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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 순수하게 걱정이 되어서 이수아에게 말을 건냈다.

 

이렇게 추운 날, 안 그래도 얇게 입고 있으면서 바닥에 쭈구려 앉아있으니까.

 

욕심이 있다면 30일뒤에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정도다.

 

그런데 나의 선의를 어떻게 해석한건지, 이수아는 고개를 잠깐 들고 다시 팍 숙였다.

 

“아, 씨. 가세요. 짜증나니까.”

 

“집에 안 들어가세요?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왜요. 신경끄라고요.”

 

“걱정되니까 그러죠.”

 

“...”

 

경계심 강한 길고양이를 보는 것 같다.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모르는 남자가 대뜸 말을 걸어오는데 경계를 안 하면 이상한거지.

 

앞으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30일뒤 죽는다는 걸까.

 

그것도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가.

 

아마도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수아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서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봤다.

 

밤하늘은 오늘따라 유독 어두웠다.

 

“...하, 재수 존나 없네. 허벅지 만지는 변태를 만나지 않나, 이젠 하다하다 오지랖 넓은 미친 놈도 만나고.”

 

이수아의 목소리엔 적의가 가득하다.

 

사람에게서 그것도 여자에게서 이렇게 날 선 반응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절하게 말을 건냈다.

 

“대놓고 도와달라고 이러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어떤 통계에 의하면 자살 희망자의 대부분은 주변에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신호를 보내던 사람이 자살하면 주변 사람들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지금의 이수아를 보면 그냥 싸가지 없는 여자애나 다름없다.

 

얼굴에 드러난 표정도 독기가 가득하다.

 

30일 뒤에 자살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할 수가 없다.

 

더구나 이렇게 예쁘장한 여자애면 더더욱.

 

“도와줄거면 거기 그냥 돈 놔두고 꺼지세요.”

 

“...”

 

보기보다 솔직한 여자애다.

 

어쩌면 그냥 다가오는 사람을 쳐내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일 수도 있고.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다시 올테니까.”

 

근처에 있는 ATM기로 가면서도 이게 맞는 건지 생각해봤다.

 

돈이 아까운게 아니라, 내가 호구처럼 보일까봐.

 

아니, 이미 걔한테는 호구처럼 보이겠지.

 

꺼지라는 소리를 듣고도 이렇게 돈을 뽑으로 가는 거면 병신도 이런 상병신이 없다.

 

어두운 밤에 쓸쓸히 빛나고 있는 ATM부스에 들어가서 만원권 10장을 뽑았다.

 

“자요. 이 돈으로 모텔이라도 가서 편하게 자세요. 궁상맞게 계속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이수아는 고개를 들어서 내가 건낸 10만원을 확인했다.

 

그리고 고운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저씨. 목적이 뭐에요? 10만원줘도 아무것도 안 해줄 거에요.”

 

“...뭐?”

 

“왜요? 저한테 바라는 거라도 있어요? 그냥 순수하게...”

 

“아니, 그거 말고...아저씨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충격이다.

 

이수아한테 돈 놓고 꺼지라는 말을 들을 때보다 더.

 

아무리 군인 아저씨 소리를 들었다지만, 현재 나는 23살의 풋풋한 대학생이다.

 

외견만 놓고 보면 이수아랑 별 차이도 안 나보이는데.

 

“아저씨는 어른 아니에요?”

 

“맞는데.”

 

“그러면 아저씨지. 뭘 그리 놀란 얼굴을 해요?”

 

“그런 논리면 너도 아줌마란 소리야?”

 

“저 어른 아닌데요.”

 

아저씨란 소리에 1차 충격.

 

이수아가 어른이 아니라는 소리에 2차 충격.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이수아는 누가봐도 성인처럼 보인다.

 

나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나보다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그러면 몇 살이란 거야?”

 

“19살. 고등학교 3학년.”

 

이제야 휴게실에서 듬성듬성 들린 소리가 조금 이해가 간다.

 

미성년자면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알바가 가능하다.

 

즉, 지금 이수아가 알바를 하려면 좀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어째서 사장님이 훈계만 하고 용서해줬는지 이해가 간다.

 

“미성년자한테 손대면 범죄인거 아시죠?”

 

“...진짜야?”

 

믿기지 않아서 확인겸 물었다.

 

이수아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내게 학생증을 내밀었다.

 

상암고등학교 3학년. 이수아.

 

믿을 수 없는 사실에 한숨만 나왔다.

 

“허어...”

 

나 혹시 미성년자를 어떻게 해보려는 쓰레기인가?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는 19살 짜리 여자애한테 돈을 들이미는 성인 남자.

 

“너네들 안 돌아가고 뭐하냐?”

 

하필이면 타이밍 안 좋게 사장님이 가게를 정리하고 나왔다.

 

그리고 돈 뭉치를 들고 있는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아니, 저 사장님...”

 

“유성아...그 돈은 뭐냐?”

 

어째 사장님이 나에게 향하는 눈빛이 평소와 같지 않다.

 

그 오해를 풀기위해서 최선을 다해 상황설명을 했다.

 

사람은 필사적이면 그 모습이 훤히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에도 사장님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그리고 날 지나쳐가면서 사장님이 작게 속삭였다.

 

“유성아, 아무리 여자를 만나고 싶어도 상대를 좀 가릴필요는 있다. 알겠어?”

 

“그런거 아닙니다. 오해에요.”

 

“그래. 주말은 푹 쉬고 다음주에 보자.”

 

이거 사장님의 착각을 바로잡으려면 다음에 또 설명해야지 싶다.

 

분명 내일은 기다리고 있던 주말이것만, 그다지 기쁘지가 않다.

 

역시 대학 수업과 알바를 병행은 심신을 지치게 한다.

 

이제는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을 따름이다.

 

가방을 뒤적여서 포스트잇에 대충 내 휴대폰 번호를 끄적였다.

 

“돈은 줄 테니까, 어디든 가서 자. 여기 혹시 뭐 필요하면 연락하고.”

 

“...이대로 가시게요?”

 

“그러면 여기 계속 있을까? 간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뭐가 됐든 필요하면 연락하겠지.

 

등을 돌려서 내 자취방이 기다리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시간은 이미 퇴근 시간을 넘어 새벽이다.

 

평소였으면 집에 도착해서 씻고 잘 준비를 할 시간이다.

 

떠들썩했던 불금의 밤거리도 이제는 그 소란스러움이 줄어들고 있다.

 

“잠깐만요!”

 

“?”

 

등 뒤에서 이수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뭐라도 놓고 온 건가?

 

“저 도와준다고 했죠? 지금 도와주세요.”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이수아의 얼굴을 보건데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온다.

 

돈은 이미 줬으니, 금전적 요구는 아닐거다.

 

“모텔 잡아주세요. 돈은 제가 줄게요.”

 

졸지에 고3 여자애랑 모텔에 가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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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상속에서 여자와 같이 모텔을 가면 떨려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올 것 같았다.

 

대체로 그 상상은 맞았다.

 

떨림의 의미가 조금 다를뿐.

 

번화가에서 불금에 공실인 모텔을 찾기란 조금 어렵다.

 

그래서 몇 번은 돌아다녀야 할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다.

 

다행히 처음으로 들어간 모텔에 공실이 있었다.

 

카운터에서 대금을 결제하고 카드키를 받았다.

 

위이잉.

 

모텔의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정받은 호실까지 올라갔다.

 

우리 둘은 그 동안에 아무 말도 없이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사실 이 쯤 되면 그냥 확인차 물어보는거지만.

 

“너 혹시 가출했냐?”

 

“그건 왜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건 도대체 누구에게 배운걸까.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는 이수아의 눈초리가 매섭다.

 

“내가 남의 가정사에 참견할건 아니지만, 집나오면 고생이거든.”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약 2년간 군생활을 하며 얼마나 집이 그리웠던가.

 

지금도 혼자 서울생활을 하면서 최대한 부모님에게 손을 안 벌리려고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담아서 한 말이었지만, 곧 바로 오지랖 부린걸 후회했다.

 

“아저씨가 뭔데 그런 말을 해요? 그 망할 집에 있을 바에 밖이 훨씬 나은데.”

 

이수아는 뭔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래서 함부로 남의 가정사를 들먹이면 안 되는건데.

 

가출한 것도 본인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가출 했을거다.

 

“...미안. 내가 괜한 말을 했네.”

 

“알았으면 됐어요. 이제 모텔 키 주고 얼른 집에 가서 잠이나 자세요.”

 

“그래, 너도 들어가서 씻고 자. 갈게.”

 

쾅.

 

이수아는 나에게 가라는 손 짓을 마지막으로 호실에 들어갔다.

 

“...이제 가야지.”

 

터덜터덜.

 

모텔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드문드문 빛나고 있는 번화가 거리를 지나서 자취방이 있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냐옹, 냐옹.

 

정말 오늘 하루는 사회에 나온 이래 역대급으로 지치는 날이었다.

 

당장에라도 집에 들어가서 씻지도 않고 쓰러지고 싶었다.

 

냐옹, 냐옹.

 

“너도 날 귀찮게 하는구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양이의 소리가 내 발목을 잡았다.

 

검은 색의 길고양이.

 

이름은 편의상 나비라고 붙여줬다.

 

“나비야, 다른 사람이 밥 안 주더냐?”

 

-냐옹.

 

“에휴.”

 

근처 편의점에 들려서 참치캔을 하나 사왔다.

 

캔을 따서 나비에게 건내주니, 잘 받아 먹는다.

 

난 조용히 바라보며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만히 쳐다봤다.

 

“...없어졌네.”

 

언제부터 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나비의 머리엔 어느 샌가 죽음을 알리는 숫자가 사라져 있었다.

 

즉, 누군가 개입을 한다면 충분히 살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마지막에 본 이수아의 숫자는 29였다.

 

하루가 지났으니, 숫자도 줄어든 것이다.

 

이 망할 능력만 아니었다면 별 다른 고민없이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갔을 거다.

 

“녀석, 참 잘먹네.”

 

나비는 처음 모습과는 완전 달라진 모습이다.

 

피골이 상접해서 삐쩍 말랐던 나비의 살이 몰라보게 많이 올랐다.

 

덕분에 예전보다 더 귀여워졌다.

 

나 말고도 누군가 밥을 주는 사람이 생긴 모양이다.

 

“오늘로 마지막이야. 이렇게 주는 것도. 알았지?”

 

냐옹.

 

나비가 죽지 않아도 돈 없는 가난한 대학생 신분이란건 변하지 않는다.

 

솔직히 참치캔 사는 것도 많이 고민했다.

 

분명 열심히 일을 했는데 통장에 돈이 줄어있는 이상현상 탓이다.

 

그러니까 이 호구같은 짓도 이수아의 머리위에 숫자만 없어지면 끝이다.

 

너무 김칫국인가?

 

나중에 이수아가 연락이라도 해야 뭘 할 수 있는 건덕지가 생긴다.

 

만약에 그녀 쪽에서 아무 소식도 없으면 그대로 끝이다.

 

마지막으로 나비를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간다. 잘 있어.”

 

이 인사를 끝으로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