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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요주인님.”

 

한쪽 무릎을 차가운 바닥에 대고쭈그려 앉은 여자가 무뚝뚝하게 요구했다.

 

…….”

 

사람 서넛이 앉아도 넉넉할 너비의 의자에 앉은 소녀가 경직한 상태에서 대답했다

 

소녀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한쪽 다리를 들어올렸다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그 동작은 느릿했다.

 

쭈그려 앉은 여자는 그 느린 동작에 눈살을 조금 찌푸렸지만결코 재촉하지는 않았다그래서는 안되니까.

 

그저 두 손을 공손히 내밀고 기다릴 뿐이었다.

 

군데군데 상처가 난 투박한 손 위로소녀의 한 쪽 발이 얹혀졌다.

 

여자는 제 손에 깨지기 쉬운 자기 그릇이 올라온 것 마냥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꼭 과장된 비유는 아니었다어쩌면 여자에게는 그 표현조차도 모자랄지도 몰랐다

여자에게 소녀는 어떤 보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였으니.

 

값비싼 가죽을 썼고 구두코가 반질한 까만 단화

그 속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길이의 은백색 롱 삭스

그 속에태양을 한 번도 쐰 적 없는 것처럼 하이얀 살결.

 

맨다리와 맨발이 드러날 때까지, 한꺼풀씩 벗기는 동작은 지나치게 엄숙했다.

 

단화와 양말 모두 바닥에 가지런히 내려둔 여성의 표정은 경건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 발을 조심스럽고 또 천천히 들어올렸다.

 

이 모든 과정을 의자에 앉아 지켜보는 소녀는

 

냄새 안나겠지몇 번이고 씻었으니까때도 없겠지깨끗하겠지?’

 

얼굴이 새빨개졌다귀까지 물들 정도로.

 

 

각자의 이미지로는 쉽사리 유추되지 않지만여자는 소녀의 노예였고 소녀는 여자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정신은 남성의 것이었고그보다 앞서 평등과 자유를 강조하는 민주사회의 일원이었다.

 

지금의 세계에서 노예제가 용인되고자기도 이들을 노예로 부리기는 했지만인간 이하의 대접을 한 적은 맹세코 없었다원하는 만큼의 부를 얻고 나서는 자유민으로 풀어주기까지 했으니이 세계의 윤리관으로는 괴짜이자 기행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문제가 있었다면노예들도 소녀의 결정을 반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니좀 더 정확하게, 노예들은 제각기 자괴와우울과격노 따위를 느꼈다

 

주인은 당황과 황당 속에서 주종관계의 무효를 주장했다

노예들은 관계의 유효성을 넘어서영속적인 계약이라고 주장했다.

 

서로의 의지가 평행선을 달릴 때이성만으로는 문제해결이 되지 않을 때타협점을 결정한 건 무력이었다

 

그리고 노예들은 강했다

너무나도얘네가 어떻게 노예로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말이 길어질 때, 평소에 존대도 않던 하프드래곤이 울분 섞인 브레스로 동산 하나를 날려버리는 걸 보고선소녀도 마음을 고쳐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녀는노예들이 원하는 데로주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치만.

 

그럼핥겠습니다주인님.”

 

이런 건한 번도예전에도

 

제 봉사가 불만족스러우시다면 즉시 말씀해주십시오.”

 

해달라고 한 적도 없잖아!

 

소녀는 말없이 눈을 크게 떴다진짜진짜로?

 

여자는 그런 눈빛을 외면했다정확히는소녀의 발만을 바라보았으니까.

 

여자의 고운 입술이 벌어졌다따듯한 숨결이 발가락에 닿았다소녀는 발을 꼼질거렸지만차마 내뺄 수는 없었다.

 

그래도깨끗하게 씻었으니까몇 번이고 씻었으니까향유도 발랐으니까괜찮을 거야괜찮을 거야…….’

 

페디큐어도 없이 수수한 발가락을 입 압에 두고 있던 여자가 문득.

 

주인님.”

 

냄새 나많이 나그러면 이따아니아니나중에…….”

 

씻으셨습니까?”

 

……?”

 

물음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 소녀의 반문은 어정쩡했다

 

하지만 여자는 이제 자신의 주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씻으셨냐고 여쭤보았습니다주인님.”

 

어어혹시 지저분할까 봐…….”

 

……제가 드릴 봉사가 못 미더우셨다는 뜻이군요.”

 

침통한 뇌까림에 소녀의 사고회로가 순간 멎었다.

 

으에?”

 

주인님의 종으로서주인님께 믿음을 드리지 못했군요…….”

 

아니아니아닌데그게 아니라!”

 

하지만 여자는 소녀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여자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흐느껴도 이상하지 않은 표정이 됐다.

 

작은 맨발을 조심스럽게찬바닥이 아닌 벗겨둔 양말 위로 올려두고서 천천히 일어섰다.

 

실례지만메이드장에게 가는 걸 허락해주실 수 있겠습니까주인님?”

 

갔다 와…….”

 

도무지 상황이 이해가지 않지만일단 지금 당장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한숨을 토하듯 허락했다

 

하지만 여자의 요청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주인님께선 제가 어떤 벌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

 

주인님께 제대로 봉사하지 못한 점주인님께 믿음이 아니라 불신만을 품게 한 점이 잘못을 어떤 벌로 대체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아니.”

 

우선 오늘과 내일제 몫의 식사는 없도록 하겠습니다이 시각부로 다른 말씀이 있기 전까지 주인님께 함부로 눈에 띄지 않도록 근신하도록 하겠습니다그리고 또 어떤 벌을 받으면 되겠습니까?”

 

소녀의 머리가 아까보다도 혼란했다예전에 몇 만 골드짜리 거래를 앞두고 입씨름을 할 때보다도 막막한 기분이었다그 때는 의논하고 의지할 노예들이라도 있지지금은 자기 혼자뿐이었으니까.

 

그와 동시에무의식에서 번져나오는 감정을 느꼈다

 

태형을 원하십니까하프드래곤에게 몽둥이를 구해오라고 시켜 이르겠습니다아니면 감히 주인님의 기분을 거스리게 한 죄혹여 죽음으로 사죄하시기를 원하십니까그러시다면…….”

 

그만! 제발, 그만!!”


여자가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곧장 험하게 일그러졌다

 

주인님께서는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주인 입장에서는 해방이었지만 노예들은 버림과 유기로 생각했기 때문에다시금 주인의 역할을 쥐어준 소녀에게 별의별 요구를 부탁했다.

 

목줄을 채워달라는 건 예사였다달궈진 쇠로 낙인을 찍어달라뇌 속에 절대복종의 저주를 새겨달라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심장이 멈춰버리는 마법진을 만들었으니 사용을 허락해달라……

 

모두 거절했다소녀가 어느 때보다도 주인으로서 엄하게 명령을 내렸던 때기도 했다

 

소녀는 노예를 자처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때로는 두렵기도 했다.

노예를 자처하는 그들은 소녀가 다시 자기들을 버릴까봐 무서웠고 더욱더 극진히 모시고자 했다.

 

소녀의 폭발과 여자의 대꾸는 단순한 마찰이 아니라상호 간의 오해가 축적된 결과에 가까웠다

 

주인님께서는 더한 요구를 하셔야 합니다주인님의 발을 개처럼 핥으라면 기쁜 마음으로 그럴 겁니다짐승 흉내를 내라고 하면 기꺼이 그럴 겁니다그런데 주인님께서는 왜 그러시지 않습니까왜 저희의 봉사를 받

 

난 그런 거 안해예전에도 안했잖아나한테 왜 그딴 거 왜 시키려는 거야!”

 

그게 저희 노예들이 해야할 일이니까요왜 저희의 봉사를 거부하시는 겁니까혹시저희를 다시 버리시려고…….”

 

안 가안 간다고어차피 또 이 세계 끝까지 따라 올거잖아!”

 

그럼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저희는저는 주인님의 노예 아닙니까?”

 

소녀는 몇 번이고 반복했던 대답을 똑같이 외쳤다.

 

너희는 내 노예가 아니니까!”

 

하지만 반복된 문구는 강조보단 진부함에 가까웠다여자는 아무 내색도 없이 흘러넘겼다.

 

그 소리십니까그럼 저희가 주인님의 노예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하지만 이 다음 말은 소녀도여자도 모두 생각지 못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생각했다고!”

 

여자의 숨이 멎었다

 

하지만 소녀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노예로 샀지만그래노예로 계약했지만같이 지내다 보니까직원동료그리고 친구라고 생각했었다고!”

 

낯선 세계에 이질적인 몸으로 떨어졌을 때생판 처음보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다가가지 못했을 때.

 

돈 많은 소녀가 사람을 사귀는 방법은 극단적이고 역설적이었다소녀는 노예 시장을 적극 활용했다.

 

그러니까 그래내가 어떻게 너희를 노예로 부려너흰 노예가 아니라 내게 친구였다고알아들어?”

 

그래서 해방을 통해 자유를 보장했고다시 찾아와 노예를 자처했을 땐 당황과 함께 속상했다

 

자기도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속마음이었다내뱉고 나서야 깨달은 부분이었다

 

소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예전보다 젊고 예뻐진 몸이지만병약한 부분이 있어 이 정도로도 숨이 가빴다.

 

후우후으으……괜찮아?”

 

그리고 소녀 앞의 여자는 그대로 굳은 것 같았다

 

격정적인 소녀와 달리여자는 얼어붙은 듯이 뻣뻣했다.

 

주인의 걱정에도 그 노예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괜찮.”

 

소녀가 덜컥 겁먹고 다가가려는 순간.

 

실례하겠습니다!”

 

여자는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뭐야.”

 

소녀는 얼떨떨했다한창 성낸 건 자기였던지라 다시 부르기도 좀 그랬다.

문득 한쪽 발이 차가워빠르게 양말을 다시 신었다.

 

 

그리고 무작정 뛰쳐나간 여자는소녀가 보이지 않을 문 뒤켠에서 손으로 가슴을 짓눌렸다.

 

한 손으로 모자라 두 손으로 힘껏 억눌렀다

 

그럼에도 쿵쾅쿵쾅심장이 마구 뛰었다

 

주인님께서 친구라고 하셨다.

 

친구라고 생각하셨다고 했다.

 

불측한 생각이다자기는 한낱 노예일 뿐인데.

 

말도 안되는 생각이다주인님을 섬겨야하는 입장인데.

 

그런데.

 

주인님과친구…….”

 

어떻게감히.

 

하지만

 

하지만

 

……헤헤…….”

 

그 발음이그 울림이.

 

그리 나쁘지만 않은 것 같아서 남모르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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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구니 좀 마싯는 거 가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