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하아….”


한 발짝 내딛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

나는 아파트 현관 앞에 선 채 한참을 망설였다.


기껏 꽃구경을 방패 삼아 집을 나서려 했건만….

벚꽃 위로 떨어지는 봄비가 야속하기만 할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는데….’


다른 세계에서 치렀던 전쟁의 기억.

이세계의 포화 속에서 귀환한 지도 벌써 수년이나 흘렀다.

하지만 나의 기억은 아직도 화약 냄새를, 그리고 짙은 피 냄새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흔히들 PTSD라고 부르는 마음의 병이었다.


물론 현대로 귀환한 이상 내 몸이 안전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작고 여린 여자의 몸으로 변해버린 뒤였으니, 내가 비겁한 패잔병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를 터였다.


알고는 있다.

내가 안전하다는 사실도, 이 세계가 평화롭다는 사실도.

하지만 역시… 한 발짝 내딛는 게 너무나도 무서웠다.


“안 나가세요?”


“!!”


그때, 바로 뒤에서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울리는, 덩치 큰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아파트의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저, 저기!”


“아윽!”


철푸덕.

나의 짧은 도망은 발을 헛디뎌 넘어진 뒤에야 끝이 났다.

부슬부슬 내리던 봄비가 나를 비웃듯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죄,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아.”


자신 때문에 내가 넘어졌다고 생각한 것일까?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급히 달려와 내게 커다란 우산을 씌워주었다.


투둑. 투둑.

우산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며 익숙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우중충한 날씨 속. 우산의 그림자까지 더해지며 세상이 어둡게 물들었다.


“무릎 까진 거 아니에요?”


투둑. 툭. 투욱.

빗방울이 내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고개를 숙여왔다.

걱정하는 얼굴엔 나를 향한 호의가 짙게 떠올라 있었다.


“잠깐 보여주세요. 피 나잖아요.”


툭. 퉁. 투둥.

빗방울이 내는 소음과 함께 피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다행히도 가벼운 찰과상이다. 아직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부축해드릴게요.”


퉁. 탕. 타당! 콰앙!

익숙한 전장의 포격음과 함께 적군이 내 몸에 손을 뻗었다.

이대로라면 잡히고 말 거다. 살아남기 위해선 도망쳐야만 한다.

나는 눈앞의 적군을 밀치곤 전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저기요!”


추격해오는 적을 따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포연 때문에 어둑해진 하늘 위로 벚꽃잎 같은 불똥이 날아다녔다.

어느새 무기도 잃어버렸는지 빈손이다. 어딘가 몸을 숨길만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허억. 흐윽!”


이 세계가 안전하다니.

어째서 그런 안일한 생각을 했었던 걸까.

지금으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제, 제발… 제발…!”


나를 둘러싼 전쟁.

빠져나왔다고 여겼던 전장.

그것은 여전히 끔찍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 * *


PTSD로 오들오들 떠는 틋녀 보고 싶음...


허억.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