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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현대 #일상 #피폐 #드라마 #노맨스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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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 Chapter 2. 죽어버린 채 살아가기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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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2월 6일.

토요일이다.

그리고, 밤 10시가 넘은 시각.

"오늘도 수고했다. 노을아."

"……네."

그럼에도 난 오늘 알바를 했다. 그것도 밤 늦게까지.

원래라면 난 평일에만 일할 수 있다. 근로계약서도 평일에만 일하도록 썼고, 무엇보다 사장님이 내가 주말까지 일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쉬지도 않고 일하면 분명 쓰러진다고, 그리고 아직 학생일 뿐인 나이인데 놀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허나 오늘만큼은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허락을 받아내서, 적어도 일할 수는 있었다.

돈이 궁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돈이 남아도는데 여기서 더 바랄 것도 없다. 되려 내가 돈 안 받고서라도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냥.

내일이 2월 7일인데.

……마음이 너무 심란해져서.

아니, 사실은 매년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지.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결국, 속에서부터 터져나오려는 무언가가 있어서, 그래서…….

"노을아?"

"……네?"

문득 사장님이 내 이름을 불러오는 소리가 들려서, 살짝 굼뜨게 대답했다.

"힘내라."

"……."

사장님은 날 바라보고조차 있지 않았다. 표정 또한 무표정으로, 단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고마워요."

저건, 지금 사장님이 내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다.

상황과, 나에 대해서.

사장님 또한 알고는 계시니.





*****





카페를 나와서, 나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사람은 없고 주차된 자동차만이 있다. 단지 그뿐인 거리를, 가로등이 어둡지는 않게 비추고 있다.

"……."

이 거리를 매일같이 걸어온 것처럼.

이 거리에 소음은 나뿐인 것처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살아있을 것이고,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과연.

- 저벅저벅

그저 천천히,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을 뿐이었다.

이어폰으로 터져나오려는 감정을 틀어막고서.

한 발씩을.

계속.

"……."

내딛어야만 했다.





*****





얼마나 걸었는지는 모르고, 정신을 차려보면 아파트 앞 공원이었다.

그리고, 나는 뜻밖의 인물이 공원 벤치에 앉아서 폰을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설은찬.

키가 작은 편에, 둥그런 안경을 쓴, 약간 애새끼처럼 생긴 놈.

보려고 했다기보단 그저 눈에 들어왔던 거다. 주변이 꽤나 어두움에도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서로가 익숙하니까.

- 저벅저벅

허나, 나는 설은찬을 그저 지나쳐 걸어갈 뿐이었다.

은찬이는 내가 지나가는 것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폰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든, 여자가 된 내 모습이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든. 차라리 다행이었다.

저번 주 월요일에 있었던 일과 모양새는 비슷했지만, 그 속에 담긴 맥락은 너무나도 달랐기에.

"……개새끼가."

사실 좀 화도 났다.

김민재나 서진혁이라면 내 집에 아무 이유 없이 와 있어도 납득이 된다. 설령 공원에 있다 한들 그냥 내 집에 들른 김에 쉬고 있었다 하면 말이 된다.

그러나 설은찬은 이런 때에 아무 이유 없이 내 집에 찾아올 위인이 아니었다. 집돌이에, 자주 인터넷 방송까지 하느라 바쁘고. 물론 다른 애들처럼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는 일이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시기와, 성격.

그리고 지금 이렇게 추운 날씨에 대놓고 바깥 공원에서 이러고 있다, 라는 것까지 고려하자면.

나를 찾아온 이유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안 그럴래야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

"……."

당연하지만, 내일 있을 일 때문이 아니겠는가. 은설 선배도 알고, 하다못해 사장님까지도 이걸 조금은 알고 있을 정도인데 트리오가 모를 리가 없다. 아니, 나랑 고모네를 제외하면 트리오가 제일 잘 안다.

단순하다. 나를 걱정하고 있을 뿐이다. 내일 있을 일 때문에 날 걱정하고 있을 뿐이야. 작년에는 안 그랬는데 올해는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은설 선배처럼 내 TS 증후군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거야 솔직히 알 바 아니고.

내가 화난 이유는 그것이었다.

걱정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나를 위해 걱정해주는 것을 어떻게 싫어하겠는가. 내게 배려란 부담스러울지언정 싫을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단지, 걱정을 받아버리게 되면.

내가 왜 최근에 계속 마음이 심란해지는지가, 다시 상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아까 사장님의 위로를 듣고 나서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최대한 무심하게 건낸 위로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알고 있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기에.

그렇다고 트리오가, 은찬이가 이런 내 문제를 모르는 것도 아닐 터였다. 언젠가 비슷한 이유 때문에 내가 눈깔이 돌아버려서 트리오한테 개 지랄 염병을 떨었던 적이 있었다. 자세히는 기억 안 나는데, 중학교 3학년 때 그랬던가. 그때는 정말로 죽고 싶었는데.

사실.

이 모든 것들이 단순히 내 이기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걱정 한 번 받았다고 마음이 상해버리고, 기분이 나빠져버리고. 너무 피곤하게 살고 있는 내 탓임을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았다.

내게 오는 모든 걱정들이 단순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을 뿐이다.

근데 봐봐.

지금도 나는 화를 내고 있잖아.

알면서도.

안다면서?

"……."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이럴 때가 될수록 나는 나 자신의 모순과 직면하게 된다. 화를 내면 안 되는 상황이란 걸 알면서도 화를 내고 말아버리는 내 자신이 싫어지고야 만다.

어찌 되었든.

은찬이는 나를 걱정해서 여기까지 왔을 터였고, 그 의도는 순수할 것이다.

그 호의를, 성의를, 마음을.

"하아…… 망할."

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무시해서도 안 됐고.

"야, 설은찬."

나는 은찬이 쪽으로 몸을 가만히 돌리며, 은찬이를 불렀다. 이미 은찬이를 지나쳐 지나간 후였지만 몇 발자국 떨어져 있진 않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름이 불렸는지, 은찬이는 조금 놀란 눈치로 폰에 두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 어…… 아."

그리고 두리번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살짝 어색한 눈짓을 하기 시작했다.

"아, 하하. 안녕."

은찬이는 어색하게 웃어보였고, 그러고는.

"……."

"……."

내가 아무 말 없이 은찬이를 노려보고만 있자, 은찬이는 정말로 굳어버렸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은찬이는 좀 능글맞고 뻔뻔한 성격이다. 그렇기에 여자가 된 나를 처음으로 마주했던 날도 이윽고 나를 보며 헛소리를 내뱉을 수 있었던 건데.

지금의 모습은, 은찬이의 그런 성격과는 괴리가 좀 있었다. 정말로 얼어붙어버린 은찬이라.

"왜 왔어."

"……어?"

"왜 왔냐고."

침묵을 먼저 깬 건 나였다.

"왜 왔냐니, 그냥――"

"네가 그냥 올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하는 거다, 이 새끼야."

"……."

내 어조는, 최대한 억눌러 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격양된 상태였다.

"내일이 대체 무슨 날인데. 내일이 대체 무슨 날이길래 이렇게 사람이 찾아오고 그러는 건데, 응?"

"……."

"내가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냥 이런 날은 내비 두라고, 옛날부터 그렇게 말했을 텐데……."

나는 더 쏘아붙이려다가, 문득 은찬이를 바라봤다.

"……."

정말로 미안해보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평소의 은찬이답지 않게.

나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서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내가 화낼 걸 알면서도…… 온 거야?"

"……응."

"그냥 내가 걱정돼서 온 거야? 다른 거 없이?"

"응."

은찬이는 퍽 쪼그라든 모습으로 그리 대답하고 있었다.

그런가.

역시 그랬던 거다. 내가 이거 때문에 옛날에 개 지랄 염병을 떨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결국엔 내가 걱정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와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살얼음판이지만, 혹시라도 여기서 지뢰가 더 터져버리면 안 되니까.

그냥 그런 이야기였던 거다.

물론 이런 이야기라도 좋아하진 않지만.

"……푸흣."

상황에 맞지 않게 조금, 웃어버리고 말았다. 심각한 분위기는 내가 다 잡아놓고 뭐 하는 짓거리인진 모르겠지만.

단순해서 좋을 때가 있다. 트리오는 종종 개새끼일 때도 있지만, 그냥 좋은 개새끼다.

화는 이제 좀 누그러졌다.

"그래, 뭐 됐어. 와줘서 고맙다."

"…진짜 미안해. 그래도 걱정이 돼서……."

"뭐. 내가 여자 된 거? TS 증후군 걸린 거? 그거 때문에 괜히 또 걱정된 거야?"

"응."

"참, 나. 이게 뭐 대수라고. 야, 내가 여자 됐다고 뭐 달라졌냐? 너도 내가 옛날이랑 똑같은 성깔이란 거 알아서 방금 굳어버렸던 거잖아?"

"그렇……네? 어. 그렇네."

"그치?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은찬이는 어쩐지 납득한 표정이 되어버려서 긴장이 탁 풀려버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정말로 옛날이랑 똑같은 성깔인 건 아니지만 말이야. 나도 너네한테 화낸 다음에 반성 많이 했다고. 그리고 이제는 피곤해서 그렇게까지 화도 잘 못 내.

……애초에 지금 이 상황에서 화낼 생각을 한 내가 잘못이란 건 좀 넘어가고 싶다. 사실 은찬이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는데.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인데.

결국 내가 쓰레기란 소리지.

"됐고 야, 집에나 돌아가. 아니면 여기까지 왔는데 내 집에서 자고 가든가."

난 웃으면서 말할 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좀 밝은 목소리로 은찬이를 대하고 있었다.

"여자 모습으로 그런 말 하니까 어감이 이상한데."

그리고 헛소리 지껄이는 거 보면 은찬이도 다시 상태가 멀쩡해진 게 분명했다.

"지랄 말고. 지금 시간이…… 11시 넘었잖아. 더 늦으면 막차 끊길 수도 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너 당장 안 돌아가면 좀 위험하다고."

"택시 잡고 가지 뭐. 그리고 솔직히 여기서 우리 집까지 뭣하면 걸어가도 되는 거리잖아?"

"삼사십 분을 내리 걸어가겠다고?"

"응."

"참 뭐랄까…… 대책 없이 산다고 해야 하나. 안 갈거면 그냥 닥치고 내 집에서 얌전히 자고 가지?"

"어우, 그건 좀."

"뭐가 그건 좀인데?"

나보고 사귀자고 할 때는 또 언제고? 어이가 없네.

그건 그렇고, 대책 없이 산다고 하니까 갑자기 떠오른 게 있는데.

"그러고 보니까 너, 언제부터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해졌다. 나를 찾아온 건 좋은데 대체 언제부터,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던 것인가.

"한 시간 전부터? 아마."

"10시?"

"응. 먼저 너 집에 들어가봤는데 아무도 없더라고. 그래서 차라리 여기서 기다리자 해서 여기 있었지."

"안 추웠냐? 한 시간이면 그래도 오래 기다린 건데."

"내 유일한 여친을 위해서 이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하하. 뭔가 했더니 그냥 미친놈이구나."

- 팍!

"엌!"

좀 미안해지려 했는데 방금 그 말 듣고 안 미안해져버려서, 그냥 저번처럼 은찬이의 뒷통수를 후려깠다. 왜 자꾸 이상한 헛소리를 해대는 거냐 너.

여자친구가 아니라 여자 친구라면 일단 틀린 말은 아닌데, 여사친도 아니고 여친은 시발.

"어우 야, 추운데 맞으니까 더 아파."

"아. 뒷통수가 아니라 귀를 후려쳤어야 했나……."

"그건 아니지 이 미친놈아!"

은찬이는 추워서 새빨갛게 변한 귀를 손으로 급히 가리며 질겁했다.

아, 방금은 내가 말했지만 좀 사이코 같긴 했어. 이런 추운 날씨에 귀 건드리면 아파서 죽을 거야 분명.

"어우, 그건 그렇고……."

은찬이는 뭔가를 털어내듯이 고개를 좀 흔든 다음, 할 말이 있다는 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사실 여기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라서."

"……응?"

그리고 은찬이의 그 말은, 좀 뜬금없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라고?

"이제는 좀 불러도 되겠네."

아니.

잠깐만.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서진혁! 이제 나와도 돼!"

그리고 그런 내 불안한 예감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은찬이는 허공에다 대고 약간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서진혁이라고?

진혁이가 왜 여기 있는데? 아니, 애초에 여기 왜 너 말고 다른 새끼가 튀어나오고 앉아있는 건데?

그리고 이윽고, 은찬이의 뒷편 어딘가에서 진혁이가 스윽 하고 튀어나왔다.

"……진혁이가 왜 여기 있는데?"

"글쎄다."

"글쎄다는 뭐가 글쎄다야! 이거 너네 짜고 친 거지!"

"아아니. 백 퍼센트 우연인데. 이건 진짜야."

내가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진혁이가 내 앞까지 와서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안녕?"

진혁이의 밝은 인삿말이었다.

"……그러니까, 너까지 왜 여기 있는 건데? 너네 뭐야?"

밝은 인삿말이고 나발이고 왜 여기 이 자리에 두 명이나 있는 건데.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당위성도 없고 개연성도 없고! 뭔데 이거!

내 성깔 안다면서! 근데도 걱정된답시고 나한테 온 게 왜 두 명이나 되는 거냐고! 한 명이라면 그나마 납득이라도 되지 두 명은.

어우.

"다른 이유가 있겠어? 그냥 설은찬이랑 나랑 생각이 똑같았고, 똑같은 행동을 했다 이거지. 나보다는 은찬이가 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진혁이가 능청스럽게 그렇게 말했고.

"응. 그러니까 내가 백 퍼센트 우연이라고 말했잖아. 못 믿겠어도 진짜라고."

은찬이도, 역시 능청스럽게 그리 말하고 있었다.

"……."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TS 증후군에 걸렸기 때문에 안 그래도 불안정할 내 정신 상태가 더 불안정해졌을 거라는 걱정을, 총 합쳐서 세 명이나 했다고? 은설 선배, 은찬이에 이어서 진혁이까지? 거기에 은찬이랑 진혁이는 또 마음이 맞아서 우연히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됐고?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가능성이 낮은 상황인데.

그게, 또 원인이 결국은 나 때문인 거 아냐. 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한 원흉이 나란 소리잖아 이거.

"하아……. 나, 나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잘못 살아온 거냐……."

화는 진작에 풀렸으니 더 이상 화를 내진 않았고, 그냥 좀 우울해질 뿐이었다.

TS 증후군이 날 억까해요. 불타서 재만 남은 곳에 부채질을 하고 있어요.

우울하네.

"그러고 보니까 민재만 여기 안 왔네."

그렇게 있다 보니까 문득 은찬이가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러네. 생각해 보니까 여기 지금 트리오 중에 민재만 없구나. 물론 한 사람만 빼고 모이는 거야 자주 있는 일이긴 하다만.

"이건…… 민재가 눈치가 없었다 해야 할지, 눈치가 좋아서 그랬던 건지."

"그걸 따지면 우리가 눈치가 없었던 거야 진혁아."

"아."

진혁이는 은찬이의 그 말에 오히려 깨달아버린 듯한 눈치가 되었다. 그러게. 진혁이도 꽤 가까운 곳에서 튀어나왔으니 내가 은찬이한테 화내기 직전까지 가는 거 봤을 거 아냐. 혹시나 보진 않았어도 듣긴 했을 거고.

"아냐. 됐어. 오늘은 민재가 눈치가 없었던 걸로 하자고."

물론 굳이 따지자면 은찬이의 말이 맞긴 하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아까도 생각했던 거지만, 여기까지 찾아와준 사람들의 마음을 난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그거 민재한테 너무한 발언 아니야?"

"알 바냐? 꼬우면 나왔어야지."

"…그, 민재가 나왔으면 나왔기 때문에 눈치가 없단 소리를 듣게 되는 게……?"

"……아."

진혁이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뭔가를 깨달아버렸다.

그러네. 민재가 여기 와버렸으면 내가 눈치도 없이 여길 왜 왔냐고 했겠구나. 그냥 옛날처럼 나한테 아무 신경 안 써주는 게 눈치 챙기는 거라고 말했을 것 같네.

이래서 인식이 중요한 건가? 민재가 눈치가 없단 인식이 박혀버리니까 어떻게 행동하든 '눈치가 없었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어버리는데.

"아 몰라. 모두가 눈치 없었단 걸로 해. 됐어 이제."

여하튼, 더 생각하기도 귀찮아져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고, 나는 더 화를 내고 싶지도 않으니.

"뭐, 김민재라고 해도 너 걱정하고 있는 건 똑같겠지만 말야."

"내가 그걸 몰라서 그러겠냐. 당연히 알아. 그리고 진혁이 너도 똑같으니까, 다른 건 다 됐고 그냥 고맙다고. 걱정해줘서."

"어, 어…… 그래."

진혁이는 어째 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건가.

"뭐냐 그 반응은."

"아니, 그냥. 너 옛날에 화냈던 거 생각하니까, 좀."

"내가 화내기를 바라진 않았을 거 아냐? 그리고 화는 이미 쟤한테 다 냈어."

"들었어."

"들었으면 됐고. 날 위해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이냐."

"……진짜 이상하네. 왜 다른 사람 같지."

진혁이도 내 옛날 성깔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은찬이랑 똑같은 걱정을 하고 왔을 거고,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진혁이에게는 괴상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내 옛날 잘못 때문이라 이해가 되고 안 되고는 의미가 없지만, 굳이 따진다면 이해가 되긴 하지.

하지만 진심인데. 기분이 안 좋다고 해서 사실까지 왜곡할 순 없다.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감사한 거야. 그걸 고깝게 받아들이는 게 문제지. 다 알고는 있는 거다.

알고 있으면서도 기분이 앞서버리곤 할 뿐이다.

"아무튼, 야 은찬아."

"왜?"

"너도 고맙다고. 화내려고 해서 미안하고."

나는 은찬이한테도 그렇게 전했고, 은찬이는 진혁이처럼 반응하기보다는 그냥 말 없이 따봉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따봉은찬이네. 따봉은찬아 고마워.

"……노을이 너, 진짜 우리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야?"

진혁이는 아직도 내가 걱정스러운 것 같았다. 그보다는 설은찬도, 날 아는 다른 사람들도 여전히 내가 걱정스럽겠지.

특히 TS 증후군에 걸려버린 내 모습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한 병이니까 그런 이미지가 씌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여자가 됐다고 뭐 달라진 게 있어? 원치 않게 고자가 된 거 말고는 별 거 없다니까? 너네랑 나랑 관계도 그대로고, 내일 그냥 잠깐 갔다오는 것도 그대로고."

다만 내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TS 증후군이고 나발이고, 이런 일로 다른 사람들한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 걱정을 받아버려서 기분이 나빠지는 것 또한 여전히 싫고.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내가 여자가 됐든 뭐가 됐든, 나는 내일 가야 할 곳이 있다.

과거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이상,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TS 증후군에 걸려버린 게 하필이면 너라서."

"야, 오히려 나라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거라니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서 그래?"

"어."

"응."

내 되물음에 진혁이랑 은찬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염병.

"……."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고, 진혁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말했다.

"그러니까 업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 그냥."

"시이발……."

아니, 내가 쌓아놓은 업보가 그렇게 많던가?

많지. 아주 많아.

죄송합니다.

"아 모르겠다 이제.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건데? 지금이라도 안 돌아가면 막차 끊긴다?"

"진지하게 따지자면 아직 여유는 꽤 있다고."

은찬이의 말이었다.

"여유가 있으면 뭐, 내 집에서 놀고 가게? 말리진 않아. 아까 말했듯이 자고 가도 되고. 어차피 내일 주말이라 아무 일정 없을 거잖아 다들."

"싫은데."

"아 그럼 어쩌자고! 빨리 꺼지든가 말든가!"

- 팡!

"엌!"

이번에는 은찬이의 등짝을 스매싱했다. 패딩을 때린 거라 소리만 크지 별로 아프진 않을 텐데 왜 아픈 척을 하는 거지 쟤.

"진혁이 너는 어떻게 할 건데?"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 왜 너까지 그러냐고!"

왜 이젠 진혁이까지 지랄을 하는 걸까. 집 앞까지 둘이서 온 것도 그렇고 오늘 아주 둘이 합이 잘 맞는구만 아주 그냥.

어우.

"아 걍 둘 다 가라, 가. 필요 없어 이 자식들아."

나는 두 놈 자식들을 냅다 내 집 반대 방향으로 떠밀기 시작했다.

"쳇."

"그러니까 뭐가 쳇이냐고 이 새끼야! 집에 있긴 싫다며! 그럼 빨랑 꺼져!"

그래도 둘 다 내 힘으로 손쉽게 밀려나는 걸 봐서는 진짜로 내 집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지금 또 이상한 소리를 낸 은찬이야 처음부터 자고 가긴 싫다고 했지만서도.

사실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긴 했다. 아무리 내가 지금 평소처럼 애들을 대하고 있다곤 해도, 마음이 여전히 조금 언짢은 것만큼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속마음이 그렇다는 걸 아마 두 사람 모두 대충 짐작은 하고 있을 거고.

물론 정말로 내 집에서 자고 간다고 내가 막 '와 진짜로 자고 가네 눈치 없는 새끼' 이러지는 않았을 거다. 그냥 너네가 처음 여기 왔을 때부터 아웃이었어. 그 다음부터는 나한테 뭘 해도 상관이 없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들 통금은 없는 놈들이라 한들, 결국 아직 청소년이다. 미리 얘기가 된 것도 아닐 텐데 늦게라도 집에 안 돌아가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

날 걱정해서 여기까지 와준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못 해주는 건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보내는 게 낫겠지, 여러모로. 얘네들도 얘네들 나름대로의 부채감이 있을 거고.

우리 셋은 그렇게 아파트 단지 밖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너네 있어봐야 별 위로도 안 돼."

"말 한 번 섭섭하게 하시는구만."

"언젠 안 그랬냐?"

진혁이의 말에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고, 진혁이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래. 차라리 이렇게 말하니까 걱정은 덜 된다."

"그렇긴 하지. 평소랑 같으니까."

은찬이도 거들었다.

평소랑 같다니, 어쩐지 저번에 다 같이 모여서 했던 생각을 그대로 되돌려받는 기분이네. 썩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적당히 이야기를 더 나누면서 걷다 보니, 금방 아파트 단지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이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난 이 정도만 나와도 되냐?"

"더 안 나와도 돼. 너도 이제 집 들어가야지."

진혁이가 대답했다. 확실히, 좀 더 멀리 배웅해줘도 상관은 없었지만 조금 피곤하긴 했다. 몸도 마음도.

그래서 내가 이만 잘 돌아가라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

"아 맞다, 얘들아."

은찬이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응? 왜. 잘 돌아가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하마터면 잊고 있을 뻔했네. 그냥, 우리 조만간 다 같이 영화나 보러 가자고."

"……영화?"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꽤나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나 보고 쓰라고 아버지가 영화표 4장이나 줬거든. 가족끼리 보라고 뿌린 걸 가져오셨다 그랬어."

"아, 그러고 보니까 너네 아버지가 영화 쪽에서 일하신다 그랬나?"

"응. 눈에 띄는 쪽에서 일하시진 않지만."

나를 뺀 두 명의 대화였고, 난 대충 납득할 수 있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영화 얘기가 왜 나오나 했더니만.

은찬이 아버지가 옛날부터 영화 업계 쪽에서 일하신다는 건 옛날부터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일하시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일 때문에 한동안 집을 비우시기도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영화표가 거기서 나왔다면 딱히 더 할 말은 없었다. 살다 보면 이런 일들이 한 번씩은 생기는 법 아니겠어.

"나는 찬성. 어차피 난 알바 빼면 쳐남는 게 시간이라."

그래서 그냥 그렇게 말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뭣도 없고 말이지.

영화관이라, 사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한 번도 간 적 없긴 한데.

물론 영화가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기회가 없었다고 해야 하나. TV에서 흘러나오는 영화는 간혹 보곤 하는 그런 정도다.

"나도 찬성. 근데 이거 영화 정해져 있는 거 아니지?"

"그냥 영화 예매권이라서, 현장에서 예매하고 해도 돼. 지금 뭐 굳이 정해놓고 할 필요 없음."

진혁이의 물음에 은찬이가 답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화 자유이용권을 얻은 셈인 건가.

"그래 뭐, 자세한 건 나중에 정하자고 그럼. 급할 필요 없겠네. 내 알바 때문에 주말에 시간을 잡긴 해야겠지만."

"오케이."

"그럼 우린 이제 간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 오늘은 고마웠다."

더이상 할 얘기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은찬이랑 진혁이는 등을 돌려 떠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아파트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하."

영화 얘기는 둘째치고.

사실, 은찬이랑 진혁이가 올 줄은 정말로 몰랐다. 예상조차 해본 적 없어. 심지어 두 명이 동시에 올 거라고는 더더욱.

이런 것을 내가 싫어한다는 걸 트리오도 알기 때문에, 작년이나 재작년이라고 애들이 찾아오는 일은 딱히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대해주다가 날을 넘겨버리는 그런 식이었는데.

올해는 TS 증후군에 걸렸다고 사람들이 일제히 날 걱정해준다.

참.

웃긴 일이다. 내가 이런 걱정을 받아도 되는 사람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고, 이런 거에 기분 나빠하고 있는 내 자신이 싫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나는 공원, 골목, 엘리베이터를 지나서.

어느덧 집 앞 현관문에 도착한 상태였다.

"내가 그렇게…… 걱정될 정도였던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조용히 비밀번호를 누르고서 현관문을 열었다.

공허한 집 안.

"……."

- 덜컥.

문이 닫히고, 어둠이 내 시야에 들어왔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는 것이 있었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그럴 만… 했네……."

문득, 숨이 거칠어짐을 느끼고 있었다.

그보다는, 숨을 쉬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염병.

둘 중 아무나 한 명이라도 데리고 왔어야 했다. 내 실수였다. 아니, 실수는 아니었다.

그냥, 내 문제를 직면할 뿐이다.

역치.

그리고, 또.

빈, 어두운 집에 대한.

공포.

악몽.

그러나 현실.

천장.

선혈.

추락.

하늘.

암전.

"아―――"

나는 비현실에 휩싸였다.





*****





"하아…… 하아……."

얼마나 증상이 지속되었는지는 모른다. 단지, 나는 겨우 바닥에 누워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자주 있는 일이다.

자주 있는 일이야.

특히, 이렇게나 마음이 더럽혀져 있는 경우엔, 더더욱.

"……윽, 읏."

그러니까.

나는 이빨을 꽉 다문 채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걸었다.

"후우……."

쓰러지고 싶진 않았다. 겨우 하루가 남았을 뿐이다, 2월 7일까진.

그걸 위해서, 고작 그것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 있었던 거 아냐. 그때까지 좀 버텨보겠답시고 공짜 알바를 자처해서 한 거 아냐.

나는 버텨야 했다.

이미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버티기만을 위한 공허했던 말은 이미 저버려졌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버텨야 했다.

버텨서.

……말을, 전해야 해. 이것만은 꼭 해야 해.

일 년에 단 한 번 찾아오는 날에.

고모랑.

납골당에 가서.

엄마랑 아빠한테.

인사를 전해야 해.

"……."

그래서,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걸었다.

버텼다.

단 하루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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