소녀가 서로 만나게 된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어. 다만 서로가 만나고 싶어서 만난게 아닌 깊은 새벽, 그녀가 여느때처럼 식탁에서 그가 만든 음식을 자신의 작은 가방에 옮겨담고 있을 때였지. 그가 그녀를 의식 안한 척 최대한 노력한 덕분이었을거야. 그녀는 그의 눈치를 한창 모르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거든. 한밤 중 작은 인기척을 느낀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과 살고 있던 작은 동거인을 처음 보게 되었어. 멀리서,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건 정말로 아주 작은 사람이었지. 그는 처음 보는 존재에 눈을 떼지 못했어. 너무 오래 지켜봐서일까, 평소 감각이 예민했던 소녀는 어디선가 자기를 보는 시선을 느끼고 서둘러 식탁에서 내려오려했어. 급하게 갈고리를 걸고 밧줄을 내려 조금씩 내려가는 순간, 낡은 밧줄이 끊어져버렸고 소녀는 그대로 딱딱한 바닥으로 곤두박칠 쳐버렸지. 소녀는 떨어지던 찰나에 성급한 판단을 후회했어. 떨어져 바닥에 부딪힌다면 즉사거나 뼈 몇개가 부러져 고통에 신음하다 서서히 죽을거란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지. 소녀는 그럴바엔 차라리 전자가 낫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돌아가신 부모님도 볼 수 있었을테니까. 


"...."

"...."

"하아..."


질끈 눈을 감은 소녀는 전혀 몸이 아프지도 않았음에 눈을 서서히 떴어. 몸 아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 이건 거대한 사람의 손이라는 걸 바로 깨달았지. 그 손의 주인이 이 집주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소녀가 떨어질려는 찰나 그가 엄청난 속도로 뛰어와 몸을 날려 그녀를 받아준거였어. 우당탕 꼴사납게 넘어져 무릎이랑 팔꿈치가 좀 깨진 느낌이었지만 그는 그런건 개의치 않았어. 그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작은 소녀를 손에 쥐었다가 그들 사이에 1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까, 서로는 시간이 멈춘듯 했지만 그는 아차 싶어 바닥에 살포시 내려주었어. 그녀의 온기와 따스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손에 닿았을 때, 그는 순간 자신이 너무 세게 쥐어버린건 아닐까 두려움에 휩싸였거든. 다행히 소녀는 다친 곳이 없는지 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은신처로 뛰어갔어. 불꺼진 어두운 밤에 달빛만이 비쳐도 밤눈에 익숙해진 그의 눈엔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어. 빛나는 은색 머리칼에 귀엽고 아름다운 그녀를 말이야. 요정이 정말로 있다면 그런 모습일 거라고 그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넋놓고 그 방향만 바라보았어. 마치 꿈 같았지만 꿈이 절대 아니었지. 어쩌면, 남들이 들으면 웃기다고 놀려댈 이야기겠지만 그녀에게 이미 첫눈에 반해버렸거든.


"저기...!"


그는 자기도 모르게 도망치는 소녀를 불렀어. 앗차 싶어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지. 다행히 소녀는 그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췄어. 이야기정도는 들어줄려는 듯한 모습이었어. 물론, 듣기만 하는 거겠지만.


"혹시 괜찮다면... 다음에... 또 찾아 와줬으면 좋겠어."


어느정도 예상했지만, 소녀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어. 그녀는 애초에 존재 하지 않은 것 처럼 인적 하나 남지 않았지. 하지만 그는 이 모든게 꿈인건가, 라고 착각할 정도로 정신이 멍한 사람은 아니었어. 오히려 점점 더 선명해져갔지. 그리고 소녀가 그리워졌어. 한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죽기전에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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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록, 콜록, 하아..."


이른 아침, 폐부를 찌르는 찬바람에 그는 발작하듯 눈을 떴어. 한동안 조금 잠잠해져있던 아픈 몸이 다시, 여느때처럼 괴롭다며 사방에 신호를 울리고 있었던 거지. 신기할 정도로 꽤나 잠잠했던건 작은 소녀에게 관심이 쏠려있던 것이었으니까. 그녀가 사라진 이후,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처방 받았던 약을 물도 마시지 않고 털어넣었어. 거의 다 진통제와 위장약이 전부였고 치료는 이제 의미가 없었으니까. 고통으로부터 잠시 한숨을 돌린 그는 살짝 열려있던 창문을 닫으려 창문으로 다가갔어. 당연하게도 찬바람은 이곳에서 새어 들어오고 있었지. 창문을 닫으며, 소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심 걱정이 들었어.


'이렇게 추운데 그런 작은 몸으로...'


한동안 그녀는 음식도, 물건도 가져가지 않아 그는 내심 그녀를 몹시 걱정했어. 그 날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는게 보였으니까. 한편으로는 괜히 그때 간섭한 자신이 싫어졌고, 아예 모른 척을 할까 싶었어. 하지만 그도 소녀 그 이상으로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으니 시계를 돌려도 그가 그녀를 손안에 안았을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거야. 그녀를 계속 보고 싶고 그녀에 대해 더욱 더 알아가고 싶었어. 용기내어 말도 걸고 맛있는 식사도 대접해주고 싶었지. 여러 생각들이 어지러히 그의 머리를 맴돌던 그때, 창문 너머 그의 시선은 무언가에 꽂혔어. 짧고 마른 풀들이 정리 되지 않은 마당에 작은 생명체가 쓰러져있었어. 짐승은 절대 아닌 익숙한 실루엣, 그는 그것을 처음 보는게 아니었지.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겉옷도 챙겨입지 않고 부리나케 집문을 열고 뛰쳐나갔어. 그가 본건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바로 그 작은 소녀였으니까. 


"...!"


쓰러진 그녀를 보자마자 그는 망설임 하나 없이 그녀를 안아올려 상태를 살폈어. 그리고 찬바람에 얼은 그녀를 만지자마자 불안한 습기가 그의 손가락을 적셨지. 불길하고 끈적한 검붉은색을 보자마자 그는 그녀를 안고 집안으로 뛰쳐들어갔어. 그녀의 오른쪽 다리는 짐승에게 물어뜯겼는지 살점이 조금 뜯겨져 나가 있었어. 다행히 뼈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추운 날씨에 피는 멈추지 않고 있었기에 당장에 응급처치가 없다면 아무리 강인한 소녀라도 오늘을 넘기긴 힘들어보였거든. 그는 힘겨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울음을 터트릴 뻔한걸 간신히 참아야했어. 쓸데없이 눈물을 흘릴 새도 없이 그녀에게 허락 된 시간은 일분일초 짧아져가고 있었으니까. 그는 마음을 추스리고 좌식 테이블 위에 수건을 깐 뒤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놓았어. 의료 쪽으로 전문인건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주고 싶었으니 한동안 병원 생활을 하며 어깨너머로 본 것이 있었기에 깨끗한 물로 상처를 씻기고, 소독약과 면봉 끝에 조심스레 연고를 발라주고, 작게 자른 붕대를 감아주었어. 상처를 건드리는게 아픈지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종종 신음소리를 냈지만 많이 힘겨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 그는 마음 속으로 기도했어. 그녀가 건강을 회복했으면 하니까. 이렇게 절실히 기도한 적은 처음이었어. 그는 자신의 얼마남지 않은 생명을 통보 받았을 때도 이렇게 절실하진 않았는데 말이야. 스스로도 알고 있었어. 이미 그녀를 꽤 좋아하고 있었고, 그녀가 아픈 모습이 혼자 병실에 갇혀 외로워하는 모습과 겹쳐보였지. 


누군가 곁에 없이 혼자 아픈건 정말 서글픈 일이란 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거든.


-


소녀는 처음 보는 공간에 서있었어. 긴 복도가 쭉 늘어져 양 옆으로는 방들이 일정하게 들어차있었어. 그것을 보통 사람들은 '병원'이라 불렀지만 소녀는 인간들의 사회를 몰랐기에 병원, 입원실이란 걸 몰랐지.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어. 이곳은 아픈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란걸. 맨발이었던 그녀는 차가운 바닥을 딛으며 입원실 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나 들여다봤지. 가만히 누워서 꼼짝 못하는 사람, 간신히 숨만 쉬는 사람, 나아지지 않는 고통에 신음 하는 사람, 이상한 투명한 뚜껑 같은걸 덮고 있는 사람... 소녀는 그들에게서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어. 죽음의 냄새가 온통 진동을 했지. 그녀는 도망치듯 그 병실들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어. 죽음과 병자들 사이에서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거든. 어느날, 갑작스럽게 잠을 자듯 가버린 사랑하는 사람들 말이야. 그러다 어느새 복도 맨 끝, 작은 병실 앞에 다다랐어. 다른 병실과 다르게 문은 닫혀있었지. 소녀는 이곳에 들어가야 이 꿈에서 깰 수 있다는 걸 느꼈어. 


이상하게도, 병실 문을 여는 것이 두렵지 않았어. 누군가가, 그것도 아는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느낌을 받아서였지. 그렇게 조심스레 병실 문을 열자, 봄처럼 따뜻하고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간질였어. 침대엔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가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지.. 소녀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 


자신을 손 안에 쥐었다가 바로 놓아준 거인 남자였어. 


하지만 꿈 속이어서인지 둘의 크기 차이는 현실처럼 크게 차이나진 않았어. 서로는 평범한 인간과 인간의 크기였는데도 소녀는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 현실에서는 괴물같았던 그가 이곳에선 무척이나 평범해보였거든. 소녀가 낸 인기척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어. 이 상황이 당황한 소녀와는 반대로 그는 평온하고, 그녀의 얼굴을 보자 밝아졌지. 


"...."

"날 찾아와 준거야?"

"너는..."

"....정말 고마워."


남자가 웃으며 이쪽에 와서 앉으라며 침대 옆에 놓여진 의자를 톡톡 손으로 두드렸어.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쭈볏거리며 옆에 앉았지. 가까히보니 남자는 앉아있는 것도 힘겨울 정도로 많이 지쳐보였어. 기력이 다해 아파보인다는 말이 더 옳았지. 그럼에도 누워있지 않고 앉아서 소녀를 기다리고 있었던거야. 소녀는 그럼에도 아직 경계를 놓지 않고 의자에 앉으며 퉁명스레 대답했지.


"이건 내 꿈이야. 그러니까 기억도 안나겠지."

"그래도 너를 만나서 기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거야."


빙긋 웃는 그의 말에 소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 이런 꿈, 이런 말은 꾸지도,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거든. 살아가는데 아무런 쓸모도 없다 생각했어. 분명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살지 않은 시간이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버린건지 스스로가 괴로웠지. 그건 아마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져버렸을 때 부터 였을거야. 앞으로 새로운 인연 같은건 만들지 않을거라고. 그러면 더 이상 슬퍼할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닫자 소녀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 분명 이런 걸 원하지는 않았었으니까. 그녀가 울자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그럼에도 계속 눈물을 흘리자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었어. 그러자 소녀는 남자의 품에서 펑펑 울었지. 왜 그리 모르는 사람 품에서 서러워 모든걸 토해내듯 우는 건지 소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 


"많이 애썼구나..."

"왜... 깨질 않는거야. 대체... 잘... 모르겠어."

"이건 너의 꿈이기도 하지만 내 꿈이기도 해서 그런가봐."

"이곳에 있는게 괴롭지 않아?"

"괴롭긴."


왜? 라는 말을, 소녀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물어볼 수 없었어. 아니, 물어볼 의미조차 없을 정도로 그는 행복해보였거든. 네가 이곳에 나를 찾아와주어서, 라고 말이야. 소녀는 처음엔 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허망한 꿈이라 생각했어. 조금의 희망적인 꿈을 꾸어도 결국엔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믿고 싶었어. 이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바랬거든. 


"괜찮다면 또 찾아와 줄래?"

"그냥 함께 이곳을 나가자. 밖이 이렇게 따뜻하고 바람이 좋은데..."

"그럴 수 없어. 이게 묶여져 있는 이상."


어느새 남자의 팔에 꽂혀있던 주사바늘과 링겔은 거칠고 무거운 쇠사슬로 변해있었어. 그리고 하나하나 남자의 팔에, 생살에 박혀 잔인하게 꿰어져있었지. 


"...이게 너를 구속하는 거야?"

"구속... 어찌보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이게 없으면 나는 죽어."

"어째서?"

"난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그런 약한 몸으로 태어났거든."


남자는 무던히 소녀의 질문에 대답해주며 살며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지. 소녀는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였고, 그러다 괜시리 얼굴이 달아올랐어. 멀리서, 어둠 속에서 보던 현실과 달리 꿈 속의 그는 강인한 모습과 상냥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거든. 그 사실을 깨달은 소녀는 부끄러워져 자신을 쓰다듬어주는 그의 크고 두꺼운 손을 슬쩍 밀으며 작게 중얼였어. 


"어, 어렵거나 곤란한건 아니니까... 기회가 된다면 다시 올게."

"응. 고마워."


-


꿈속에서 그와의 대화를 끝으로 의식이 사라져가더니 소녀는 몸에서 따스한 기운이 맴도는 걸 느꼈어. 그건 몸의 죽어감에 따라 몸이 착각함이 아닌 정말 소녀가 누워있는 곳은 따뜻한 곳이었지. 분명 얼어붙을 듯한 바깥에 있었는데, 이곳은 거인의 집 안이라는 건 그녀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잘 알고 있었어. 다만 눈을 뜨기가 두려웠지. 이곳으로 자신을 데려오고 다리도 조금 아프지만 더 이상 힘든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는건 모두 그가 했을 일이었을테니까. 그래도 그와 마주해야된다는 생각에 소녀는 용기내어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항상 멀리서 지켜만 봤던 남자 거인이 의자에 앉아 자신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지. 악의라던지, 나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크기 차이에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어. 그녀가 경계하듯 빤히 바라보자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울려 놀랄까봐 작게 속삭이며 물었지.


"일어...났어?"

"여기는..."

"보다시피 집 안이야."

"...."

"좀 먹을래?" 


남자는 작은 음식 그릇을 살짝 그녀의 앞에 내밀었어. 그의 권유에 소녀는 살며시 고개를 저으려다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입 안에 넣었어. 그동안 아예 숨어버린다고 거의 굶은 채로 사냥을 하다 오히려 당해 치명상을 입은 것이었으니까. 부드럽고 노란빛이 나는 음식에, 옆에 작은 그릇엔 따뜻하고 하얀 수프가 들어있었지. 알맞게 식었기에 그녀는 체면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그것을 꿀꺽꿀꺽 마셨어. 몸에서 따뜻한 기운이 돌며 배도 부르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자 그제서야 소녀는 그가 자신을 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 모든걸 보여져버려 부끄러웠지만 소녀는 그에게 꼭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된다는 걸 알고 있었어. 다리에 감긴 붕대와 포만감을 느꼈으면 사람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기운 차려서 다행이야."

"...그, 그리고... 그동안 물건이나 음식 몰래 가져가서 미안해. 이건.. 어떻게든..."


소녀는 우물쭈물하며 그동안 그 몰래 했던 일을 털어놓았어. 맛있는 음식 조각이나 옷핀, 천, 노끈 같은 것들을 가져갔다고 말이지. 지금 그녀에게 있어 당장 그에게 모든 죄를 고해성사를 한 뒤 그에게 벌을 받아들일 마음까지 먹고 있었어. 그는 그녀를 벌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 그녀가 그의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덜덜 떨자 그는 작은 손수건을 그녀 어깨에 살짝 둘러주었어. 그제서야 소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지. 가을 나무 같은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에 살짝 닿을 듯 내려있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보이고 살짝은 피곤해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두 눈은 깊고 반짝이는 남자였어. 꿈 속에서 만난 모습 그대로였어. 그리고 진중하고 진지한 모습에 그가 자신을 치료해주고 돌봐준 것이 결코 가벼운 마음조차 먹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 


"신경쓰지마. 오히려 네 존재를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왜?"

"걱정했거든. 너를 알았으면 매일 식사 대접하는건 흔쾌히 해줬을텐데 말이야."

"이득도 없을텐데 이해가 잘..."


소녀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작게 웃었어. 그는 그녀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었어. 그녀의 머리 속은 온통 생존과 이득, 손해 뿐이라는 것을. 그녀의 삶은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을테니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녀의 세상과 달리 그의 세상은 손해를 조금 보더라도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으니까 소녀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던거야. 그럼에도 그는 소녀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어. 오히려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었지.


"그래도 배고프면 언제든지 와 줘. 식사는 얼마든지 준비 해줄 수 있어. 다른 필요한게 있으면 말하고."

"...그치만...."

"...너무 받기만 하면 그런거지?"

"..."

"그럼 올 때마다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그렇게 되면 서로 주고 받는 거래가 되는거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날 채비를 했어. 깨어난 곳이 높다란 탁자 위가 아닌 바로 방바닥이어서 가능했지. 가능하면 부담스럽게 잡아두고 싶지 않는 그의 배려 덕분이었어. 살짝 비틀거리는 소녀의 뒷모습에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어. 


"난 '윤'이라고 해."

"...'하루'야."


소녀는 은신처로 향하면서도 머리 속이 정리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어. 일단, 그가 자신에 대해 호의적인건 정말 다행이었지만 왜 호의적인지는 이해 할 수 없었거든. 그의 물건과 음식을 몰래 가져갔는데도 말이야. 그렇다고 그의 모습에선 함정이나 가식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소녀는 멍한 눈빛을 한 채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어.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오히려 심장이 마구 요동쳤어. 거인과 접촉하고 대화까지 했으니 소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었을거야.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감싼 붕대를 풀었어. 놀랍게도 상처는 모두 다 나아있었지. 보통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었지만 작은 몸을 가진 인간은 회복력이 무척 빨랐거든. 다만 치료를 안했다면 회복을 하지 못해 상황은 심각해졌을 것이란걸 소녀는 생각하며 나은 다리를 매만졌지. 윤이라는 이상한 남자를 떠올리면서 말이야. 


-


차가운 겨울비가 부슬거리며 내리는 추운 날씨였어. 소녀는 비오는 날씨 전용 낡은 넝마를 두른 채 멀리서 '윤'이라는 남자를 바라봤지. 소녀의 모습은 마치 차가운 비를 맞은 가엽고 작은 날짐승 같았어. 서로의 일면식을 한 사이였고 남자는 소녀에게 언제든지 찾아온다고 했지만 그녀는 선뜻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어. 그와 자신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고 그동안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가족들이 죽고 혼자 버티며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어. 혼자 외로이 살다 죽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저 이름 없는 짐승의 삶이라고. 소녀가 용기내어 그에게 발을 내딛은 그 날부터 소녀와 사내의 세계는 조금씩 가까워졌어. 


소녀의 작은 인기척은 조용한 부엌에서 뜨거운 물을 끓이던 그가 재빨리 눈치챘지. 보통 사람이면 느낄 수 없었지만 몸이 아파 예민해진 것과 언제나 그녀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라면 가능했어. 소녀의 모습을 멀리서 본 그는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지만 반가움에 큰소리를 내면 그녀가 놀랄까봐 충동을 간신히 누르며 작게 인사해주었어. 


"다시 와줬구나."

"..."

"오늘은 비가 와서 많이 춥네. 잠깐, 여기 위로 올려줄테니까.."

"왜...?"

"응?"

"저 위에 올라가면 난 혼자 내려갈 수 없어."

"그, 그야 바닥에 있으면 서로의 높이 차이가... "

"...."

"내가 너를 한참 내려다 보고 싶진 않거든. 되도록이면 시선이 비슷하고 싶어서."

"...."

"이거 참... 말을 하면 할 수록 오해가..."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바닥으로 내려줄거야?"

"그럼. 약속 할게."


그가 힘있게 대답하며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어. 그리고는 천천히 오른손을 그녀에게 내밀었지. 소녀는 그의 거대한 손을 보고 살짝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내 결심을 굳힌듯 조심스레 맨발로 그의 손바닥에 딛었지. 그것이 청년과 소녀가 처음 서로 용기를 내어 닿는 순간이었어. 그녀도 긴장했지만 그도 작은 인간이 자신의 손바닥에 올라왔다는 사실에 긴장해 살짝 손이 떨렸어. 무척 가볍지만 그 무게감이 그녀가 진짜 사람이라고 느껴졌으니까. 처음이라 조금 어색했지만 그는 나름 어색하지 않은 척을 하며 소녀를 나무 테이블에 내려주었어. 그녀가 바닥에 앉지 않기 위해 준비한 작은 방석과 별사탕, 조그만 과자들까지 함께 말이야. 소녀는 난생처음 알록달록한 먹을 것들을 보자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쏠렸지만 아닌척 그를 계속 주시했어. 그는 그런줄도 모르고 신나서 들뜬 아이같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자신을 찾아와준 작은 손님을 위해 차를 끓이고 있었지. 너무 쓰지도, 너무 달지도 않은, 결국 심사숙고 고른 차는 향은 달콤하지만 씁쓸한 맛과 고소한 맛이 있는 히비스커스 차였어. 향긋한 향기가 멀리서도 느껴졌기에 그녀는 쫑긋 관심을 보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쟁반에 차주전자와 자신의 머그컵, 그리고 그녀의 크기에 맞는 머그컵을 가져왔지.설레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그녀가 언젠가 자신에게 다가와주길 바라며 그녀가 쓸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품을 몇 개 준비해놨었거든. 그가 조심스레 주전자를 기울자 차 두 세방울이 그녀의 컵에 가득 담겼어.


"여기서 언제부터 지내온거야?"

"글쎄... 한창 풀이 자라고 더울 때 이곳에 왔으니까..."

"세, 네달 정도인가..."


그가 잠깐 생각에 한 뒤 다음 질문을 하려는 찰나, 그는 생각하는 것을 바로 관두었어. 차가 꽤나 뜨거운데 소녀가 식히지도 않고 바로 마시려는 행동을 취했거든. 그는 서둘러 살짝 손바닥을 펴보이며 그녀를 말렸어. 그리고 먼저 시범을 보여주기로 했지. 


"급하게 마시지 않아도 돼. 후 하고 식힌 다음에 마셔도 상관없어."

"후우..."

"바로 삼키지 말고 입안에서 향을 느끼면 돼."


소녀는 그를 따라 양 손으로 컵을 들고 후후 몇 번 바람을 분 뒤 조심스레 차를 마셨어. 


"향은 달콤하지만 맛은 쌉쌀한게 꽤 신기하지?"


그의 말에 소녀는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피식 편한 웃음을 지었어. 그의 말처럼 살짝 식혀 차를 마시니 언제나 공허하고 차갑던 몸이 따뜻하게 채워지는 기분이었으니까. 


"혹시 다른 같이 사는 사람이 있어?"

"나 혼자야. 부모님은 돌아가셨어. 그래서 떠돌다 이곳으로 온거고."


악의 없는 정말 궁금해서 물은 질문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그녀의 무던한 대답에 그는 제 발 저려 미안해했어. 그가 어쩔줄 몰라하는 것도 모른 채, 소녀는 차를 계속 조금씩 홀짝였고. 


"... 혹시 방금 질문에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해."

"기분 나쁘지 않아. 당연한 사실을 답했을 뿐이니까."

"...."

"옆에 이거, 먹어도 돼?"

"응? 아...! 먹어. 하루 먹으라고 둔거야."


그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자 소녀는 자신의 몸 크기에 비해 큼지막한 과자 하나를 들고 가볍게 깨물어 먹었어. 이것도 마음에 들었는지 냠냠 맛있게 먹으며 조금씩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지. 잘 먹는다는 건 좋았지만 그가 볼땐 뭔가 이상했어. 보통 사람처럼 간식이니 가볍게 먹는게 아니라 배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먹는 것 같았거든. 그리고 그 불안한 예상은 바로 적중했어.


"이거 하나면 이틀은 먹겠는걸."

"이틀... 이라고? 그럼 밥은?"

"이게 밥이지."

"하루..."

"응?"

"난 이게 밥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내가 조금 있다 밥, 아니 식사를 차려줄게. 앞으로 함께 먹는거야."

"알겠어."


소녀는 생각보다 곧잘 그의 말을 잘 따랐어. 하기야 여기서 하기 싫다고 해도 그가 끝까지 설득했겠지만 그녀는 그가 다른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이 좋았거든.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던 거야. 눈 앞에 있는 먹을 것도 꽤 맛있지만 그가 더 맛있는 걸 주겠다는 자신감 있는 표정을 보였거든. 호기심 많은 그녀는 그가 신기했어. 그를 더 알아가고 싶었지. 왜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말을 걸어오는 지를. 


-


말은 그렇게 자신감 넘치게 말했지만 제대로 된 식사를 그녀에게 처음으로, 정식으로 대접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그는 무척이나 긴장했어. 저번에 그녀가 다쳤을 땐 오랫동안 먹지 못한 것 같아서 부드러운 계란찜과 사골국을 주었거든. 오늘 심사숙고해서 준비한 식사는 버터를 넣은 으깬 감자와 양념에 푹 조린 돼지고기였어. 사실 쌀밥을 주고 싶었지만 쌀알이 그녀에 비해 꽤 컸기에 마음에 들지 않을까봐였어. 얼마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겠지만 그녀는 그가 해준 것이라면 뭐든 다 편식하지 않고 잘 먹었지만. 걱정 반 기대 반 하고 있는 그의 걱정을 가볍게 넘기듯 소녀는 그가 차려준 음식을 망설임 없이 먹었어. 아까 과자처럼 입맛에 맞는듯 먹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지.


그녀가 잘 먹어주자 그도 안심한 뒤 식사를 시작했어. 그렇지만 작은 소녀 앞에서 게걸스러운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기에 입을 조금 벌린 채 나눠먹으면서 조심스레. 그렇게 조심스럽게 먹는 와중에 작은 시선이 느껴져 테이블을 내려다보자 어느새 하루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알아차렸지. 그녀의 밥그릇은 싹 비워져있었고. 그는 순간 놀랐지만 이내 태연한 척 물었어.


"응? 무슨 일 있어?"

"부러워서. 역시 크니까 더 많이 먹을 수 있구나."

"뭐... 그렇긴 하지. 이 몸을 유지하려면 말이야."

"그래도 부러워..."

"더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더 먹어도 돼."

"하지만... 배불러..."


소녀가 슬픈 목소리로 고개를 떨구자 그는 어쩔줄 몰랐어. 그녀의 말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 더 먹지 못해서 정말 슬퍼하는 것이었거든.


"내일 또 다른 맛있는거 해줄게. 그러니까 기운 내, 응?"


어느새 그는 소녀를 달래주고 있었고 소녀도 그 위로에 조금 기운을 차렸어. 둘 사이에서 정말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이루어지고 있었지. 서로 통성명하고 본격적으로 만난건 어찌보면 오늘이 첫 날이었는데 말이야. 그럼에도 서로는 아직 낯설고 두려운 마음이 있으면서도 서로에 대해 알고 싶어했어. 사람 대 사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것도 같았지. 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오다시피 했으니 접점으로 친해지는 것은 다소 어렵다고 둘은 느꼈지만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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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끝까지 읽어준 분들 모두 감사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