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당신은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벽 뒤에 몸을 숨겼다. 당신을 뒤쫓아 오던 도플갱어는 사라진 당신을 찾아 계속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도플갱어가 사라질 때까지 숨조차 느리게 내뱉던 당신은 그제서야 크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생전 처음 보는 곳에 갇힌 뒤로 여러가지 위협들을 마주한 당신에게 이 곳의 공략이 담긴 규칙서의 존재는 존재 자체로 힘이 되어주고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당신은 바지 주머니에 고이 접힌 체로 들어있는 규칙서를 꺼내 펼쳐본다. 







규칙서는 당신의 탈출을 위해서는 하나의 존재를 만나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신체가 훼손되고 많이 지쳐버린 당신은 그냥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탈출이 코 앞이라는 생각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안녕?"







비명조차 나오지 못하게 된 목으로 당신은 열심히 비명을 지르며 규칙서를 바지 주머니에 빠르게 구겨 넣었다.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은 규칙서가 옳다면 엄연히 안전 구역이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거의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인데 당신을 제외한 인간이 당신의 앞에 서 있다. 







규칙서는 여기에 당신 외에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규칙서가 잘못된건가 싶어 규칙서를 꺼내던 당신은 문득 그런 고민이 들었다. 나의 탈출을 도와줄 존재가 날 찾아올 수 도 있지 않을까?







"인사 안 받아줄거야?"







당신의 앞에 서 있는 존재는 당신에게 다시 말을 걸었고, 당신은 사정이 있어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전했다. 그 몸짓을 알아들은 존재는 입을 뻥긋 거리는 당신에게 말을 걸었다. 







"으흠, 말을 못하는구나. 그럼 듣고만 있어!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난 너희같은 여기로 들어온 애들을 내보내주는 존재야. 이건 거짓말이 아니니 믿어도 좋아. 혹시나 그래도 못 믿겠다면 너의 손상된 신체를 재생시켜 줄 수도 있어!"







말을 거는 존재는 활짝 웃으며 당신에게 손짓했다. 아마도 당신의 믿음을 궁금해하는 듯 했다. 당신은 속으로 조금 의심했지만 신체를 재생시켜 줄 수도 있다는 말에 믿었다. 당신을 먹어버리지 못해 안달난 이 곳보다 당신의 앞의 존재의 말이 더 믿음이 가기 때문이다. 







"너도 꽤 많이 지쳐보여. 물론 여기서 일주일이나 버텼으니 당연한 결과지만 말이야. 난 널 탈출 시켜줄 수 있어. 원한다면 신체도 복구해 줄 수 있지. 어떻게, 이 조건에 응할래?"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을 보며 말을 건 존재는 깔깔 웃어댔다. 아무래도 여간 재미있었나보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여기서의 탈출은 딱 한가지, 나를 통해 나가는 것 뿐인데 조건이 있어야하지 않겠어? 네가 그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흔쾌히 내보내 줄게. 하지만 조건을 들어주지 못하면 뭐 안타까운거지."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존재는 다시 한 번 당신에게 선택권을 쥐어주었다. 조건을 충족하고 여기를 나갈 것인가, 아니면 남을 것인가. 뇌가 없는게 아닌 이상 조건 정도는 들어봐야지라 생각한 당신은 조건이 무엇인지 입을 뻐끔거렸다.







"조건? 쉬워! 별거 없어, 진짜야. 그냥... 네가 가지고 있는 규칙서, 그걸 나에게 건내줘. 아니면 불태워도 좋아. 내가 내세울 조건은 네가 가진 규칙서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거야. 쉽지?"







당신은 당황했다. 규칙서라니. 보통 이럴 때에는 신체의 일부나 기억 등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나 라고 생각한 당신이 아무말도 없자 말을 건낸 존재는 당신에게 결정을 위해 10분을 주었다. 







당신은 얼떨결에 엄청나게 고민하게 되었다. 지금껏 여기에서 동고동락한 규칙서와의 이별이 10분 밖에 남지 않았다. 당신에게 아주 큰 버팀목이 되어준 규칙서를 불태우거나 건내달라니? 하지만 곧 탈출할 당신의 미래를 생각하니 규칙서를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가 아파져온다. 







지금은 당신의 규칙서지만, 조금이 지나면 남의 규칙서이자 생명줄이 될 것이다. 온갖가지 괴물들이 들끓는 이 곳에서 여태까지 유일하게 당신의 목숨을 챙겨준 것이다. 그리고 손에 들린 규칙서는 분명히, 여러 사람들의 생명값일 것이다. 규칙서는 분명히 여러 사람들의 목숨이었다. 







그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생각하니 죄책감이 드는 것 같았다. 이걸 이렇게 포기해도 되나 싶던 당신은 결국 그 존재에게 규칙서가 아닌 다른 것을 거래하자설득하기 위해 고개를 든 그 순간.







"시간은 3분 정도 남았어. 그런데 네가 여기 또 올걸 생각하고 있는거야? 오.. 난 생각 읽기 정도는 쉽게 할 수 있거든. 당연히 네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것 또한 알 수 있지. 규칙서가 여러 사람들의 목숨인건 맞지만, 네가 여길 또 올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어라. 생각치도 못한 답변이었다. 과연, 당신은 이 곳을 또 올것인가? 아니. 여태까지의 모든 걸 생각하면 다신 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럼 탈출할 당신에게 규칙서는 필요한가? 당신은 규칙서를 내려다 보았다. 여기저기 피에 물들어 있고 조금씩 찢겨진 모습은 마치 쓰다가 버려진 종이와 닮았다. 







규칙서가 탈출해서도 필요할까? 라는 생각을 하던 당신은 조금 잔인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다시 오지 않을 곳, 규칙서를 제물 삼아 탈출한다면 좋은 거 아닌가? 







결국 당신은 그 존재에게 규칙서를 내밀었다. 







"...좋은 생각이야! 너는 이제 여길 안 올거니까, 규칙서 따위는 필요하지 않지. 안 그래? 좋아, 특별히 널 위해 여지껏 잃어버린 신체를 복구해줄게. 여기에서 나간 뒤 이걸 마셔. 그럼 돌아올거야. 다신 보지 말자고, 친구!"







그 존재는 호탕하게 웃으며 당신을 보내주었다. 벅차오르는 감격, 울분, 행복 등을 느끼며 당신은 당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당신은 아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옛날에 갔었던 끔찍한 곳을 잊기 위해 당신이 좋아했던 카페라떼를 마시며 여유를 느끼던 당신은 슬며시 올라오는 수면욕에 허벅지를 꼬집었다. 지금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면욕 대신 암전이 당신을 덮쳤다. 어둡기만한 시야에서 정신을 잃어버린 당신은 뭔가, 익숙한 바닥이 보였다. 







피가 낭자하고 떨어진 살점이 흔하게 널려있는 바닥. 번쩍 정신이 든 당신은 빠르게 몸을 일으켜 세운다. 절망적이게도, 당신의 제일 아프고 힘든 기억의 그 장소이다. 규칙서를 바치고서 빠져나온 곳을 다시 온 당신은 절망에 찬 얼굴로 탈출을 도와준 그 존재가 어정쩡하게 웃고 있었다. 그 존재는 당신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미안미안 친구. 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는걸? 네가 규칙서를 받치고 나간 그 날에 들어온 사람이 다시 규칙서를 만들더라고. 그래서 너처럼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의 다른 사람이 규칙서를 들고 왔길래 너처럼 대해줬어. 그리고 네 사례를 말해주면서 규칙서가 탈출하기에 쉬울 거라고 꼬드겼는데, 걔가 갑자기 분노하지 뭐야? 걔는 나가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걸 주고, 신체를 복구하는 것 대신 널 다시 불러달라고 했어. 결국 걔는 죽었지만, 난 어쩔 수 없었다고! 대가를 받았으니까, 기꺼이 응해야 하지 않겠어?"







허탈하게 바라보던 당신의 눈에는 이제서야 보이는 사실이 있었다. 아주 작은 머리 위 양쪽 뿔, 휘적거리는 꼬리까지. 당신이 인터넷에서 흔히 보던 악마의 모습이다. 왜 저번에는 보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꽉 채운다. 







"그러니 이해해 주길 바래. 너는 규칙서가 없으니까 탈출하기는 무리일거 같으니 이만 가볼게. 나도 은근 바쁘다고?"







왠지 비릿하게 웃던거 같은 그 존재가 홀연히 사라지고 나서 당신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있었다. 







왠지... 뒤에서 숨소리가 들리는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