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저주받은 년.


아직은 작디작은 소녀에 불과했던 그녀가, 태어나고 말에 귀를 띄일 쯔음에 처음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저주받은 종족같으니.


뒷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을 시기에 들었던 말이었다.


그리고는 이제는, 손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찬 노예 신세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저주받았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이런 신세가 된 것에도 그다지 크게 불만은 없는 그녀였다.


다만, 말을 떼었을 때부터 바래왔던 단 한가지 소원이 있었다.


이런 나라도, 누군가가 이해해주었으면 한다는 자그만한 소원.


아마도 이뤄지지 못할 것 같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도 사가지 못한 노예가 되어 뒷쪽의 개먹이로 될 지도 몰랐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삶에 의미가 없었기에.


단순히 살아있기에 살아가던 그녀였기에, 미련도, 후회도, 분노도,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이대로 끝이라면 끝인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무릎을 끌어안고, 언제쯤이면 나를 이 철창 밖으로 끌고나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던 그녀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빛 한 줄기가 새어 들어오는 것을 깨달았다.


개먹이가 될 때가 아니면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이 열리고, 그 뒤로 살찐 돼지나 다름없는 노예들을 사고파는 상인과, 그녀와 비슷해보이는 나잇대의 소녀가 보였다.


"헤헤… 여기있는 노예가 가장 쌉니다요. 다만, 그… 저주받은 녀석이라서, 책임은 스스로 지셔야 합니다."


"알겠으니, 얼마나 드리면 되죠?"


"…어디에 써먹지도 못하고 내버려두면 년이니, 그냥 가져가십쇼. 다음 번에도 찾아오실 예정아니십니까, 헤헤."


"그렇다면야, 감사히 받도록하죠."


철창의 문이 열리고, 노예 상인은 안으로 들어와 철창과 연결된 쇠고랑을 풀고, 그녀를 강제로 일으켜세워서는 소녀 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며칠째 아무 것도 먹지도 못하고, 딱딱한 바닥에 누워서 제대로 자지도 못한 탓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꼬꾸라지듯이 넘어졌지만, 소녀도, 상인도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소녀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째서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걸까. 그런 눈빛으로 한 번도 봐진 적이 없었던 그녀로서는 의문밖에 품지 못했다.


상인은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소녀에게 계약서를 넘기며 사인을 요구했고, 소녀는 익숙하다는 듯이 계약서에 사인을 적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상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를 더럽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침을 한번 찍 뱉고는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그녀와 눈 앞의 소녀밖에 남지 않았다.


도망친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실력이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지쳐버렸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지쳐버린 상태였다. 더 이상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들이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 것처럼, 같은 자리를 맴도는 느낌이었다.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그녀를 보던 소녀는 한 바퀴를 빙 돌며 그녀의 몸을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채찍질을 당한 흔적에 불로 지진듯한 흔적, 그리고 칼로 찔리고 베인 듯한 수많은 흉터들. 그럼에도 살아있는 것이 그녀였다.


소녀는 그 모습에 과연, 저주받은 종족. 아니지, 소수밖에 남지 않은 마족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더러울텐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좋은 촉감은 아니었다.


관리가 제대로 된 것도 아니었고, 헝클어진 수준을 벗어나서 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 소녀는, 그녀의 손과 발에 걸린 쇠고랑을 열쇠로 풀어주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눈 앞의 소녀정도는 가볍게 쓰러뜨리고 도망갈 수 있었는데, 자신의 뭘 믿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의문밖에 남지 않았다.


삶의 대한 미련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던 그녀는 가벼워진 자신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무거운 것이 떨어졌으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에도.


"…왜, 저, 골랐냐입니다."


"…의외로 말도 할 줄 아네?"


"말, 조금, 합니다."


"그럭저럭 써먹을 수 있겠네. 일단, 우리 집으로 갈까."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그녀에게서 단 한곳만 풀지 않았던 곳인, 목에 줄을 걸고는 앞으로 먼저 나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 그녀를 골랐는 지, 소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 건지 아무 것도 몰랐지만, 그래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소녀라면 나를 제대로 봐줄 것이라는, 이유 없는 믿음을.


어차피 그녀의 실력이라면 자신에게 헛된 짓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수 있었다.


이미 수없이 베이고, 불에 지져지고, 화살에 꿰뚫렸는 데도 살아남은 자신이라면 그 어떤 행위도 참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처음을 가져간 건 아무도 없었지만.


"뭐해? 안 따라오고."


"갑, 니다."


"집에 가면 물부터 먹어야겠네. 목이 다 쉬어서는, 귀가 아프네."


중얼거림마저도 들릴 정도로, 뛰어난 신체를 가진 그녀에게 소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친절을 베풀려고 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믿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너, 이제 자유야."


"…네?"


"자유라고. 노예 생활도 끝이니까 어디든, 가고 싶은 대로 가."


"무슨 소리에요, 주인님?"


"법이 바뀌었어. 노예 제도가 폐지됐다네."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있으면서도, 책상에 발을 올린 채로 신문을 읽던 주인님이 그녀에게 자기 손에 들린 신문을 건넸다.


거기에 적힌 대문짝처럼 커다랗게, 1면에 박힌 글에는 노예 제도 폐지가 보였다.


신문을 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끼며, 주인님에게로 고개를 돌리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고 계셨다.


"어쩔 수 없지, 뭐. 여태까지 일 했던 값도 줄 테니까, 잘 가. 나중에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바이바이. 하고 손을 흔드는 주인님의 모습에,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할 말을 잃어버린 그녀와는 다르게, 소녀에서 이제는 25살의 여성이 된, 그녀가 칭하기를 주인님이라 부르던 여성은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노예 제도가 끝났으니 뭘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되었다는 데.


전생에 남자였던 적도 있었기에 노예라는 말에 로망을 품고 노예 시장에 갔더니만, 아주 별의별 인간 군상이란 군상을 다 만나고 와버려서 로망도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나마 저주받은 종족이라고 불렸던, 아마도, 마족이라고 생각되는 그녀를 제값도 안 치루고 공짜로 데리고 온 건 좋았다.


어떻게든 사람처럼 만들려고 노력도 했고, 그 결과가 요 3년 간의 일이었다.


생각보다도 일을 더 잘 해주었던 그녀의 덕분에 사업은 잘 되었고, 집안에서도 뭐라고 하지도 않았으니 아주 최고의 나날들을 보내는 와중이었다.


부모님에게서 약혼을 하라는 편지만 오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이도 나이였으니 슬슬 결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다보니 가장 먼저 방해가 되는 노예를 보낼 생각이었다.


돈 한 푼도 없이 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이래보여도, 나름대로 예의라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아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냥 보냈다가 나중에 앙심을 품고 찾아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죽을 텐데.


"…아직도 안 갔어?"


"잠깐,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주인님."


"말 그대로야. 노예 제도 폐지로 너는 자유, 여태까지 일했던 값도 치뤄줄테니 나가줬으면 한다. 설명 끝."


짠. 하고 손바닥을 펼쳐 보여주며 그녀 몰래 챙겨왔던 제국의 금화가 잔뜩 들어간 주머니를 내밀었다.


메이드 복장을 입고 있던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은 나머지 신문을 두 쪽으로 찢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