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그저 내게 존재했던 것은, 내게 존재했던 축복은 이 검 한 자루 뿐이었다."

온 몸 이곳저곳 생채기가 가득한 소녀.
하지만 치명상 하나 없이 당당히 서 있는 소녀는 자신의 번뜩이는 검날을 자신의 앞에 서있는 존재에게 겨누었다.

그 존재는 그런 소녀의 모습에, 말에, 뒤틀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고, 그 기척만으로도 만물이 살해당할 괴물.
그 괴물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귀아픈 소리를 내뱉으며 소녀를 향해 찬사를 보냈다.

"크흐흐, 네 녀석, 진짜로 인간이 맞는게냐? 그 어떤 용사도, 영웅도, 궤를 달리하는 나의 권능 앞에 찢겨 흡수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보란듯이 서있다니, 재밌구나. 크흐흑, 정말 재밌어!"

까드득- 빠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소리.

곧, 오류된 존재의 육신에서 뻗어져 나온 도가니혼돈의 살점이 향연하며 세상은 붉게, 아니 붉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사이, 오류된 존재는 소녀를 내려다보고 비웃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오류된 존재의 음성이 잦아들자, 시뻘겋게 변한 세상 틈 사이로 내려온 불길한 하얀 빛이 어둡게 존재를 빛추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존재해서는 안될 오류된 존재, 강림한 혼돈이었다.

만물이 강림한 혼돈을 향해 경배를 보낸다, 찬사한다.

고개를 조아리며, 자신의 생을 그것에게 받치고 자결해나간다.

막을 수 없는 세계의 종말.
혼돈의 강림이란, 그런 것이었다.

소녀는 지켜보았다.

이 세계에 강림하며 모든 것의 종말을 선언하는 혼돈을 바라보았다.

고깃덩이 살점들이 꿈틀거리며 하나하나 흡수해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더 굳세게 자신의 손아귀 속 오래된 검의 손잡이를 쥐며 말을 이었다.

"가족은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전우들을 잃었다. 결혼을 약속했던 나의 연인또한 애진작에 죽어 없어졌다.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라, 이런 선반에 까치발 들고 뛰어도 손 하나 닿지 않을 계집아이의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지... 솔직하게 이야기하여 이 세상이 미웠다. 내게서 모든 것을 하나 하나 훔쳐가는 이 세상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이 없어지는 것을 바란 적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상이 없어진다면, 그들이 있었던 모든 흔적이며, 기억조차 영영 사라지게 될테니 말이다."

온통 새빨간 세상 속에 소녀가 쥔 검이 빛을 발했다.
암울하고 슬프지만, 따스한 행복이 잠든 빛.

소녀의 기억이었다.

소녀의 기억에서 비롯된 힘, 추억의 불꽃.

작디 작은 소녀는 오류된 이형의 존재에게 그 칼날을 겨누었다.

강림한 혼돈은 웃었다.
마치 중요한 나사가 빠져나간 기계처럼 삐거덕 거리며 기괴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뻗어난 도가니혼돈의 살점들이 요동을 치며 파란을 일으켰다.

파란은 작은 불꽃을 앞세운 더욱이 작은 소녀를 덮쳤다.

파란이 베였다.

환하게 하얗게 불타올랐다.

기괴한 미소를 자아내던 오류된 존재의 그 면전이 조금 일그러졌다.

여전히 당당하게 선 소녀는 그런 혼돈을 향해 말하였다.

"그러니 어떤 대가를 치루더래도, 이 세계를 지켜내겠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