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pinterest.co.kr/pin/914862419271703/sent/?invite_code=07fd9deb2e244790bebd486b024e49be&sender=855754504103180997&sfo=1

 

 

[“누구도 자신의 사건에 재판관이 되지 못한다.”]

 

 

재앙은 막아졌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완벽히 수행했다.


그 누구에게도 비밀을 발설하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투명하게 행동했으며, 그 누구보다 위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온전히 버텼다.

 

고진감래.

 

고생의 끝에는 복이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행동은 그 ‘고생’에 걸맞았다.

그 누구보다 헌신적이고, 그 누구보다 정의로웠고, 그 누구보다 굳건했으니까.

 

하지만 세계는 그녀의 노고를 기억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아닌 다른 ‘그녀’의 노고만을 기억했다고 해야할까.

 

그 노고는 현재를 살아가는 푸리나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겐 찝찝한 결말과, 앞으로 펼쳐질 불투명한 운명의 굴레뿐만이 남았다.

 

이것들은 고생 끝에 찾아온 달콤함이나 보상따위 같은 것이 아니었다.

따지자면 벌. 그리고 죄에 가까운 징벌형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에피클레스 오페라하우스의 꼭대기층에 올라가, 

시민들을 심판하는 느비예트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시민들을 내려다 보았었다.

 

전지전능한 신이 된듯한 압도적인 고양감.

그러나 그녀는 그런 감정따위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좀더 근본적인 무언가.

 

자신이 자신으로 있을 이치의 증거.

 

방황은 그녀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것이자, 꼭 해야할 하나의 ‘절차’에 가까웠지만, 

그 ‘절차’마저도 그녀가 원한 달콤함, 그리고 이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그녀가 목표했던 바는 전부 달성이 되었다.

 

시민들은 살아남았고, 고대의 악은 잠재워졌다.

앞으로의 찬란한 미래도 보장받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것만으론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

 

물의 나라, 물의 신.

그러나 그 수많은 칭호조차도 지금 그녀의 가슴에 남은 타는듯한 갈증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녀’라면 이때 무엇을 했을까.


 

https://www.pixiv.net/artworks/118117775

 

문득 푸리나는 자신에게 ‘이유’를 주었던 그녀가 생각이 났다.

 

순백색의 우아한 복장을 입고, 자신과 똑닮은 얼굴로 어딘가 외로운 미소를 짓던 그녀.

 

그녀는 ‘신’이었다. 

그리고 푸리나는 그런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녀는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질책과, 죽을뻔했던 수많은 경험들만이 그녀의 허리춤에 꼬리표처럼 달라붙는다.

 

자신의 윤환을 끊으려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빈번히 실패했다. 이유는 ‘신’이 그녀에게 건넨... 자그마한 ‘선물’ 때문이었다.

 

처음에 불사의 저주는 그녀에게 있어 축복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오랜시간 살아남아 백성들의 신임을 얻고, 신을 연기하며, 종국엔 모두를 구하는 영웅적인 서사.

 

그 서사를 위해 그 힘은 꼭 필요했다.

 

하지만 그 힘은 독이 든 성배와도 같았다.

그녀의 목숨을 옥죄고, 그와 동시에 강제로 늘리며, 더욱 괴로운 기억만을 선물로 남겼다.

 

아아, 단 한번이라도.

단 한번이라도 그녀가 날 찾아와주었으면 좋았을텐데.

 

모든게 끝나고 나서야 원망감이 들끓는다.

 

이제 예언은 끝났다. 재앙도 끝났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없다.

 

모두가 그것을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신’이 사라졌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자신의 몸을 속박하던 저주는 이제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후련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녀는 마치 너덜너덜한 선물상자와도 같았다.

내용물은 처참하고, 포장은 반쯤 뜯겨나간 선물상자.

 

그 누가 그것을 선물이라 생각하고 기쁘게 받을 수 있을까.


그녀의 마음이 그러했다. 그 누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녀를 좋아해 줄 수 있을까.

 

그녀는 응당 그렇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남이었어도 이런 사람은... 불쌍하다고만 생각할 테니까.

 

적어도 그녀가 새로운 삶을 찾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 그녀의 집 문을 열고, 괴로움을 들이키던 자신에게 ‘당신이 필요해.’ 라고 말하기 전까진.



------------------------------------------------------------------------------------


모두의 예상대로 시험은 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