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의의 난


국왕파-태종태상왕파-태조
조선국왕 이방원
동북면•강원•충청•경상•전라도 도통사 조영무
서북면 도절제사 이빈
안주도 도절제사 이천우
동북면•강원도 도안무사 김영렬
동북면 도순문사 유량
중군 도총제 이귀철
동북면 지병마사 한흥보
좌군 동지총제 이화영
전의감 정 김옥겸
지문주사 박숙의
우군 총제 강사덕
중군 총제 한규
우군 동지총제 연사종
안변 도호부사 유귀덕
상호군 김계지
좌도 도병마사 민무질
풍해도 절제사 신극례
수성 도통사 민제
수성 도진무 권화
곡산등처 지병마사 김남두
지은주사 송전
대장군 김우
상호군 심귀령
경기우도 첨절제사 이순
이조 의랑 최사위
이성 도병마사 최운해
중추원 부사 조화
총제 이밀
전 전서 조중생
회양 부사 김정준
경기좌우도 절제사 권충
강원도 병마사 구성량
도총제 곽충보
서북면 도순문사 김희선
그 외 주군의 수령들 및 장수들
조선국 태상왕 이성계
안변 대도호부 부사 조사의
영흥부 소윤 김권
문주 목사 박양
영풍 군수 한방
절제사 김을보
안변 군관 엄인평
도진무 임순례
직책불명 황사란
직책불명 손효종
직책불명 강현
장군 조홍
정주 목사 박관
지의주사 황길지
판승녕부사 정용수
한성 윤 신효창
장군 이자분
직책불명 한정
도진무 박문숭
직책불명 문중첨
진양 대도호부 관리
곡산부 관리
직책불명 홍순
직책불명 김자량
직책불명 김승
직책불명 임서균
직책불명 박휘
직책불명 진중거
직책불명 노언
직책불명 이지기
직책불명 박산보
직책불명 변현
함주 목사 최식
직책불명 배홍점
직책불명 이양간
직책불명 김영귀
직책불명 김온
그 외 주군의 수령들 및 장수들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1일

태상왕의 어가가 동북면으로 떠났다.


태상왕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떠나고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5일

안변 부사 조사의 등이 군병을 일으키고 주군에 사람을 보내 병사를 징발하였다. 대호군 안우세가 마침 동북면에서 돌아와 급히 역마를 타고 와서 그 사유를 보고하였다. 조사의는 곧 현비 강씨의 족속으로 강씨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었다.


며칠 뒤에 조사의 등이 반란을 일으킴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7일

김여생과 승려 묘봉을 처형하고 승려 성총에게 장 100대를 쳤다.
처음에 묘봉이 김여생을 업고 경기좌도 승령현의 민가에 이르렀는데 그 집에 딸이 있었다. 묘봉이 김여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분이 상왕-정종인데 장차 복위하실 터이니 의당 사위를 삼아야 할 것이다.”
하니, 그 집 사람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 무슨 말입니까. 이 무슨 말입니까.”
하였다. 묘봉이 말하기를,
“상왕은 존귀하여 걸어 다닐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업은 것이다.”
하였다. 또 그 고을의 장군사에 도착하니, 절의 승려가 그를 속여 말하기를,
“오늘 여러 왕이 이 절에서 승재를 행한다.”
하니, 김여생이 말하기를,
“내 조카아이들이 어째서 이 절에 오는가?”
하였다. 성총은 회안공-이방간이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로 들어갔다는 허튼소리를 하였다. 승령현의 수령이 이를 듣고 잡아다 사헌부로 보냈다.


이틀 뒤에는 상왕이 머지않아 복위하고 이방간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갔다는 소리를 하며 사칭극을 벌인 일당이 잡히기도 했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8일

상호군 박순을 동북면에 보냈는데 저들의 군중에게 피살되었다.
박순이 함주에 도착하여 도순문사 박만과 주군의 수령에게 조사의를 따르지 말게 하다가 마침내 저들의 군중에게 피살된 것이다.


그 뒤로 동북면에 보낸 사신이 주군의 수령들에게 조사의를 따르지 말라고 하다가 그들 세력에게 피살당했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11일

호군 김옥겸이 동북면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김옥겸을 동북면에 보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돌아와서 아뢰기를,
“처음에 안변에 이르러 부사 조사의를 만나 보았는데 조사의가 흘겨보며 예를 차리지 않고 사람을 시켜 신의 칼과 마패를 빼앗게 하였습니다. 
신이 은밀하게 움직여 문주에 이르렀는데, 박양이 문주에 들어가 병사를 징발한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 박양을 만나 보니, 역시 흘겨보며 말을 나누지 않고 그저 징발하는 문서에 서명하고만 있었습니다. 
영흥부에 이르러 부윤 박만을 만났는데, 박만이 울면서 ‘내가 처음에 조사의가 보낸 군사 징발 문서를 보고 사람을 보내서 아뢰었고, 또 갑옷과 병장기를 실어 보내라는 문서를 보고 사람을 보내 아뢰었는데, 그대는 그것을 보았는가?’라고 하기에 제가 보지 못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박만이 ‘그 사람들이 필시 붙잡혔을 터이니 내가 위험할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박만이 또 ‘내가 처음에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장수가 되어서는 변경의 진영을 가볍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대는 샛길을 따라 돌아가 주상께 아뢰어야 한다. 그대가 만일 붙잡힌다면 그대와 나는 해를 당할 것이다.’ 하고 이어 칼과 상등의 말을 주었습니다. 
출발하여 영풍에 이르러 길에서 한방을 만났는데 한방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지나갔습니다. 신이 영풍의 촌가에 이르러 유숙하였는데 한방이 사람을 시켜 촌가에 쫓아와 신의 손을 묶어 방에 가두고 10여 인이 지키게 하였습니다. 밤이 깊어 지키는 자들이 곤히 잠들었기에 몰래 도망해 나왔는데, 지키던 자들이 잠에서 깨어 고산까지 추격했지만 신은 산으로 올라가 숨어서 도망쳐 왔습니다.”
하였다.


호군 송류가 명을 받고 함주에 갔다가 역시 저쪽 군사에게 피살되었다.


그 뒤로도 사신들이 군사를 징발하는 동북면 관리들을 볼 수 있었고, 이들은 사신들을 죽이려 했고 일부는 살해되었음. 여기서 특이한 점은 반란군을 보통 흉적, 반적 등의 멸칭을 붙이는데 이 조사의 세력은 단지 저쪽 군사라고 불렀을 뿐임. 여기서 태상왕 이성계의 병력을 차마 흉적이라고 붙일 수 없었던 사정을 엿볼 수 있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16일

상호군 김계지가 안변에서 돌아왔다.
김계지가 아뢰었다.
“처음에 신이 기사 9인을 이끌고 회양에 도착해서 기사 10인을 얻었고, 철령의 구자에 이르러 지키는 자 2인의 목을 베었으며, 가다가 여러 군에 군량과 마초를 준비하도록 독려하던 김을보라는 자를 만나 머리를 베어 내걸었습니다. 안변에 이르러 엄인평이라는 자가 군사를 뽑고 있기에 머리를 베어 관문에 내걸고 즉시 달려 돌아왔습니다.”


그 뒤에 파견된 사신들은 아예 반란군에 합류한 관리들을 죽이고 돌아오기까지 함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18일

태상왕의 어가가 서북면의 고맹주로 향하였다.


이러던 중 태상왕 이성계가 서북면으로 향하자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19일

이천우가 기병 100여 명을 고맹주로 보냈는데 조사의의 군병에게 붙잡혔다.


도절제사 이천우가 기병 100여 명을 태상왕이 있는 곳으로 보냈는데 조사의군이 이를 사로잡았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0일

이천우가 고맹주의 애전에서 조사의의 군병과 싸웠지만 패하였다.
이천우는 포위를 당하자 아들 이밀 등 10여 명의 기병과 함께 힘써 싸워 포위를 무너뜨리고 탈출하였다.


그 뒤 이천우는 계속 싸웠지만 결국 패하였고, 아들을 포함해 소수의 기병을 데리고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1일

주상이 경성을 출발하여 금교역의 북교에 머물렀다.
민제, 성석린, 우인열, 최유경 등에게 명하여 경성에 남아 지키게 하였다.


일이 심각해지자 조선국왕 이방원은 직접 경성을 떠났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2일

어가가 원중포에 머물렀다.


태종은 원중포에 이르렀고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5일

지은주사 송전이 도망쳐 왔다.
송전이 아뢰었다.
“이천우가 싸움에서 패하고 신은 저들의 군중에 잡혔는데, 도진무 임순례가 신을 시켜 군량을 나누어 주게 하며, ‘군사의 수가 6, 7천 인인데 올량합이 오면 1만 명은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몰래 도망쳐 왔는데 길에서 그 군사를 보니 혹은 40명, 혹은 30명, 혹은 20명씩 무리를 지어 도망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6, 7천명에 달하는 조사의군 내에서 도망하는 자가 많아졌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6일

주상이 원중포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태종이 원중포에서 돌아오니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7일

조사의의 군대가 안주에 이르러 밤에 궤멸되었다.
조사의의 군대는 살수 주변에 주둔했는데 밤에 저절로 궤멸되어 물을 건너다 얼음이 꺼져 죽은 자가 수백여 인이었다. 처음에 김천우라는 자가 조사의의 군사에게 붙잡혔는데 그 군사가 아군의 군사 수를 묻자 김천우가 말하기를,
“조영무는 동북면으로 향하였고 이천우, 이빈, 김영렬, 최운해 등은 맹주에 이르렀으며 또 황주와 봉주 사이에서 군사 4만여 인이 나왔는데 그대들이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였다. 군사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두려워하여 얼굴색이 변하였다. 조화가 군중이 저절로 흩어지게 하려고 계책을 세워 밤에 그 막사에 불을 지르고 크게 소리치니 군사들이 모두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조사의 세력은 순식간에 무너졌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1월 28일

연산 부사 우박에게 사복시의 말 1필을 내려 주었다. 우박이 역마를 타고 와서 태상왕이 어가를 돌렸다고 보고하자, 주상이 기뻐서 내려 준 것이다.


그리고 태상왕 이성계는 어가를 돌리게 되었음

딱봐도 이상해 보이는 전개인데 이성계가 주도한 난을 어떻게든 돌리려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 같음


태종 2년 임오-1402년 12월 2일

대간이 합동으로 상소하여 시무 몇 조항을 올렸다. 그 내용에...

1. 동북면의 함주 등 지역에 가별치라고 부르는 자들이 모여서 한 무리가 되어 국역의 의무를 바치지 않고, 별도로 가병을 만들어 사사로이 서로 결탁해서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고 있는데 주군에서 막지 못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적신 조사의 등이 변란을 꾀하던 초기에 오로지 이 무리를 의지하여 원조 세력으로 삼고 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사직을 거의 위태롭게 하였으니, 만일 혁파하여 없애지 않는다면 다시 이와 같은 변이 있을까 걱정됩니다. 하나같이 모두 혁파하여 없애고 국역의 의무를 바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고, 회안군을 옮겨 안치하는 일만 윤허하지 않았다.


난이 진압되자마자 이성계가 거느린 사병집단인 가별초를 혁파하라는 상소가 올라와서 윤허하고


태종 2년 임오-1402년 12월 3일

정용수와 신효창을 순위부에 내렸다.
정용수와 신효창은 승녕부의 당상관으로서 태상왕의 행차를 호종하였는데, 동북면에 이르러 조사의의 모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태상왕 이성계의 행차를 호종한 당상관들이 조사의의 난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바로 나오는 것으로 이를 알 수 있음


이처럼 반란이지만 주도자가 국왕의 아버지인 태상왕이자 창업군주인 이성계였던만큼 기록을 남기는데 신중했던 것 같음


조선 초에 일어난 부자관계인 두 왕들의 전쟁은 싱겁게 끝나버렸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다행인 것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