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마법소녀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일단 돈이 넘쳤다. 월 마다 따박따박 나오는 기본급과 토벌 수당은 당연하고 굿즈 판매, TV 출현, 행사 참여 등 이런저런 수입을 따지면 연봉 수백 억은 우스웠다.


마수와 싸우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 부분은 정신이 남자인 쪽이 크게 도움이 됐다. 음, 전투욕이 충족 해야 할까. 고유 무기가 검과 방패라 마음껏 치고 받을 수 있어 스트레스 해소가 잘 됐다.

 

변신 폼도 나쁘지 않았다. 코스튬은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옷이 아니라 판타지에 나오는 노출 없는 공주기사 갑옷 비슷했다. 치마이긴 했어도 발목까지 내려와 노출도는 제로에 가까웠고 속바지도 있었으니 뭐.


대중들 앞에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시그니쳐 구호를 외치고, 팬 미팅에 나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팬이라는 남정네들과 악수하고, 야짤이나 동인지 따위가 만들어지며 만인의 여친이자 반찬으로 소비되긴 했지만. 아무튼, 얻는 게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결심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우우우우웅 - .

 

켜지도 않은 컴퓨터 앞에 앉아 늘어진 상태로 있던 나는 마우스 옆에서 울리는 스마트폰을 쳐다봤다.


어찌나 강하게 울리는지 무기력하게 책상 위에 올려둔 오른쪽 다리를 타고 온 진동이 온 몸을 울렸다. 받지는 않았다.


그렇게 세 번 울렸을까, 전화가 뚝 하고 끊어졌다. 그렇게 1분, 거실 천장에 있는 아파트 방송 스피커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너 왜 전화 안 받아! 다시 걸테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받아라. 알았지!?


이런, 이건 생각 못했는데.


스피커 모드를 이용해 마이크에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남자의 목소리는 싸구려 음성 필터를 거친 것 마냥 쩍쩍 갈라져 있었다.


…...단순 피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게 뚝 - 하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가 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스마트폰 화면이 점멸하며 진동했다.


스마트폰을 집어 든 나는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알면서도 화면을 확인했다.


[ 매니저 시우 ]


그리고는 조용히 전원 버튼을 꾸욱 눌러 스마트폰을 완전히 꺼버렸다. 아파트 스피커도 마나를 이용해 전원을 차단했다.


나는 양 다리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아랫입술을 씹으며 포장 비늘조차 뜯지 못한 57,000,000원짜리 모니터를 쳐다봤다. 시커먼 화면에 음울하게 가라앉은 내 표정이 보였다.


한때 찬란하게 타오르던 금빛 눈동자는 이미 그 광채를 잃고 탁한 빛을 띄고 있었다. 별 다른 관리 없이 비단처럼 부드럽던 긴 머리칼도 푸석푸석해져 거친 개털 같았다. 피부는 또 어떤가? 얘기하기도 싫다.


시우 몰래 정신병원에 들렸었는데, 번아웃 증후군이란다.


그래, 돈을 많이 벌면 뭐하나. 최고급 컴퓨터, 한정판 스포츠카, 개인 별장, 초호화 요트 따위를 사면 뭐하나.


쓸 시간이 없는데! 쓰지도 못한 물건들의 유지비가 다달이 빠져나가는 꼴을 보고 있자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다. 솔직히 말해 시우가 왜 전화를 걸었는지는 다 알고 있다. 애초에 내 마나 기감이 마법소녀 협회의 방위 시스템보다 훨씬 뛰어난데 모를 리가 있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내 변신폼이 그려진 화려한 브로마이드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브로마이드와 그것이 걸린 벽, 건물 따위를 지나쳐 강력한 마나가 날뛰는 방향을 바라봤다. 느낌상 제법 강한 괴수였다. 대충 2급에서 1급 언저리일까.


괴수 주위를 날아다니는 마나 파장으로 보아 지금 싸우고 있는 멤버는 블루 슈팅스타, 화이트 로즈, 나이트 블로섬, 블랙 오팔이니 한 30분 정도면 처리할 것이다. 아, 시아. 드라고닉 골드도 가고 있네. 이러면 10분이면 잡겠지. 혼자서 급도 잡는 앤데.


솔직히 말해 2급 하나 처리하는데 과분한 전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우가, 그러니까 협회가 날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강하니까. 별 다른 수식어가 필요없이 그냥, 강하니까.


" 그나마 남은 재미가 괴수랑 싸우는 거였는데…... "


그것도 옛날 얘기가 된 지 오래다. 나는 열심히 싸웠고, 너무 강해졌다. 이제 특급이고 9급이고 내 앞에서는 평등하게 한방이다.


무엇보다 외국에서는 마법소녀가 몇 명 씩이나 투입돼 힘겹게 쓰러트리는 고등급 괴수들이 내 손에 픽픽 쓰러지는 모습은 협회와 정부의 선전용 이미지로 아주 좋았으니 협회와 정부는 등급에 상관없이 덩치만 좀 커다랗다 싶으면 날 찾았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성실하게 부름에 응했다. 양학도 양학 나름의 재미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아무튼, 나는 방금 전화로 확실하게 마음을 굳혔다. 은퇴할거다. 남은 돈은 써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컴퓨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창고방으로 향했다. 사놓고 송장조차 뜯지 못한 택배 상자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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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하하하하!!!!! 진작 놀러 올 걸 그랬어!!!!!!! 우후 ~ !!!!!!!!! "


에베레스트 산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린 나는 양 팔과 다리를 쫙 펼치며 채 윙슈트 하나에 의지해 하늘을 날았다.


산 꼭대기를 찍겠다고 서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뛰어내리는 나를 미친년 보듯 봤다. 인지저해를 걸어 놓았음에도 워낙 제정신 아닌 장면이다 보니 시선을 사로잡은 듯 했다.


하긴, 내가 봐도 미친년 같긴 하겠다.


마나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다 보니 내 마음대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할 수 없다는 사실과 부딪히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는 심리적 공포가 도파민을 미친 듯이 뽑아냈다.


비행이 아닌 끝없이 추락한다는 특이한 부유감도 신선했다.


통신사는 해지했다. 돈은 세탁했다. 가짜 신분을 만들고 계좌도 신설했다. 마나를 이용한 탐지 차단도 완벽하다.


이제 날 방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기다려라 익스트림 스포츠!

기다려라 도파민!

덤벼라 대자연!


끝없는 추가 근무 끝에 미쳐버린 마법틋녀가 간다!





가능하다면 나도 낙하산을 편 채 초강력 사이클론에 뛰어들어 보고 싶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