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눈을 떠 보니 느닷없이 흰 방에 떨어져 있었다.

아니, 흰 방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분명 딛고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인지할 수 없고, 사방이 흰색 공간으로 칠해져 있음에도 벽은 느껴지지 않는다.

예전에 어디서 보기를, 흰색으로 가득 찬 방에 갇혀있으면 사람이 미친다고 하던데...

그러나 다행히 내가 미쳐버리진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안녕! 난 신이야!"

그 대신, 이게 어디 연재되는 웹소설이었다면 각혈하며 뒤로가기 버튼을 연타할 법한 대사를 치는 꼬맹이의 등장에 사실은 이미 내가 미친 상태는 아닐까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했다.

"꼬맹이라니! 신 앞에서 너무 무례한 거 아냐?"

내가 이 공간에 느닷없이 떨어진 것처럼, 느닷없이 나타난 꼬맹이 하나.

제법 귀엽게 생기기는 했다만, 꼬맹이는 질색이었다.

"이래봬도 너보다 19793살은 더 많거든?"

게다가 묘하게 디테일한 숫자도 기분 나쁘네...

그나저나 이 녀석, 아까부터 계속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거 같은데?

"맞아! 난 전지전능한 신이거든!"

...그러니까 그 컨셉은 이미 10~20년 전 양판소 이고깽물에서나 써먹던 한참 철 지난 컨셉이래도?

"아무튼! 너는 이 차원의 틈새에 떨어진 1000번째 사람이야! 999도 아니고, 1001도 아닌 정확히 1000번째!"

그러나 내 딴지에도 불구하고 꼬맹이는 컨셉을 계속 유지하려는 모양인지 주절주절 한참을 떠들어댔다.

"사실 너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거든."

아니었다는 말인즉슨,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 본래 화나야 될 타이밍이었지만, 너무 대놓고 클리셰대로라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서... 너를 다른 차원에 전생시킬 생각이야! 당연히 이세계 전생 특전을 줘야겠지? 보통 특전은 하나만 주는게 규칙이지만... 너는 원래 죽을 운명도 아니었고, 마침 1000번째 영혼이기도 하니까... 이것저것 다 주도록 할게!"

꼬맹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천무지체랑... 무한 도서관이랑... 말은 통해야 할 테니 이세계 외교관도 줘야겠고… 이것도, 이것도..."

저 쪼만한 주머니에서 뭐가 그리 많이 나오는지, 바닥에 쌓인 책자 더미가 이미 꼬맹이 녀석의 키는 훌쩍 넘길 정도로 쌓였다. 물리적으로 말이 안되는 상황.

하지만 내가 의문을 가질 여유도 없이 꼬맹이는 바닥에 쌓여있던 것들을 한아름 집어들더니, 그대로 내 입에 쳐박았다.

"읍읍!?"

호흡을 할 수 없어 정신이 흐려지는 가운데, 녀석은 겨우 붙들고 있던 내 정신에 막타를 때렸다.

"에잇, 대출혈 서비스다! 마지막으로 이것도 챙겨줄게!"

기절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녀석이 내 입에 쳐박던 책자에는 경국지색이라 쓰여있었다.




*  *  *




이세계에 떨어진 지 벌써 1년. 처음 몇 달은 고생이란 고생을 다 했지만, 이제는 나름 적응하고 자리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응하고 자리잡았다는 말이, 고생을 안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성의 북문을 나서면 바로 인근에 위치한 북쪽 숲.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숲이라 이름도 그냥 ‘북쪽 숲’이다. 북쪽에 있으니까 북쪽 숲.

그리고 나는 지금 북쪽 숲에서 일생일대의 적수를 마주하고 있었다.

잠깐의 긴장이라도 풀었다간 그대로 당할만큼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대, 슬라임을 향해 창(槍)을 겨누고 있었다.

신이라는 작자한테 잔뜩 치트를 받아놓고 왜 고작 슬라임을 상대로 지랄하고 있냐고?



씨발.

그래, 씨발이다. 자칭 신이라던 꼬맹이 녀석은 내가 전생자 특전이라 하면서 뭔가 한가득 주었다.

그중에는 천무지체라는 것도 있었고, 무한의 도서관이라는 것도 있었다. 각각 무(武)와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준다는 점에서 확실히 개사기 특전이라 부를만했다. 그 외에도 기타등등 여러가지 다양한 능력을 받았다.

실제로 덕분에 나는 검 한번 잡아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세계에 떨어지자마자 검기, 혹은 오러라 불리는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한번도 배워본 적 없던 마법 주문 또한 무한의 도서관을 통해 사용할 수 있었다.

뭐… 내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무슨 이고깽 소설처럼 날뛸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별개로 자신은 있었다. 이 세계에서 부족하지 않게 먹고살 수 있겠다는 자신이.

하지만 그런 내 자신감은 고작 하루도 채 안돼서 꺾이고 말았다.

후욱-!

그 사이, 슬라임의 빈틈(슬라임에게 빈틈이란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을 발견한 나는 곧장 녀석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흔히 많은 창작물에서 점액질로 이루어진 슬라임은 냉병기에 강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리고 이 세계의 슬라임 또한 비슷하다.

다만 원래 알던 슬라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깡!

슬라임을 찌른 내 창은 단단한 쇳소리를 내며 튕겨나왔다. 천무지체라는 개사기 특전의 묘리가 담긴 회심의 찌르기였는데, 고작 슬라임 한 마리를 뚫지 못하고 튕겨나온 것이다.

씨발, 이러니 욕이 안나오게 생겼냐고.

무슨 슬라임 주제에 금강불괴가 패시브인데?

아니. 슬라임 뿐만이 아니다. 저번에 만난 고블린은 ‘고륵고륵.’ 거리면서 제대로 말도 못하는 주제에, 이형환위를 쓰고 있더라. 그때 녀석의 몽둥이에 쳐맞은 뒷통수가 아직도 얼얼하다. 그땐 진짜 뒤지는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여기 북쪽 숲이 무슨 마경이라서 이딴 녀석들이 있는 게 아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숲은 도시에서 가장 가깝고 별다른 특징도 없어 이름조차 ‘북쪽 숲’이라고 대충 지을만큼 평범하기 그지없는 숲에 불과하다.

이상한 건 바로 이 세계.

신이라던 녀석이 나를 날려보낸 이 세계는 온갖 초월자들이 살고있는 초월계(超越界) , 혹은 상계(上界)라고 불리는 세계였다. 수십, 수백의 하위 차원에서, 말 그대로 초월하여 등선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내가 고작 신체를 강화해서 뛰어다니고 있을 때, 이 세계 무인들은 죄다 어검비행으로 날아다녔다. 심지어 마법쓰는 새끼들은 아예 텔레포트 마법으로 공간이동 하는 게 일상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도 존재하는 몬스터 또한 예외는 아니여서,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잡몹중의 잡몹인 슬라임조차 금강불괴를 사용하고 고블린은 이형환휘를 사용한다.

이러니 내가 욕이 안나오겠냐고.

쉽게 비유하자면 레벨 200짜리 고인물 서버에 이제 막 캐릭터 생성한 뉴비를 던져놓은 셈이다. 그러니 아무리 축캐면 뭐하겠는가…

실상이 이렇다보니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지고 몇 달은 정말 고생이란 고생은 죽어라 했다. 잡몹인 슬라임만도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잡일로는 벌이가 한정적이었고, 제대로 된 의식주는 꿈도 꾸지 못했다.

본래 클리셰 대로라면 개사기여야 할 전생자 특전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것이다.







사실 그나마 도움이 된 특전이 하나 있긴 하다.

그 얘기를 하자면…



개씨발.

그래. 개씨발이다. 녀석이 내게 전생자 특전이라며 이것저것 쳐먹이다가 마지막에 막타를 쳤던 그것.

‘경국지색’

나라를 기울게 하는 미녀, 라는 고사성어.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미녀’라는 부분이다. 하루아침에 남자에서 여자가 되었으니 욕이 안나오고 배기겠냐고. 차라리 군대 가기 전에 좀 바꿔주던가…

경국지색이라는 특전은 그 이름에 걸맞게 내 몸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은 쓸데없이 윤기가 흐르며 찰랑거리고, 얼굴은 쪼만한 주제에 그 안에 이목구비는 오밀조밀 용케 자리잡고 있더라. 그 외에도 가슴이 어쩌니 골반이 어쩌니 하는 것까지 내 입으로 말하자면 멘탈이 나갈 것 같으니 이만 넘어가도록 하자.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이 특전은 내가 이 세계에 자리잡게 큰 도움을 주었다.

딱히 원하지 않았지만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악질이었다.

콰직-

잡념이 들어간 탓일까. 슬라임을 향해 내지르던 창이 녀석의 금강불괴를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부러져버렸다. 결국 오늘도 사냥은 실패한 셈.

내 일생일대의 적수인 슬라임에게 경의를 표하며 물러났다. 다행히 슬라임은 공격성향이 적어서, 내가 물러나면 녀석들도 더 공격해오지 않는다.

부러진 창은 고쳐서 다시 써야 하므로 버리지 않고 챙겨서 돌아왔다. 성문을 지날 때 경비병이 아는척 말을 걸어왔다. 슬라임이라는 강적을 쓰러트린다는 목적 아래 매일같이 북쪽 성문에 출근도장을 찍다보니, 이미 경비병들 중에 내 얼굴을 모르는 녀석은 없었다.

덕분에 검문도 없이 프리패스로 통과하니까 좋긴 하다만, 괜히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서 마냥 좋아하기도 그랬다.

경비병이라고 해도 어쨌든 나보다는 훨씬 강자인 놈들이니까.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대적인 금강불괴 슬라임도 이놈들 앞에선 잡몹일 뿐이다. 그런 슬라임조차 못이기는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튼 여기까지가 내 하루 일과 중 자기개발에 해당하는 시간.

이제는 일하러 갈 시간이다. 먹고 살려면 일해야지…

내가 일하는 가게는 도시 중앙에서는 제법 외진, 북쪽 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모든 부동산이 그렇듯 핫플레일수록 땅값이 비싸다는 이유도 있지만, 아무래도 가게가 가게인지라…

짤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소 촌스러운 종소리가 울렸다. 잔에 묻어있는 먼지를 닦으며 한참 오픈 준비를 하고있던 마담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걸어왔다.

“우리 예쁜이, 오늘도 일찍 출근했네?”

“그놈의 예쁜이란 소리 좀 하지 말라니까 자꾸 그러네.”

“우리 가게 매출을 책임져주는 에이스인데, 예쁘게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니?”

“자꾸 그렇게 부르면 나도 마담이 아니라 아줌…”

쌔액-

날카로운 무언가가 내 옆으로 쌩하니 지나갔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한박자 늦게 고개를 돌리니, 잔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던 천조각이 빳빳하게 벽에 꽂혀 있었다.

…천조각 따위가 어떻게 돌벽에 꽂힐 수 있는지는 넘어가도록 하자.

“다시 한번 얘기해보지 않으련?”

굳어버린 몸으로 애써 고개를 돌려 바라본 마담의 얼굴은 분명 환하게 웃고 있는데, 그녀 뒤로  무시할 수 없는 아우라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가시화된 아우라가 일렁거린다고!!!

“아하하… 마담도 오늘 참 아름답다고 말하려 했습니다! 절대! 절대, 절대! 그 불경한 단어를 입에 담으려 한 적은 없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납작 엎드리는 것뿐.

“…그 미모로 추하게 엎드린 모습을 보자니 그냥 기가 막히네.”

나는 실제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반쯤 절하고 있었다. 어차피 가게 바닥은 매일 청소하니까 별로 더럽지도 않다. 그깟 먼지가 조금 묻는 것보단 내 목숨이 더 귀하다.

“나도 농담이었으니 얼른 일어나렴. 괜히 손님이 들어와서 그 모습 볼까봐 두렵다, 얘.”

그제서야 마담의 뒤로 일렁거리던 아우라가 다시금 가라앉았다. 말로는 농담이라고는 하지만, 신에게 받은 특전 중 하나인 ‘전직 암살자의 감’은 그녀의 살기가 진심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저번에 왔던 그 깜둥이 계집애, 오늘도 지명했더라. 하여간 우리 예쁜이, 인기 좋아?”

깜둥이라면… 자칭 천마라고 주장하던 그 망상증 환자를 말하는 건가? 자주 지목해줘서 기억에 남아있는 손님 중 한명이다.

나는 마담에게 알았다고 손을 흔들며 뒤로한 채 2층의 내 방으로 올라갔다.

묘하게 기분나쁜 핑크빛 조명이 방 안을 가득 비추고, 어울리지도 않게 피워둔 향초의 향기가 코끝에 아른거리는, 쓸데없이 넓은 욕실과 상당히 고급으로 보이는 침대를 제외하면 별다른 가구조차 없는 방 한 칸이 내게 주어진 일터.

나는... 이세계 창녀(娼女)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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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떠올라서, 전작 처음 연재할 때처럼 혼자 신나서 썼네요.


앞의 도입부분은 문득 예전 조아라 시절이 떠올라서 반쯤 장난삼아 써 본 도입부입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연재하게 되면 아마 좀 더 접근성 좋게 수정할듯 싶네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히로인 중 한명은 찐따천마입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