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이예지는 멍하게 거울을 응시했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금발과 녹색 눈동자.

지도 교수에 의하면 만졌을 때 기분이 딱 좋은 크기의 가슴과 날렵한 허리.

얼핏 보기에도 미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모습을 한눈에 담은 그녀가 멍하게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30년 가까이 남자로 살아왔던 그녀가.

고작해야 10년 조금 넘게 살았다고 해서 여자라는 의식을 가질 리가 없었다.


죽었다가 깨어났을 때, 새로이 얻은 인생을 자각했을 때도 그랬다.

이예지는 언제나 이예준이었으며 이예지라는 이름은 그저 타인을 위한 애칭일 뿐이었다.


그래, 그녀는 그저 억지로 괴리를 봉합한 채 살아갔다.

이미 한 번 죽어봤음에도 죽는 건 무서웠으니까.

어떻게든지 죽지 않기 위해 그저 오늘을 살아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쯧.”


가볍게 혀를 찬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괴리를 꾹 누르며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녀가 선호하는 바지 같은 남성적인 복장이 아니라.

민소매 블라우스와 짧은 치마, 그 위에 재킷을 걸친 이예지가 바닥에 앉아 검은 양말을 신었다.


지도교수는 그녀가 언제나 일찍 출근하길 원했다.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대학원생은 돈을 벌기 위해 지도교수의 노예처럼 살아야만 했다.


졸업 여부에 따라 봉급이 정해지는 만큼 어쩔 수 없었다.

지도교수가 마음만 먹으면 20년이 지나도록 졸업시키지 않을 수도 있으니 더더욱.

덕분에 뇌물을 바쳐가면서 졸업해달라며 비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예지는 여자였다.


“키라즈, 출근했군.”

“...네.”


이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제 이름은 키라즈가 아니라는 말이 목 끝까지 솟구쳤다가 사라졌다.

이예준이라는 이름은 발음하기 어려우니 대충 이예지.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이예지도 발음하기 귀찮으니 키라즈.

마법사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격 마법 중 하나가 바로 키라즈였다.


매직 미사일이나 파이어볼보다도 못한, 쓰잘머리 없는 기초 마법.

그리고 아마 지도교수에게 그녀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게 분명했다.


지도교수는 늘 그런 식이었다.

끽해야 100년도 살지 못하는 열등한 것들은 배려할 필요가 없다며 비웃곤 했다.

감히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국한 귀족들과 너희가 같은 선상에 설 수 있겠냐는 듯한 시선은 덤이었다.


어찌 보면 오히려 좋은 일이기도 했다.

원숭이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는 이가 있을 리 없었으니까.

덕분에 이예지는 다른 대학원생보다는 할 일이 비교적 적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일이 고달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마침 잘 됐어. 오늘따라 힘이 넘치고 있었거든.”

“...네.”

“그래.”


지도교수는 다시 아래로 시선을 내려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이예지는 그 논문이 며칠 전에 그녀가 제출했던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논문이 학술지에 올라갈 일이 없으리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열등한 단생종의 머리에서 그런 생각 같은 게 나올 리가 없었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졸업은 물 건너갔을 게 분명했다.

이예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책상 한쪽에 있는 병을 들어 올렸다.


푸른 병 안에 담긴 이질적일 정도로 차가운 용액.

그녀는 이내 마개를 열어 병 안의 용액을 남김없이 마셨다.


마치 창녀가 강박적으로 콘돔을 챙기듯.

연금술사가 만든 싸구려 피임약을 모조리 삼킨 그녀가 쓰게 웃었다.


분명 그녀는 대학원생일 텐데. 비싼 돈을 주고 대학원에 들어왔을 텐데.

정작 하는 건 저기 뒷골목의 창녀만도 못한 짓 같아서였다.


뭐, 인생이 다 그렇게 불공평한 법이었다.

그렇게 짤막하게 자조한 그녀는 이내 으레 그녀가 있어야 할 장소로 움직였다.


지도교수의 책상 아래.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은 이예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벌렸다.


고급스러운.

천 한 조각만으로도 인간 노동자 다섯을 1년 동안 먹일 수 있을 만한.

그런 천으로 만들어진 바지 위로 손을 가져가서 지퍼를 내렸다.


속옷을 젖히고.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아오른 지도교수의 남성기를 목격한 그녀가 숨을 참았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것을 물고 빨아야 한다는 건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어떻게든지 살아남기 위해 10년 가까이 이세계의 학문을 공부한 그녀로서는 더더욱.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 세계의 빈부격차는 그녀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컸다.

어쩌면 이렇게라도 몸을 팔아 생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게 다행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이예지가 천천히 입을 벌리며 지도교수의 남성기를 물었다.


“읍... 츄릅...”


혀로 한 번 귀두를 훑어내린 그녀가 머리를 앞으로 움직였다.

입 안 전체를 하나의 구멍으로 쓰는 한편, 구역질을 참고 목 끝까지 남성기를 삼켰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구역질했지만, 이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빨을 세우지도 않고.

목 깊숙한 곳까지 세심하게 사용해 가면서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던 그녀가 천천히 귀두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입술 안을 이용해서 귀두 뒤쪽을 자극하는 한편, 다른 손을 사용해 고환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응이 돌아왔다.

이예지는 입 안에서 맥동하는 남성기의 감촉을 느끼며 충격에 대비했다.


“...!”


울컥, 하는 소리와 함께 정액이 그녀의 입 안에 가득 찼다.

여전히 쓰고 비린 탓에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이예지는 그게 진미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음미하기 시작했다.


지도교수가 그걸 원하기 때문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유능한 학생 중에서 예쁘고 어린 미녀만 골라.

머리를 쓰기 위해서는 하체의 힘을 빼야 한다는 논리로 학대하는 게 그의 취미 중 하나였다.


성스러운 학문을 노래해야 할 입에 상스러운 남성기를 물게 시킨다는 것.

그 사실에 흥분한 것인지 지도교수의 남성기가 재차 맥동하기 시작했다.


“우붑...”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정액이 그녀의 입 안에 가득 고였다.

숨이 턱 막히고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예지는 가까스로 그걸 참으며 천천히 정액을 모조리 삼켰다.


그녀는 천천히 남성기를 입에서 떼며 생각했다.

과연 책상 위에서 보는 그녀의 얼굴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생각하지 않아도 비참할 게 분명했다.

역류한 정액이 코를 타고 몇 방울 흘러내리고.

눈동자는 울먹거리며 축축해져 있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잡고 거칠게 범하고 싶어지는.

마치 도화지에 새까만 먹을 뿌리는 것 같은 그런 가학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얼굴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이예지가 자조하며 고개를 아래로 내리깔았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이미 두 차례나 사정했음에도 빳빳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지도교수의 남성기가 보였다.


“흠, 어쩔 수 없겠군.”


지도교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 하고 책상에 무언가 닿는 소리가 들렸다.

이예지는 사형을 알리는 듯한 그 소리에 흠칫, 하고 몸을 떨었다.


공포를 삭일 시간도 없었다.

순식간에 지도교수가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퍽, 하고 배에 주먹이 틀어박혔다.

이예지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는 한편, 표정을 관리했다.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일찍 끝나는 조건은 한 가지였다.

지도교수가 그 특유의 가학적인 성욕을 모두 해소하고 논문으로 시선을 다시 돌리는 것.


그걸 위해서는 그 음험한 욕망을 채울 필요가 있었다.


이내 그녀는 비틀거리며 지도교수가 밀치는 대로 밀쳐졌다.

책상 위에 강압적으로 눕혀지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하지 말아 달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감추고. 최대한 천장의 얼룩을 세려고 노력했다.


“갈보년 같으니라고.”


지도교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젖지 않은 그녀의 여성기에 강압적으로 남성기를 삽입하고.

사랑이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손길로 가슴을 쥐어짜면서.

길바닥 창녀보다 못한 걸 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응, 앗... 하읏...”


이예지는 거짓 신음을 흘렸다.


이런 게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이건 그저 하나의 폭력 행위일 뿐이었다.

최소한의 예열도 끝나지 않은 그녀의 균열을 억지로 열어젖혀 범할 뿐인.


“네년 같은 단생종들은 그냥 무지하게 살면 된단 말이다. 길바닥에서 우리가 뿌리는 돈을 먹고살면서.”

“응흐읏...!”

“그 자리에서 적당히 60년 정도 살고 나면 신께 돌아가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것을... 늘 이렇게 발버둥을 치곤 한단 말이지.”


그렇게 말한 지도교수가 이예지의 머리채를 쥐며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의 주먹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꽤 재밌군. 여기서 벌레들이 기어 올라오려는 걸 보는 건 말이지...”

“교, 교수님...”

“고작! 해야! 백년도! 못! 사는! 저능아들이... 말이야...”


인정사정없는 주먹이 이예지의 얼굴에 쏟아졌다.

순식간에 멍이 들고 코피가 터진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지도교수는 그렇게 망가진 그녀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 응시하다가 씩 웃었다.


그는 그녀의 목에 두 손을 올렸다.

거칠게 허리를 흔드는 걸 잊지 않으면서.

손아귀에 힘을 주기 시작하며 죽음 직전을 목도하는 그녀의 표정을 즐겼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대학원생 하나가 불운한 사고로 죽는 것쯤이야 흔한 일이었으니까.


“....!”

“아, 키라즈...”


이예지는 대답 대신 다리를 까딱거렸다.

지도교수는 그녀의 안에 정액을 있는 힘껏 사정하며 손아귀에 준 힘을 풀었다.


“콜록! 콜록...! 흐윽... 꺅!”

“울지 마. 시끄럽잖아.”


사정없이 이예지의 뺨을 때린 지도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하등종족을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한다는 푸념도 잠시.

그는 천천히 남성기를 그녀에게서 빼내며 손가락을 튕겼다.


이예지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눈앞의 시야가 핑핑 돌고 구역질이 났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재차 무릎을 꿇었다.

지도교수가 그녀의 머리채를 세게 붙잡았지만, 아픈 티도 내지 않은 채 입을 벌렸다.

그리고 천천히 지도교수가 만족할 때까지 정액으로 더럽혀진 그의 남성기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좋아... 이제야 집중할 수 있을 것 같군.”


청소가 막 끝난 직후, 그렇게 말한 지도교수는 책상 위에 내려놓았던 논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흡족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이예지는 조용히 구석으로 가서 섰다.

잔뜩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코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조금 전의 행위로 잔뜩 쌓인 괴리감과 우울함을 천천히 삭이며 기다렸다.


종이 울리면.

딸랑, 하고 웨이터를 부르듯 종이 울리면.

그녀는 집중이 깨진 지도교수를 위해 한 번 더 이 짓거리를 반복해야만 했다.


오늘의 종소리는 도합 서른 번이었다.


그 대가로 주어진 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허가였다.

원래라면 이런 것 없이도 당연히 받을 수 있어야 할.


“우욱, 우웨엑...”


퇴근 이후, 비척거리며 화장실로 향한 이예지가 숨을 헐떡이며 구토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는 목에 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매만지며 쓰게 웃었다.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일은 사택으로 출근하라고 했지.’


그렇게 생각한 이예지가 마법을 사용해 서서히 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죽은 핏덩이를 세면대에 뱉어낸 그녀가 거울에 비추어진 모습을 확인했다.


옷매무새를 조금 정리하자, 나름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지도교수에게 온종일 강간당한 것보다는 잡무와 격무에 시달린 것처럼 보였다.


이예지는 깊은 한숨을 억지로 삼키며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눈을 빛내며 걸어 다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짧은 애도를 표하며 늘 가던 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하.”

“아가씨, 또 오셨군. 늘 먹던 걸로?”

“...늘 먹던 걸로.”


도수 높은 싸구려 술을 시킨 그녀가 탁자 위에 얼굴을 박았다.

원래라면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열심히 썼던 논문이 세 차례나 도둑맞기 전의 일이었다.


이젠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그저 졸업할 수 있을 때까지 하루하루를 버티고 싶었다.

어떻게 졸업만 하면, 이 빌어먹을 곳을 떠나 먹고 살 최소한의 돈이나마 벌 수 있을 테니까.


“오늘은 좀 넉넉하게 담았어.”

“고마워.”


짤막하게 대답한 이예지가 잔을 들어 올렸다.

반쯤 담긴 독한 술이 찰랑거리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한 번에 술을 다 비우고 곧장 몸을 일으켰다.

내일은 사택으로 출근해야 하니까 일찍 자두지 않으면 몸이 버틸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사택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만큼 더더욱.


“잘 마셨어.”

“또 한 번에 마시고 가는 거야? 아가씨, 그러다가 몸 다 상해.”

“...하핫.”

“아, 그리고 괜찮다면 조금 더 있다가 가지 그래? 좀 있으면 연설가 아가씨가 올 시간인데.”

“미안, 아저씨. 관심 없어.”


이예지는 그렇게 말하며 펍을 나섰다.

그 빌어먹을 연설가 아가씨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무관계한 일이었다.


그녀는 무심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다가 어떤 아가씨가 달려와 부딪쳤던 것 같지만, 그냥 대충 사과받고 넘어갔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이예지는 곧장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지도교수의 사택으로 향했다.

구태여 꾸며 입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옷 다 벗어, 갈보년아.”

“...네.”


이예지는 지도교수의 명에 따라 옷을 모조리 벗었다.

당장이라도 그 추잡한 눈을 찌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철저한 약자였다.

목줄을 쥐고 있는 건 지도교수였고.

애초에 진짜 싸운다고 해서 이길 것 같지도 않았다.


지도교수는 몇백 년이 넘게 마법을 수련한 엘프였다.

그에 비해 그녀는 고작해야 십 년 정도 마법을 수련한 인간이었고.

경험과 마력의 양부터 차이가 날 테니 아마 한 번에 죽을 게 분명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길게 하는 거지?”

“하윽...”


지도교수가 이예지의 젖꼭지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마치 말 안 듣는 아이를 어머니가 귀를 잡아끌고 가듯.

그렇게 그녀를 질질 끌고 간 지도교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탁자 위에 놓인 병을 집어 들었다.


“그런 잡념이나 할 시간이 있다면 연구 주제를 생각하는 게 네 열등한 미래에 더 도움이 되었을 거다.”


지도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거칠게 병을 건넸다.

이예지는 그 병을 잡는 한편, 머릿속으로 조용히 반박했다.


예전에는 그랬지만, 그 열정에 물을 끼얹은 건 교수님 아니냐고.

하등 종족이 이런 주제를 떠올렸을 리 없다며 자기 것으로 가로챈 건 교수님 아니었냐고.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병을 열고 그 안의 내용물을 마시는 것뿐이었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피임약 특유의 쓴맛과 이질적인 맛이 섞여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 치밀어 오르는 건 구역질뿐만이 아니었다.


“헤윽...”


이예지는 하복부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것과 동시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먹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교, 교수님... 이건...”

“너 같은 갈보년에게 쓰긴 아까운 물약이지. 왜, 무섭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지나치게 강한 영약을 먹었을 때 특유의,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의 약이라면 연금술사도 사용할 때 주의하라며 사정사정했을 게 분명했다.

아마 물에 몇 방울을 타서 여러 번 사용하는 약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 이걸 모두 마셔버리면...”


그렇게 말한 이예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도교수는 그녀의 생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 늘 그랬듯 대학원생 한 명이 죽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한 번 허락하면 졸업하게 해주겠다는 말은 뻔한 거짓말이었다.

그걸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지만, 이미 덫은 그녀의 목을 옥죈 지 오래였다.


짝, 하고 지도교수의 손이 그녀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이예지는 삐이, 하는 이명을 들으며 뒤로 비틀거렸다.


의외로 고통보다는 쾌락이 더욱 컸다.


그녀는 그 사실에 공포를 느꼈다.

커헉, 하고 바닥에 핏물과 부러진 이빨 몇 개를 흘렸을 때 더더욱.


“갈보년 주제에 오냐오냐해줬더니 기어오르는군.”

“교, 교수님. 자, 잘못...!”

“하등 종족인 널 여기까지 데려온 건 순전히 네가 똑똑해서가 아니야.”


지도교수가 이예지의 팔을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바로 네 얼굴이 반반해서지. 그러니 갈보년답게 보지나 딱 대란 말이야.”

“...윽!”


이내 지도교수는 그녀의 머리를 침대 위에 강압적으로 박았다.

그리고 상체를 꾹 누르는 한편, 빳빳하게 발기한 남성기를 곧장 쑤셔 넣었다.

애무나 사랑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그저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무차별적인 왕복.


하지만 약을 잔뜩 들이켠 탓일까.

이예지는 배려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거친 왕복에 오히려 성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성벽이 바뀐 건 아니었다.

지도교수의 물건은 여전히 역겨웠다.

그게 그녀의 안을 들락날락한다는 것만 생각해도 혀를 깨물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몸은 솔직했다.

이예지는 원하지 않음에도 저절로 꽉 조여들며 지도교수를 기쁘게 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역겨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도교수의 남성기가 맥동했다.

그녀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참으려고 노력하다가, 안에 뜨거운 것이 가득 들어오는 걸 느끼며 절정했다.


지도교수는 그 모습을 보며 이죽거렸다.


“약효가 좋지?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오늘은 즐길 게 무척이나 많이 있으니까.”


이예지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흔들었다.

도대체 지도교수가 직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시.

머리가 핑핑 도는 와중에도 그녀는 금세 지도교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아.”

“내 고상한 취미에 네가 어울릴 수 있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이예지는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걸 느끼며 제자리에 딱딱하게 굳었다.


가장 먼저 쇳조각이 달린 채찍이 눈에 들어왔다.

안장에 두 개의 기둥이 달린 바퀴 달린 목마가 그다음이었다.

격렬하게 창살 밖으로 손을 뻗는 촉수 마물과 방구석에서 허공을 유영하는 슬라임도 있었다.


그 사실을 뇌가 받아들인 직후, 이예지는 덜덜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본 지도교수는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죽진 않을 거다.”


그 말대로였다.

그날 내내 이예지는 지도교수의 가학적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난감으로 쓰였지만, 숨은 붙어 있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예지는 여자 화장실 안에서 구토하고 있었다.


“우웨에엑...”


촉수의 점액과 자그마한 슬라임 덩어리가 혈토와 섞여 세면대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녀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여자 화장실 안에 몸을 씻을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정말로 다행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지금은 괜찮았다.


그 망할 지도교수의 놀음에 시달리느라 죽는 줄 알았지만, 숨이 붙어 있었다.

어제 소모했던 마나도 거의 다 차오른 직후였다. 그러니 마법을 사용해 몸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예지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뒤처리를 끝냈다.


그렇게 모든 정리가 끝난 뒤, 거울 속의 이예지는 봐줄 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정리가 남아 있었다.


“욱, 우웨에엑...”


이예지는 재차 헛구역질하며 세면대에 구토하려고 애썼다.

아직 몸에 잔존한 약 기운을 모두 빼내기 전까지는 완전히 끝났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니 구토할 수 있을 만한 게 필요했다.

입 안에 손을 넣어 몇 번이고 목젖을 건드리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이내 결단을 내리고 펍으로 향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지독할 정도로 고약한 술을 잔뜩 시키고.

펍의 바텐더가 걱정함에도 그걸 모조리 마시고는 펍 밖으로 나가서 토하기 시작했다.


독한 술이 그녀의 위장을 헤집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약 기운까지 위액에 담아 모두 토해낸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입 안으로 다시 손을 넣던 순간.


“...괜찮아요?”

“...보면 알잖아요.”


이예지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흘겼다.

인상적인 앞머리를 가진 여성이 멍하게 있다가 앗, 하고 탄성을 흘렸다.


“죄송해요. 혹시 제가 방해했나요?”

“...아뇨.”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더 엮일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예지는 몸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머리가 핑글 돌았다.

순식간에 무릎을 꿇으며 엎어지려는 이예지를 여성이 잡았다.


“이, 이러지 말고 잠깐 펍에 가서 쉬는 것 어때요?”

“...전 괜찮아요.”

“그런 말씀 마시고요. 자, 펍에서 밥이라도 사드릴 테니까 들어오세요.”


이예지는 팔을 잡아당기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여성의 손에 이끌려 펍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바텐더는 그녀를 위해 죽을 끓였다.

이예지는 그 죽을 먹는 한편, 여성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응시하기 시작했다.


“아, 반갑습니다! 다른 건 아니고 오늘도 이제 교류회를 하기 위해서...”


여성은 그렇게 운을 띄우더니 슬슬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예지는 처음에는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에 신경 쓰기에는 인생이 너무 바쁘기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짧은 생을 살기에 수없이 변화하는 단생종이 장생종보다 월등하고 우월하다는 건 당연한 진리입니다! 만약 장생종이 단생종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면 지금쯤 장생종의 수가 우리 단생종을 압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은 우리 사랑하는 제국의 부활을 위해 장생종들을 정화해야 할 때입니다!! 필요하다면 모든 장생종을 몰살하는 한이 있더라도!”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동조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애초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예지는 이내 여성을 미친년이라고 정의 내렸다.

장생종의 강함은 단생종의 수 배 이상이라는 게 정설이었으니까.


기습하지 않는 이상 상처를 내는 것도 불가능할 게 뻔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예지가 일어나며 주머니에서 은화를 몇 개 꺼냈다.


“잘 먹었어. 대금은 여기.”


당황한 바텐더가 말을 거는 게 들렸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잔 다음,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키라즈, 왔군.”


지도교수가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예지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지금 그녀가 무영창으로 시전할 마법은 키라즈였다.


이예준이 연기하는, 이예지의 그녀의 이름이자.

이 세계의 마법사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기초 공격 마법.

당연히 그녀의 발악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진압될 게 뻔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허공을 가른 광선은 그대로 지도교수의 상체를 꿰뚫었다.

이예지는 몇백 년 동안 살았던 노련한 마법사가 허무하게 죽는 걸 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여성의 말이 맞았다.

장생종은 변화를 거부하고 옛것을 숭상하기에 단생종을 이길 수 없다고.


“세상에.”


짤막하게 중얼거린 이예지는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어느덧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지도교수의 머리를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이제 그다음은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어쩌면 여성의 동료가 되어 장생종의 존재를 뿌리째 뽑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원하는 게 한 가지밖에 없었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그곳에 같이 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야 한 번 더 지도교수를 죽일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그저 그것만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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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즈는 졸트라크 같은 느낌의 마법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