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포!


타다다다당-!!!


뿌옇게 앞을 가린 잿빛 눈보라가 거두어질 때마다.

하얀 화선지 바탕에 선홍색 꽃이 그려졌다.


흐릿해진 눈을 부릅떠 보이는 그 들판 위로, 곧추세워진 인영이 고꾸라지며 깊게 파인 구덩이로 떨어졌다. 


타다당-!

탕-!


올 겨울이 유난스레 혹독한 탓일까.

사나운 눈 폭풍이 가시지 않고 계속 몰아닥친다.


어느새 구덩이 스무 곳을 가득 메우고, 그 위로 내린 눈발에 하얀 천을 소복이 덮였다.


난 폭풍의 눈에서 눈보라에 휩쓸리는 것을 관망하다가, 먹구름이 개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담배가 문득 생각나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코트의 안 주머니로 찔러졌다.

담뱃갑을 어느 쪽 주머니에 넣었는지조차 모르면서, 양손을 번갈아 뒤척거리며 꺼낸 담뱃갑.


손에 쥔 보급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골라 입에 물고, 함께 구겨 넣어둔 지포라이터를 손에 쥐었다.


퐁-


칙- 칙-


앉아 있던 물기가 그새 얼었는지, 엄지로 계속 지펴보아도 불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애를 쓰고 있자, 곁으로 다가온 검은 손길에서 불씨가 건네졌다.


"불 드리겠습니다, 국장 각하."

"......."


싹싹한 솜씨의 주인은 '보안국'의 감찰 과장. 내 휘하의 부관과 같은 인물이고, 담뱃불 심부름을 꽤 해온 모양이다.

그에게 받은 불으로 담배심을 태워 한 모금 머금자.


"크흠, 큼, 커흠... 음...."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메케한 담배 연기에 헛기침을 내뱉었다.


"끝냈습니다, 각하."

"큼.... 그런가."


감찰 과장은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장총을 어깨애 맨 채 구덩이 위를 삽으로 다지는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스무 개의 구덩이. 한 곳마다 300명. 총 5982명의 시체.


오늘 불어 닥친 폭풍의 잔재이다.


"오늘로서 '튤립당'과 그 반역자의 이름은 공화국의 역사의 장에서 영원히 지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업적은 모두 각하의 용단과 지도 덕분이지요."

"아니... 이건 모두 자네를 비롯한 보안국 요원들의 기민함 덕분이지."

"하지만, 각하님께서는 직접 튤립당의 간자역을 맡아 최심부까지 접근하셨잖습니까? 그것이야말로 목숨을 불사르는 과업이었지요."

"......." 

"훗날 공화국에서 국장 각하의 이름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배리안'는 공화국의 가장 충직한 일꾼이라고 칭송할 것입니다."

"......."


감찰 과장은 입이 닳도록 나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조잘조잘 흥얼대지만, 썩 듣기에 좋진 않았다.

가능하다면, 내 공치사를 모두에게 돌리고 싶다.


그야....


난 이 위대하다고 칭해지는 업적에 대해 인정 받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한 짓을 통해 특진과 훈장을 받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학살자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후아아...."


입에서 뿜어지는 하얀 연기에 눈마저도 매워진다.

알싸한 니코틴의 힘인지, 긴장이 끈이 풀리며 풀어진 정신은 상념으로 도졌다.


내가 어째서 폭풍의 눈에 들어온 걸까.


나, 베리안은 보안국 국장이 되기 이전에 정보과의 요원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만난 튤립당의 수장인 '레토'의 설득에 감화되어, 이 독재 공화국에 민주 혁명을 안겨주기 위해 투신했다.

하지만, 나는 보안국의 중진 요원이라는 이유로 당 내부에서 불신을 받았고, 그들의 불신을 덜고 인정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는 도중에 당 내부에서 사랑하는 여인도 만났고, 차곡차곡 튤립당의 신뢰를 쌓아가며, 수장인 레토와 막역한 사이도 됐다.


순조롭게 혁명이 진행되던 도중, 나는 결정적인 작전에 참가해 스스로 위험 부담이 큰 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그 작전이 뒤틀리고 위기에 쳐했을 때.


사랑하는 여인도, 튤립당의 동지들도, 수장인 레토도 날 구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믿고 목숨을 걸었지만, 그들은 나를 버렸다.


그렇게, 홀로 쓸쓸하게.

베리안은 죽는다.


......그게, 이 게임 '레볼루션 사가'에서 일어날 베리안의 운명이다.

내가 빙의해버린 망할 순정파 낭만 호구의 끝이었단 말이다.


베리안이 된 나는 이 몸에 갇혀 죽기 싫었다.

배신 당하기 싫었고, 혁명이라는 구실 좋은 대의의 희생양이 되긴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베리안은, 그의 일터에서, 그의 일을 충실히 해냈다.

베리안은 게임에서 알고 있는 정보들을 토대로 주인공들, 즉 튤립당의 당원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게임을 진행하며 알 수 있었던 모든 정보를 토대로, 특임대를 파견해 은신처와 조력자 지점들의 급습했다.

훗날 걸림돌이 될 주요 NPC들마저 전부 구실을 엮어 인생에서 청산 시켰다.


이 게임의 주인공인 레토를 죽였고, 사랑하던 여인을 죽였다. 동포들을 산 채로 불태우고, 혁명가들의 목을 매달았다.

베리안은 게임이라는 현실을 망가뜨리고, 게임이라는 현실에서 살아남았다.


내가 승리한 게 아니다.

베리안이 살아남은 거지.


"국장 각하, 제2 군관구에서의 진압이 완료되었다는 최종 보고입니다. 320명이 작전 중에서 사살되었고, 120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반면에 우군의 피해는 12명의 사망자이며 중장비 피해는 매우 경미합니다. 또한 잔당의 도주 징후는 희박해 보입니다."

"......군관구 사령관에게 수고했다고 전하게. 나중에 밥 한 끼 대접하겠다고."

"예. 그리고, 총수께서 국장 각하를 관저로 호출하셨습니다."

"......속히 호출에 응하겠다고 답신 하게."


연락관의 보고를 받은 후, 나는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또 한 모금 머금었다.

베리안은 상당한 골초라 하루에 한 갑씩 담배를 폈다.


한 개비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비흡연자였던 나에겐 연기가 너무 독했던 건지.


"커흠...."


......또 목에서 기침이 나왔다.




* * * * * *




총수 관저 앞에 내 관용차가 세워지고.

나는 도무지 엉덩이가 시트에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운전수가 친절하게 좌석의 문을 열어주는 탓에, 싫어도 관용차에서 내려야 했다.


"하아...."


물이 말라 비틀어진 석조 분수대를 중심이 된 거대한 광장.

그곳을 관통하여 쭉 이어진 기다란 반석 길이 관저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광장은 30m 높이의 기간이 오와 열을 맞춰 설치되어 있고.

기간마다 게양된 공화국 국기가 겨울의 삭풍에 따라 일제히 흩날리는 장엄한 광경을 연출한다.


관저의 입구까지 스무개의 높은 계단을 오르자, 양문형의 출입문 앞을 친위대 병사가 막아 서고 있었다.

영혼마저도 공화국의 총수에게 받친 그 친위대 병사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군례를 올려 붙었다. 친위대 병사들이 견착한 자동 소총의 총구는 금방이라도 내게 불을 뿜을 것 같이 느껴졌다.


나도 그의 군례를 받고, 인가 도장이 가득 찍힌 국민증을 보여주었다.


"......확인되었습니다, 보안국장. 입장하십시오."


허가가 떨어진 후, 관저로 들어서자 끝이 보이지 않을 높은 천장과 함께 거대하고 공허한 로비 홀이 입장객을 압도했다.

로비 홀 가운데는 천장으로 향하듯 뾰족한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거대한 관저에서 길을 잃을 법하지만,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할 지 알고 있다.

나는 로비 홀을 지나, 여러 풍경화 액자가 걸린 통로의 계단으로 3층 올랐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보이는 서고.

떨리는 발걸음을 움직여 서고의 문 앞에 선 다음. 나는 다려지지 않은 옷깃 곧게 접고, 정모를 벗어 겨드랑이 사이에 들고. 등 허리를 활짝 폈다.


쉼 호흡 몇 번으로 긴장을 푼 다음, 손등을 문고리 위에 가져다 대어 슬며시 노크를 두들겼다.


똑- 똑-


"보안국장 베리안입니다. 총수의 호출에 응하였습니다."


내 목소리가 닿을 곳 없이 넓은 복도 위에서 울려 퍼지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안쪽으로부터 활짝 열리며, 가장 먼저 퀘퀘한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풍겼다.


주백색으로 밝혀진 서고 안을 책장이 나란히 줄지어 있고, 책장마다 가지런히 장서가 꽂혀 있었다.

고딕 형식 창문 맡에 실내 화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에 가득 피어난 보라색 솔체꽃에서는 은은한 플로럴 향이 풍겼다.


미로처럼 펼쳐진 책장 사이를 나아가니.

화사한 햇볕이 내리쬐는 창문 앞에 회색 머리의 소녀가 꽃을 다듬고 있었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그림의 주인공이 된 소녀.


그녀가 8천만 국민의 삶과 자유를 거머쥔 독재자.

레볼루션 사가의 최종 보스이며,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


"스베틀라나 총수님."


스베틀라나 테레노비치 총수.

손에 든 분무기를 화분의 꽃마다 뿌려주며, 작은 식물들의 목을 축여주고 있던 그녀는 싱그러운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돌려 내게도 그 미소를 살짝 나눠주며, 활짝 피어난 웃음으로 날 반겼다.


"오늘 진압 작전에서 직접 야전 시찰을 나섰다죠?"

"보안국의 총책임자로서 모범을 보였을 뿐입니다."


침 발린 말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과녁판처럼 돌아다닌 이유는, 모범이고 자시고 내 정보 없이는 작전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요?"


사선 위에서 줄을 타듯, 나는 그녀의 미소마저도 달게 삼킬 수 없었다.

나는 보라색이 독을 알리는 보편적인 색감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졌다.


스베틀라나는 겉으로는 무해하고 향기로운 수체꽃이었으나, 보라색 꽃 봉우리는 내게 독을 의미했다.

잘못해서 목구멍 아래로 삼켜버리면, 내 오장육부를 쥐어 짜 죽일 극독.


"오늘 외무부의 보고를 받았어요. 역시 합중국은 인권 유린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공화국의 민사작전을 방해하려는 내정 간섭을 꾀했죠. 그들의 잘난 군사 조약국과 함께 말이에요. 그런데, 합중국이 튤립당을 비롯한 반국가단체를 지원하고 있다는 정황이 나오니 꽁무니를 빼더군요?"

"......."

"모두 보안국장, 당신이 목숨 걸고 찾아낸 증거 덕분이네요."


스베틀리나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화분에서 시든 잎들을 떼어낸다.


"당신 덕분에 공화국을 좀 먹는 이상주의자들을 뽑아냈어요. 여리고 나약한 국민들을 개몽시키겠다던 그 어리석은 자들이었죠."

"...실로 그렇습니다."

"레토. 그 자는 저를 대신하는 철인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죠. 그의 구실 좋은 사탕발림에 넘어간 이들이 불쌍할 정도로요...."


화분의 흙 위에는 떼어낸 잎들이 가득 쌓였다.

스베틀리나는 가늘고 고운 손으로 흙 한 줌을 잎 위에 덮는다.


"이제, 반역자들의 피로서 공화국은 더욱 일치단결할 거예요. 이 위업은 당신이 없었다면 달성하지 못했겠죠."


화분 정리를 끝낸 그녀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아내더니.

이내 내 쪽으로 뒤돌아 서서히 다가왔다. 그녀의 숨결이 나와 닿을 만큼, 녹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추어 보일 만큼이나 가까워졌다.

그녀는 내 정복의 매무새를 살피더니, 입꼬리를 틔운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내 넥타이에 닿더니, 이제야 구겨진 부분을 보였다.


"오늘은 너무 바빴죠?"

"제가 고치겠습...."

"가만히-."


내 동작은 스베틀리나의 단호한 목소리에 굳어버린다.

그녀는 넥타이를 코트 깃 바깥으로 꺼내, 하얀 두 손으로 매만져 천 자락을 다린다.


"전 당신을 항상 믿어왔어요. 아버지의 피가 반역자들의 손에 묻었을 때부터, 공화국의 책임자가 된 지금까지. 언제나 그림자 뒤에서 절 지켜주었으니까."

"......."

"당신이 레토를 만나 튤립당에 위장 가담했을 때도, 그들의 사보타주를 돕는 행동을 보였을 때도, 반역자들의 앞에 나와 당신의 목소리를 높였을 때도. ...심지어 당신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을 때도. 전 당신이 제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죠."

"......."

"후훗- 믿음이 틀리지 않았네요. 이거 봐."


스베틀리나의 손에 곱게 다려진 넥타이가 보였다. 그녀는 매듭을 내 목이 답답할 만큼 조여가며, 사랑스러운 미소로 올려다 본다.


"오라버니는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아요... 영원히-...."


스베틀리나의 가녀린 팔이 내 등허리를 감싼다. 작고 따스한 몸집으로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극독인 걸 알면서도 천천히 팔로 안아 내 몸에 가두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게임에서 승리한 게 아니다.

미션을 완수했다는 표시도, 엔딩 크래딧도 뜨지 않으니까.


그저 살아있을 뿐이다.


그녀의 손에 닿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화분의 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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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렁뚱땅 끝내버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