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https://arca.live/b/regrets/104361774 (전편링크)


*


-카일을 제거하라


"닥쳐..."


-세상의 섭리를 비튼 죄인을 단죄하라


"닥치라고!!!!!"


증오스러웠다.


일평생 내 힘이 되어주고,내가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게 해 준 별의 목소리가 너무나 증오스러웠다.


-운명을 거스른 죄인을 처단하라


"운명.운명.그놈의 운명 때문에!!!!!!"


운명.


그때도 저놈은 운명을 운운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저 별이 내게 그리 속삭이지만 않았더라면 카일이 그렇게 되지도 않았을건데.


피어오르는 분노 사이로 한 장면이 일렁였다.


내가 가장 후회하고,또 후회하는 그날의 장면이.


*


별에게 축복받은 아이,스텔라(stellar ).


세상의 섭리를 관장하는 별의 힘을 타고난 사람들.


내가 열네살이 되던 해에 별의 축복은 나에게 와닿았고, 나는 별의 눈과 귀를 빌려 미래를 내다 볼 수 있었다.


행복했다.


공작가라는 신분과 다정한 부모님, 사랑스런 동생까지.


이미 분에 넘칠 정도의 행복을 손에 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스텔라로 선택받기까지 했으니 정말로 행복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억...허억..."


물론, 그 기분이 깨어지는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스텔라로 선택되고 처음 보았던 미래는


아버지....제발 일어나봐요....제발....


가주님이 돌아가시다니.....이 무슨....


전사한 아버지의 시체를 붙들고 울음을 터트리는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아."


받아들이기 싫은 미래 앞에서 머리는 전에 없던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별이 보여준 장면에 나온 나와 가족들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것은 그리 먼 미래가 아니다.


아버지는 공국과의 전쟁에서 제국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어 곧 있으면 전장으로 나가신다.


....이번 전쟁에서 아버지는 죽는다.


그런 결론이 난 순간,나는 곧장 가주실로 달려가 울며불며 아버지께 매달렸다.


제발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그러면 죽는다고.


"린? 그게 갑자기 무슨 얘기니?"


"그,그게...."


울먹거리며 늘어놓은 장황한 설명을 용케도 이해한 아버지는 씨익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랬구나. 그런 경험은 처음이니까 무서웠을텐데, 장하다.우리딸."


"그,훌쩍.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냥-!"


"린. 하지만 나는 전쟁에 나가야 한단다."


"왜.왜요?!! 죽는다니까요!!! 아버지는 죽는게 두렵지도 않으세요?!"


"두렵지. 나도 전쟁은 항상 두려워. 그런데, 최전선의 병사들은? 적군을 맞아 싸우는 기사들은? 그들 모두가 두려움에 떨면서도 나라를 위해 무기를 드는데, 내가 어떻게 죽음이 두렵다고 집 안에 숨어있겠니."


담담한 아버지에 태도에 역으로 공포가 더해져버린 나는 무어라 항변하기 위해 입을 열었고-


"그리고, 나는 정해진 운명을 믿지 않는단다."


내 생에 보았던, 가장 멋진 미소를 지은 아버지의 모습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별이 보여주는 미래는 그저 가능성일 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나 자신이니까, 내가 쌓아올린 것들을 믿고 앞으로 향하는거야."


"......"


꺾을 수 없다.


저 굳은 의지는, 꺾으려 든다 해서 꺾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꼭 살아 돌아오셔야 해요.약속이에요."


그렇기에, 나는 아버지의 의지를 믿어보기로 했다.


"하하.그래. 약속이다. 새끼손가락도 걸까?"


너무나 자신감이 넘치는 그 모습에, 나는 무심코 이런 아버지가 죽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 버렸다.


-헛되다



자신만만하게 출정을 나간 아버지는,싸늘한 시체로 돌아왔다.


"군이 퇴각할 시간을 벌어주시기 위해 밀려드는 공국의 본대를 홀로 막아시다가 그만..."


적 사이에 고립된 선두가 퇴각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했다.


"...거짓말쟁이."


끝까지 검을 휘두르다 떨어진 손가락 사이에는,새끼손가락도 섞여있었다.



그날이후로, 나는 별의 이야기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

 아버지의 전사 이후, 나는 가주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된 나를 무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1년정도 지나자 그런 사람들은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미래를 본다는 것은, 남들보다 더욱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강해져야 한다."


서류를 들여다 보던 중 무심코 튀어나온 한마디를 입안에서 굴렸다.


강해져야 한다.


그 누구도 감히 에카르트 공작가를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다시는 그 누구도 잃지 않을거다.다시는.


-똑똑


"들어와."


"가주님.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뭔데?"


"카일 도련님이 또 자신도 마수 퇴치에 손을 보태게 해 달라고 조르셔서....기사단장이 만류하곤 있으니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으시더군요."


"하아....연무장이지? 가봐야겠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고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전사하시고 5년.


그간 카일은 언젠가는 아버지같은 무인이 되겠다고 죽어라 검을 휘두르며 스스로를 갈고닦았다. 하지만...


'재능이 없었지.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제국 제일검이라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능이 없었다.


지금 저 상태로 전선에 내보냈다가는 절대 몸 성히 돌아올 수는 없을 정도로.


그럼에도 아버지의 정의감이랑 의지는 완전히 빼다박아서 한번씩 전선에 보내달라 고집을 피우는데...그때마다 설득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이번에도 그럴 걸 생각하면 벌써 머리가 아파왔다.


"아,누님!!"


연무장에 들어서자 마자 눈을 빛내며 내게 달려오는 카일을 보니, 참지 못하고 그만 웃음이 튀어나왔다.


"프흐.그래. 카일. 듣자하니 또 전선에 내보내 달라고 했다면서?"


"네! 그간 저도 열심히 단련했고, 진짜 전투도 아닌 마물 토벌인데다가 기사단장도 같이 가잖아요! 이정도면 충분히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서 저도 데려가 달라고 했어요."


"그게 말이지,카일."


이번엔 또 어떤 말로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점, 카일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누님. 누님의 눈엔 제가 언제까지 어린아이겠지만, 그동안 저도 클만큼 컸어요. 제가 할 수 있는것과 할 수 없는것 정도는 구분할 나이가 됐고요."


그리 말한 카일은 내게 미소지어보였다.


-쿵


언젠가 본 적 있는 미소였다. 마치..


"저는 사지에 뛰어들만큼 멍청하진 않아요. 몸 성히 돌아올 테니까, 이번 한번만 허락해 주시면 안될까요?"


...전장에 나가기 전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미소와 똑 닮은, 멋드러진 미소였다.


-전쟁은 그 아이를 죽일것이다.


그순간, 별이 내 귀에 속삭이는 동시에 눈앞의 카일에게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미래의 카일이 겹쳐보였다.


"윽."


그때와도 같은, 아니.그때보다 더 선명한 미래가 보인다.


-그게, 그 아이의 운명이니라


운명.


어떻게든 뒤틀 가능성이라도 있는 단순한 미래가 아닌, 세계가 정해놓은 거대한 흐름.


....아버지와 같았다.


지금 카일을 전장으로 보내면,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리라.


'안돼.'


더이상 누군가를 잃는 경험을 하긴 싫었다.


내게 둘 밖에 남지 않은 가족이, 사랑하는 동생이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죽는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때는 말릴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제지하고 말겠다.


...설령, 그게 저 아이의 꿈을 꺾어버리게 된다 하여도.


"누,누님? 괜찮으세요?"


"카일."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는 나를 걱정하던 카일에게, 전에 없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출전은 허락해 줄 수 없어. 네 방으로 돌아가."


"하지만-"


"카일 폰 에카르트. 가주의 말을 거역할 셈이냐?"


"누,누님...?"


"더이상 네 어리광에 어울려 주는것도 지쳤다. 순순히 말 들어."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카일은 제 뜻을 굽히지 않을 거다. 그러니...지금은 강하게 나가야 한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이며 카일을 몰아붙였다.


"....예.누님.죄송합니다."


.......자신의 꿈이 꺾이는 것은 참을 수 없게 아프겠지만, 그래도 죽는 것 보다는 나았다.


꺾여버린 심지는 어떻게든 다시 불이 붙을 수 있지만, 다 타버린 심지는 그럴 수 없다.


언젠가 카일이 나를 원망하게 된다 해도....괜찮다.


그 아이의 죽음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 보다는 나았으니.


*

"이 빡대가리 년...."


과거의 기억을 헤집을수록 자학의 감정이 들끓어 올랐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별이 그렇게 말했으니 분명 그럴 거라는 광신을 품은 채 카일을 난도질했다.


다 카일을 위한 거라고 자위하며 카일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내가 카일에게 남긴 상처는 곪아 카일을 병들게 했고, 끝내 카일을 그저 나아가기만 할 뿐인 광인으로 만들었으니, 내가 그 아이를 망가트린 것이다.


내 손으로 카일을,내 동생을.....


"가주님!!!"


"..무슨 일이지 집사장? 노크도 생략하고."


"카일 도련님을 찾기 위해 보냈던 병력 중 일부가 도련님과 조우했다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당장 말해보도록.빨리!"


가슴이 뛰었다.


카일이 돌아 올 수도 있다.


내가 저지른 죄를 천분의 일,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


"..조우한 병력 전원 도련님께 제압당해 돌아왔습니다. 기사단장까지 포함된 정예 병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채 3합을 견디지 못했다 합니다."


"......"


그래. 내가 저지른 과오가 그렇게 쉽게 해결되리라 믿는 것도 잘못된 일이기는 하지.


찬찬히 생각해보면 나쁜 일은 아니다.


카일은 언제나 도보로 이동해 그 속도가 빠르지 않았으니, 카일과 조우한 곳 주변을 수색하면 찾을 수 있겠지.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가야겠다.


직접 그 아이 앞에 무릎꿇고 내 죄를 빌어야 한다.


그러니-


"그리고, 유스티아 후작가에서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후작 영애의 편지 인데....도련님이 돌아왔다는게 사실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후우."


정리되는 듯 싶던 머리속이 순식간에 다시 복잡해졌다.


이사벨 유스티아.


유스티아 후작의 하나뿐인 딸이자.....카일의 전 약혼녀.


그녀도 카일에게 큰 상처를 줬던 걸로 알고있다.


감히 내가 카일 대신 죄를 물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히 대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한껏 헝클어진 머리가 점점 아파왔다.


"카일...."


그럴 자격이 없는 건 알지만,오늘따라 더 보고싶다.


*

"......"


검을 들었던 손이 아직도 저릿저릿하다.


내게 호의를 가진 이들에게 검을 휘두르는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검집 채로 휘두르기도 했고, 제압만 한 채로 돌려보냈으니 별 다른 일은 없겠지만...그래도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아버지."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나처럼 이럴 필요도 없었으려나.


내가 기억하는 가장 뛰어난 영웅은 고작 이정도 일에 고뇌할 만큼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밀어붙이고, 어떻게든 책임을 졌겠지.


나깉은 건 감히 꿈꾸지도 못할 만큼 위대한 이였으니, 내가 처한 상황에서도 별 어려움 없이 벗어났을 겄이다.


"....쯧.움직여야지."


잡생각이 많아지면 칼 끝이 흔들린다. 무인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잡생각을 털어버리려 걸음을 재촉했다.


가만히 서 있어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난 삶을 통해 뼈져리게 체감한 교훈을 다시 곱씹으며 발을 내딛었다.


가문의 기사들과 만나고, 누님과 라니아를 만나며 떠오른 과거는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다.


더이상 도태되어 가는 감각을 느끼긴 싫었다.


살아있음에도 살아있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저벅저벅


걷는것에 온전히 집중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은 못 되었기에,앞으로 나아갈 적에는 이 모든 일을 잊을 수 있었다.


나아가면 살아있을 수 있다.


멈추면 도태되고 죽는다.


그 명쾌한 흑백논리를 움켜쥐고 나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계속 나아가고 있으니,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으니,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죽지 않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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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쁘다고 한지 이틀도 안되서 오려니까 좀 쪽팔리기는 한데.....창작욕이 끓어올라서 짬짬히 시간 날때마다 써서 가져옴


급하게 쓴거라 이상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