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거세지는 않지만 맞고 가기엔 부담스러운 비에 유상아는 회사 정문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지하철까지는 꽤 멀텐데..."


 평소 애용하던 자전거는 없었다. 또 잃어버리기 싫어 일부러 두고 온 것은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 아니었을까.

 비가 오는 이상 타고 갈 수 있었을 리 없었으므로, 그건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녀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우후죽순 내리는 비를 막을 우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마냥 기다릴 뿐이었다.

 어찌보면 그건 자업자득이었다.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의도가 뻔히 보이는 탑승 제안을 거절한 것까지도.

 이미 각오했다는 말로 넘기며 떠나보낸 것들은 그녀에게 꼭 필요했던 것들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가장 싫어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그 기묘한 용기의 댓가로 그녀는 마냥 정문에 서 있을 수 밖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흐린 하늘이 맑아오기를 기다리고, 한 번 틀렸던 일기 예보가 다시 예보하는 비를 부정하며, 기적이라는 것에 기대보는 시시한 일 따위를.

 그러다 보니, 어쩌다 그가 생각났다.

 김독자. 그녀의 회사동료. 탕비실 사건에 대해서 침묵해줬던 사람. 그와 그녀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입이 무거웠으니까.

 그러한 이유들을 들어서, 그녀가 그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상아씨, 거기서 뭐하세요?"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유상아는 뒤를 돌아봤다. 원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오는 것일까. 덧붙여보자면 그건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해당되던 것이던가.

 그는 그녀의 뒤에 있었다. 그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검은색 우산을 든 채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아, 그게 우산이 없어서요..."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너무 정신을 놓고 있진 않았을까 따위의 걱정이 있었지만, 보아하니 그런 일은 없던 것 같았다.


"...혹시 어느 방향으로 가세요?"



-


10여분이 더 지났지만 아직 비가 내리는 날씨에, 유상아는 우산을 쓰고 있었다. 김독자에게서 우산의 반을 빌린 그녀는 일부러 앞 만을 보려 노력했다.

 그녀의 손은 그의 손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손이 서로 스칠까 말까 할 정도의 아슬아슬한 거리.

 그것에 오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유상아는 볼이 뜨거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을, 어쩌면 그것들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을 무시했다.


"비가 내일도 올까요?"

"슬슬 장마기라 아마 그러겠네요. 아직은 왔다갔다 하지만."


 발걸음에 물이 찰박거렸다. 곳곳이 물 웅덩이라 비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었고, 더 생겨나고 있었다.

 그런 길을 걷다가 던진 한 두마디에, 고작 그 이유로 대화가 이어나가졌다. 원래 두 사람만 있을 땐, 어색함을 줄이려 아무 말이라도 하게 되는 것이다.


"꽤 늦은 시간이던데, 아직 남아계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겠네요, 원래는 시간만 되면 갔었으니까. 그러다보니 눈치를 많이 주길래, 나가는 건 조금 늦게 했어요."

"그 캐비닛에서요?"

"네, 거기서요. 아무래도 약간 사회에는 적응하기 힘들어서 그런가."


 말이 잠시 끊겼을 때, 유상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약간 특이하던 사람.

 그녀와 같은 회사의 직원.

 김독자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사람과의 공통점을 주장하고 싶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게도.


"제가 왜 남아있었는 지 아세요? 그건 태워다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해서에요. 대놓고 싫다고 했으니까, 저도 이번엔 살짝 밉보였을 걸요?"


 왜 그런 충동이 들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유상아는 약간의 자신감을 가지고 말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가 그녀를 쳐다봤기 때문에, 유상아는 묘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렇군요. 확실히 치근덕대는 사람들을 귀찮아하시는 것 같으시긴 했어요."

"아, 티났었나요. 그러면 이제는 확실히 안 건드리려나."


 유상아는 웃으면서 넘겼다. 그렇게 두 세 발자국 정도 더 걷다가, 다시끔 입을 열었다.


"역시 김독자씨는 편한 사람이에요."

"갑자기 말입니까?"

"전에도 하고 싶던 말이라 제 딴엔 갑자기는 아니긴 한데, 김독자씨는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좋다는 얘기에요."


 김독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 데요."

"그래요? 그러면 계속 말해줄까요? 이래봐도 진심이었으니까."


 하기야 그건 진심이었다. 조금 전 뱉었던 말에 거짓은 아무것도 없다.


"우산 같이 쓰게 해주신 것도 친절해서 좋았어요."


 설령 그게 의례차 한 말인양 몰래 덧붙인 말이라 해도, 그것또한 진심이었다.

 유상아는 김독자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긴 장마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