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음집


이전화


"일어나셨어요, 주인님?"

"좋은 아침이야, 콘스탄챠."


이튿날, 어제처럼 눈을 뜨자 콘스탄챠가 아침인사를 건냈다.


"참, 포츈 언니가 주인님께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어요."

"포츈이? 무슨 일로?"

"외부관련 정비사항에 관한 일이에요. 자세한 건 언니가 직접 보고드릴 거고요."

"외부…음…"


하긴, 언제까지 바닷속에만 머무를 순 없지.


철충으로부터 지상을 탈환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현재 발견된 유일한 인간으로서, 문명을 재건해야 하는 게 내 의무 아닌가.


분명 포츈도 그것과 관련해서 날 찾는 거겠지.


이따 식사하고 나서 바로 가봐야겠다.


"어서 와, 사령관님~"

"좋은 아침이야, 포츈! 부탁할 일이 있다고?"

"응. 앞으로 우리가 해야 될 일들 중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한 사항을 정리했거든? 마침 어제부로 콘스탄챠가 사령관님 부관을 맡았다길래 사령관님께 전달 좀 부탁한 거야."

"음. 중요한 거라면 빨리 해두는 게 좋지. 무슨 부탁인데?"


포츈은 들고 있던 패널을 내밀었다.

패널엔 소형 자동차만한 커다란 장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이게 뭐야?"

"통신용 신호 발생기. 이건 대형 모델이고, 이것들은 소형 모델이야."

“통신이라면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합류시키려고?”

“정답이거든? 아무래도 흩어진 동생들이 좀 많으니까 데려오면 일손도 채울 수 있을거야.”


포츈은 패널을 조작해 새로운 창을 띄웠다.

인근 지도 위에 빨간 점들이 군데군데 반짝이고 있었다.


"이건...

"어제 콘스탄챠가 통신 확인한다면서 찾은 거거든. 동생들이 마지막으로 신호를 보낸 곳이야."


빨간 점들의 수는 대략 16개 정도.

그렇다면 저만큼의 저항군 소속 바이오로이드들이 이 근방을 떠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여기로 오라고 신호를 보내려는 거구나."

"그렇거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얼른 다시 여기로라도 합류를 했으면 좋겠거든. 만약 다치기라도 하면, 누난 너무 가슴이 아픈 고야..."

"오르카호는 통신 기능이 없어?"

"급하게 건조한거라 없는 기능들이 많거든. 그러니 통신기 설치는 필수라고 봐야 해."

"그럼 이따가 인원들 추려서 데려가. 근데 설치는 어디다 하려고?"

"우선 오늘은 등대에다 대형 모델을 설치할 생각이야. 소형 모델은 내일 전파가 안 닿는 사각지대에 설치할 거거든."

"좋아, 그렇게 해."

"후후, 역시 사령관님. 누나 완전 감동이야♡ 그럼 부탁하는 거거든?"


신호 발생기 작업은 포츈과 익스프레스 단 둘이면 충분했다.


익스프레스가 신호 발생기를 등대 상층부로 운반하고,

포츈이 등대 상층부로 올라가 설치 작업을 하면 끝.


하지만 하루 일과를 고작 이걸로 끝내는 건 말이 안되지.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 및 인프라 구축을 염두해둬야 한다.

그러니 다른 이들 또한 적절한 작업을 지시해두었다.


"주군을 위해 탐사를 시작하겠네."

"음…네! 잘 다녀올게요!"

"이것저것 챙겨올게요 사령관님."

"네~ 익스프레스, 출발합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동료들과 친해질 수 있으면 좋겠네요."


연구실이나 기지처럼, 오르카호의 여러 기능을 활성화시키려면 필요한 자원을 조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투 경험이 없는 이가 대다수인 상황에, 무작정 인근 마을까지 자원 탐사를 시킬 순 없진 않은가?

어제 잡은 철충 부품만으로도 왠만한 건 처리가능하다고 하길래 어젯밤 터널에서 잡은 놈들 부품을 뜯어올 스쿼드를 조직했다.


멤버는 요안나와 마이티 R, 실키, 익스프레스, 팬텀.


부품 채집 및 운반은 실키와 익스프레스가,

철충의 기습에 대비해 요안나와 마이티 R, 팬텀을 한 팀으로 편성했다.


"맡겨 주세요. 주인님."

"히잉... 짐은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헛소리말고 빨리 와!"

"다녀올게, 주인님~ 기대하고 있어."


나머지 인원들은 경계조다.


만에 하나, 철충이 자원탐색조를 뚫고 올 수도 있고,

그럴 때는 이들이 포츈을 지켜야 하니까.


“잘 다녀오세요, 여러분~”


금일, 콘스탄챠를 대신해 부관을 맡은 그렘린과 함께 대원들을 배웅했다.


그렘린은 전투 공병이라는 모양이다.

내가 오기 전까지 포츈과 함께 오르카호를 정비하다 거의 잠을 못자다시피 했다고도 하니...


포츈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렘린은 체력 이슈가 워낙 심했다고 한다.

그저께, 어제는 하루종일 자느라 나는 물론, 새로 제조된 바이오로이드들과도 인사를 제대로 못 나눴으니까.


“몸은 좀 괜찮아?”

“음…아직 살짝 졸리긴 하지만, 괜찮아요. 이틀이나 잤으면 충분하니까요.”

“무리하지마.”


아무리 강건한 바이오로이드라 한들, 생명체에 필수로 적용되는 순환 알고리즘에서 자유롭진 않다.

꽤나 오랫동안 피로가 쌓인 모양이니 도움이 절실할 때만 부르고 지금은 더 재우는 게 낫겠지.


“함내 기반 시설은 활성해뒀으니, 뭐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지금 활성가능한 기능이라면 자원 재활용 1단계, 로봇 제작 설비, 지휘 대행 시스템, 정밀 레이더 시스템이 있네요. 참고로 바이오로이드와는 다르게, AGS 제작엔 로봇 제작 설비를 연구해야 해요.

“좀 자도 되는데.”

“어느 시설을 먼저 개방하냐에 따라 향후 해야 할 과제가 달라지거든요. 콘스탄챠 언니도 중요한 일이니 이것만큼은 꼭 옆에서 지켜보라고 당부받았다고요?”


하긴 포츈도 나갔으니 주요 시설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 건 그렘린 밖에 없다.

그리고 어느 시설을 가능한 빨리 개방하는 게 좋은지 설명해줄 수 있는 것 역시, 말이다.


물론 포츈이 대략적으로 설명을 적어놨긴 했으니 사실상 보조역이라고 해야겠지만.


“어디 보자, 기능은…”


[자원 재활용]

오르카호엔 함내 자원 재활용 시설이 있어 자체적으로 자원 회복 기능이 가능해.

그걸 개량하면 자원 생산 효율을 올리는 게 가능하거든!


“…포츈답네.”


나머지 기능들도 확인해보자.


[로봇 제작 설비]

아직 데이터가 없어서 연구 불가능하거든!

철충 감염이 안 된 AGS를 최소 두 대 이상 찾아야 해!


“…이거 뭐야?”

“앗, 잊고 있었어요!”


자세히 들어보니, AGS는 AI 로봇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라고 한다.

어제 치열하게 싸워댔던 철충 역시, 본래는 폴른이라는 AGS였다는 모양이고.


AGS는 바이오로이드에 비해 개체별 기본 스펙이 높다고 하니,

이 기능도 활성화해두면 향후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지휘 대행 시스템]

사령관님의 뇌파를 복사하고, 쌓아둔 전투데이터로 사령관님 행동패턴을 학습시켜 지시를 내리는 거야!

하지만 사령관님이 직접 명령을 내리는 것보단 못할 거거든…


오, 이건 좀 괜찮다.

세력이 늘수록 나 혼자 모든 전투를 담당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전투경험은 풍부하되, 명령의 제약이 걸리던 이들한테도 큰 도움이 되겠지.


“이건 당장은 아니더라도 꼭 해야겠다.”

“좋은 생각이에요. 바로 사용하진 못하더라도 데이터를 쌓을수록 성능이 올라갈거에요!”


그럼 이제 마지막은…


[정밀 레이더 시스템]

함내에 감지용 정밀 레이더 시스템을 구축하는거야!

성능은 그것뿐이지만, 탐사 구역 분석이랑 운송 드론 연구하는데 필수라 대충 넘기면 곤란하거든!


“이것도 중요한 거네.”


탐사 구역 분석, 운송 드론 모두 자원 탐사에 유용한 기능이다.

지금이야 여유가 있다지만 세력이 커질수록 소모되는 자원도 많아질테니 이것도 꼭 해야된다.


하지만 지금 당장 지금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자원 재활용 뿐이니…


"자원 재활용으로 가야겠다."

"좋은 선택이세요. 하지만 아무리 자원 재활용 기능을 업그레이드해도, 외부에서 자원을 충당하는 걸 소홀히 하시면 안돼요!"

“물론이지. 아니면 정밀 레이더 시스템이랑 연관 기능들이 왜 있겠어?”


탐색조가 복귀하는대로 자원 재활용 기능을 활성화시켜두자.


잘하고 있으려나?


띠리리리!


"어...?"

"엥?"


마치 기다렸다는 듯, 탐색조가 비상 연락을 걸어왔다.


“빨리 경계조한테 탐색조가 비상 연락 걸었다고 전해.”

“네, 네!”


분명 철충이다.

아니면 걸지도 않았을테니까.


‘무사해야 할텐데…’


비록 전투 경험은 없어도 그래도 쉽게 당할 이들은 아니지만…


제발, 별일 없기를.


그 시각, 자원탐색조는 요안나의 안내를 따라 등대 앞 터널로 진입한 상태였다.

이틀 전, 전투를 벌였던 당시엔 철충이 터널 끄트머리에 대기하고 있었기에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철충 사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일세. 이틀 전에 주군의 지시로 놈들을 멋지게 무찌른 곳이네."

"그럼 저게 철충이라는 거군요."

"그래. 역할에 따라 모습이 다르긴 하지만, 저 개체들은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지."

“그런데, 터널에선 총 9마리의 철충과 싸우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4마리밖에 없는거죠?”

“아, 4마리는 여기보다 조금 더 앞에서 잡았네. 여기서 마주했던 5마리 중 하나는 저 밑으로 굴러떨어져서 그런거고.”

“엑? 굴러떨어져요?”

“그땐 그리폰과 콘스탄챠 둘 다 장비를 보강받지 못해서 나이트 칙 실더의 방어를 뚫기엔 충분치 않았네. 짐 역시 마찬가지였고. 주군께서 목숨을 걸어가며 놈을 유도하지 않았다면 필사 다 죽었겠지.”

“히익…”

“뭐, 그때 일은 그때 일일세. 지금은 자네들이 있지 않은가? 짐은 등을 맡길 동료가 생겨 기쁘다네. 잘 부탁하지.”


요안나의 덕담 덕에 신고식은 훈훈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작업 역시 순조롭게 이어졌으며 요안나, 팬텀이 철충을 해체하면 실키가 쓸만한 부품을 골라내 배낭에 따로 분류해 넣어두었다.


"흐음...이 구조라면, 여기다 칼집을 내고 폭탄을 넣는 것도 괜찮겠네."

"구조를 파악하고 전술을 고려해본다니, 이건 생각 못했군. 주군이 같이 보낸 이유가 있었어."

"아, 아니에요. 그냥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러니까 그런거지. 참으로 믿음직스럽군."

"에헤헤..."


“……”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거 맞나?

딱히 할 것이 없어 근처에서 대기하던 마이티 R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장비는 철충 해체에 적합하지도 않고,

부품 분류는 어디까지나 실키의 업무.


사령관은 철충이 나타나면 쓰러트릴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교전에 임하면 된다고만 말했지만…

이건 너무 할 게 없지 않은가.


나름 각오도 다졌는데 대기만 하고 있으라니.

생각해보니 내심 자존심 상하기도 하지만 명분이 없었다.


"비상이에요, 비상!!!"


그때, 익스프레스가 급하게 날아왔다.

분명 신호발생기를 옮기면 곧바로 실더의 부품을 회수해 탐색조에 합류하기로 했을텐데.

무슨 일이길래 실더를 아예 통째로 들고 온 거지?


“반대편에서 철충이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오고 있어요!”

“뭣…!”

“엑?”


철충이 이쪽으로 온다면…등대로 돌아가 전투 태세를 갖추는 건 힘들 것이다.

놈들의 이동 속도는 빠르니까.


그렇다면…!


마이티 R은 아직 해체 작업이 끝나지 않은 철충 사체에 다가가 몸을 착 붙이고선 무게를 실어 있는 힘껏 밀어냈다.


“…지금 뭐하는 건가?”

“바리케이드를 만들려고요! 아무리 철충이라 해도 이 정도되는 물체와 충돌하면 몸이 성하지 않겠죠!”

“그게 무슨…아!”


터널이 넓지만, 철충 사체 다섯을 일렬로 늘어놓으면 사람도 제대로 빠져나가기 힘든 바리케이드가 된다.

내구 또한 상당하기에 그냥 무턱대고 들이받아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짐도 돕겠네!”

“저, 저도!”


마이트 R의 의도를 눈치챈 이들도 가세한다.


요안나와 팬텀, 실키가 힘을 합쳐 하나를 미는 동안,

마이티 R이 하나 더, 익스프레스가 나머지 것들을 배치한다.


이걸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사령관한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설마 등대까지 쫓아올 줄이야.


마지막으로 날 본 곳이 등대 근처여서 등대에 있을거라 생각한 걸까.

아니면 내 수족이라도 끊어버려 고립시키려는 속셈인걸까.


‘일단 지금은 놈들에게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하자.’


탐색조 멤버들은 요안나를 제외한 전원이 전투 경험이 없는데다,

무기 또한 실더 두 마리와 공격수 세 마리라는 조합을 뚫기에 적합한 것도 아니다.


만약 마이티 R이 바리케이드를 쌓지 않았다면 탐색조는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중에 반드시 공표하고, 합당한 포상을 주자.


“바리케이드는 시간벌이에 불과해. 실키의 배낭도 임시 바리케이드로 써.”

“알겠네.”

“실키, 일회용 부스터 좀 꺼내놔. 바리케이드가 뚫리면 기회 좀 보다 이쪽에서 공격할거니까.”

“알겠습니다.”

“익스프레스는 실더가 바리케이드를 타고 넘어오면 잡아서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고.”

“맡겨줘!”


콰지직!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요란한 충돌음이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철충 바리케이드가 이쪽으로 밀려난다.

분명 실더가 실더차지로 바리게이트에 돌진한 것이리라.


"익스프레스, 준비해."

"…응."


보고 받은 철충 중 바리게이트를 단시간에 파훼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실더 뿐이다.


어지간한건 죄다 실더 차지로 밀어버리니 불도저로 많이 불리는 나이트 칙 실더.

녀석이 나이트 칙, 나이트 칙 런처보다 위험한 이유는 바로 점프해서 내려 찍어버리는, 육중한 무게를 제대로 살린 공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방어력을 과신하는 나이트 칙 실더는 바리케이드를 파괴하기보다, 그냥 뛰어넘어와 경계조를 몰살시키는 게 더 효율적이라 판단할 것이다.

그러니 둘 중 하나는 이곳에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처치할 수 있는 익스프레스한테 맡겨야지.


나이트 칙 계열의 철충은 960kg에 달하는 폴른이라는 AGS을 잠식해서 생긴 개체다.

1톤이 훨씬 높는 자동차도 들고 나를 수 있는 익스프레스가 그것도 못 나를리가.


그러면 남는 한 놈은...


"팬텀, 광학 미채를 활성화시켜."

"네, 사령관님."

"그리고 요안나랑…"

"...알겠습니다."


준비는 끝났다.

저 놈들이 여기서 살아돌아갈 일은 없을거다.


쿵! 쿵!


육중한 소리가 두 번.

이윽고 실더 둘이 바리케이드를 넘어온다.

예상대로다.


“쇼 타임.”


곧바로 익스프레스가 실더 한 놈을 붙잡아 낭떠러지 아래로 내던져버린다.

순식간에 비탈길을 굴러, 저 아래로 사라지는 실더.


"......"


갑자기 동료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남은 실더는 상황판단이 되지 않았는지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

전장에서 얼타고 있는 건 죽여달라는 거나 다름없는데.


"내 주는 강한 성이니, 나를 뚫을 순 없으리!"

"...!"


작전대로 요안나가 앞에서 주의를 끌기 시작한다.

카이트 실드를 활성화시키는 동시에, 천천히 검을 들어올린다.


찬란하게 빛나는 검이 높이 올라가다…

이내 황금빛 직선이 내려그어진다!


팍!


그와 동시에, 실더의 오른팔에 남는 거칠고 깊은 칼자국.

이게 과연 우연일까?


“???”


실더는 자신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분명 요안나와 자신 간에는 나름 거리가 있다.


제 아무리 칼을 휘두른다 한들,

자신의 방어를 뚫고 상처를 입히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어떻게…?


휙!휙!휙!

팍!팍!팍!


듀랑달이 춤을 추는 것에 맞춰, 실더의 몸에도 상처가 계속 늘어난다.

견고한 방어력을 자랑하던 방패는 이미 잘려나간 양팔과 함께 바닥을 굴러다닌다.

이 이상 공격을 받으면 제 아무리 실더라 해도 버텨내지 못한다.


"……”


형체없는 공격을 받아낸 끝에, 실더는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거리와는 상관없이, 눈 앞의 적은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대상을 벨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승산 따윈 없다.

도망쳐야 한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 요안나가 듀랑달을 역수로 쥐고 아래로 내리찍으려는 자세를 취한다.


"......"


실더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든, 다가오는 최후를 벗어날 수 없다고 확신했기에.


"...!"


요안나가 검을 바닥에 내려 꽂는다.


콰아앙!!


기체 내부에서 성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천천히 쓰러지는 실더는 자신의 의식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눈 앞의 적에게 전율했다.


"쉬웠군."

"쉬웠네요."


요안나가 칼을 되뽑아 재정비를 하는동안, 팬텀은 광학 미채를 해제한다.


"훗..."

"풋..."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곱씹어보던 요안나와 팬텀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끅끅거렸다.


"혹시 웃을 뻔하지 않았나? 짐은 참느라 고생이 심했다네."

"맞아요. 사령관님이 지시를 내리실 때까지만 해도 이게 이렇게 잘 먹힐 줄은 몰랐거든요."

“도중에 바리케이드 너머의 철충들도 조용해졌을 땐 정말 참기 힘들더군.”


둘이 한 행동은 별 것 아니었다.

그저 요안나가 화려한 검무(劍舞)를 펼치는 동안, 팬텀이 그에 맞춰 실더를 난도질한 것에 불과했기에.

팬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실더는 말 그대로 농락당하다 죽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하네, 주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지?"

"그러게 말이에요. 저희도 웃음 참느라 힘들었다고요."

"하하하…이렇게 싸우면 되는건가보네요."


첫 출전인걸 감안하더라도, 듣도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전투법으로 철충을 쉽게 무찌르다니.

과정이야 어찌됐든, 탐색조의 사기는 한껏 올라있었다.


"주군, 이 기세로 남은 철충들도 모조리 박멸하도록 하지!"

“좋아. 지켜줄 실더도 없으니 공격하면 막아내지도 못하겠지.”


철충들은 이쪽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모양인지 잠시 바리케이드 철거를 멈춘 상태.

그것도 잠시, 곧 다시 철거를 재개할 것이다.

그렇다면…


“익스프레스, 지금 실더 사체랑 배낭을 요안나 양옆으로 옮겨.”

“알았어.”

“실키, 팬텀, 마이티 R. 이젠 너희가 핵심이야.”

"알겠습니다."

"네, 사령관님."

"시작할까요!"


브리핑을 빨리 끝내고 탐색조를 임시 바리케이드 뒤에 계속 대기시켰다.


이윽고 철충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철충 바리케이드가 계속 뒤로 밀려났다.


잠시 후, 런처의 미사일 세례를 받은 철충 사체가 산산조각이 난다.

동시에 철충들이 붉은 안광을 빛내며 안쪽으로 들어왔다.


요안나를 보자마자 총구를 겨누는 철충들.

그러나 옆에 실더의 시체와 실키의 배낭이 놓여진 걸 보고 경계태세로 들어갔다.


예상은 했겠지만 실더가 모조리 죽은 것도 그렇고, 보이는 적은 하나인데다, 그 옆에 떡하니 놓인 수상한 물체 둘.

이러면 뒤에 적이 엄폐하고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실제로 엄폐하고 있는 것도 맞으니까.


하지만 그렇다한들, 시간을 끌어선 안됐다.


"뛰어, 요안나!"

"하아아아아!"


이쪽은 생각할 시간 따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돌연 요안나가 자신들 쪽으로 달려나오자, 철충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저지하려 든다.


"주군을 향한 충성은! 쉽게 깨어지지 않는 법이다!!"


빗발치는 미사일과 총알에도 아랑곳않고 달려나가는 요안나.

그야말로 용맹스러운 기사의 모습과 같았다.


이대로 가면 실더처럼 당할거라 생각한걸까.

철충들이 도망치려는 듯 다급히 뒷걸음질친다.

누가 보내줄리가 있나.


"실키!"


지시에 맞춰 숨어있던 실키가 철충들한테 점착탄을 던진다.

직격하자마자 순식간에 흘러내리고, 이내 딱딱하게 굳는다.

철충들은 이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요안나와 철충들의 거리는 조금 멀다.

온 힘을 다해 달려간다 할지라도 그녀가 베어버리기 전에 점착탄이 부스러지겠지.

그걸 알고 있기에 철충들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하는 것일 터.


"이거나 먹어라!"


그 순간, 녹색 실루엣이 요안나를 스쳐 지나가,

단숨에 런처 한 놈을 향해 박차고 달려나간다.


어떤 고된 운동이든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육체가 자아내는, 깃털같은 발놀림.

거기에 실키가 건네 준 일회용 부스터가 더해지니, 그 기세는 마치 바람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다.


"…!"


펭귄처럼 날아와 제비처럼 쏘아대는 주먹에 나이트 칙의 기체(機體)가 힘없이 우그러진다.

마이티 R의 스프린트에 휘말린 런처들도, 한순간 주춤거린다.

그리고 현직 트레이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아아!”


육중한 바벨이 런처를 향해 있는 힘껏 휘둘러진다.

동료들조차 식겁할 정도로 거친 파쇄음이 터널에 울려퍼진다.


파직...


그 순간, 사용을 다한 일회용 부스터가 부스러진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런처가 마이티 R을 겨냥하지만,

그녀는 이미 방어막을 활성화한 요안나의 뒤로 몸을 숨긴 상황.


“……”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아도 왠지 모르게 화가 난 듯한 런처는 어느새 가까이서 접근해오는 팬텀을 포착한다.

비록 마이티 R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빠르게 접근해온다.


흠칫 놀란 런처가 뒤로 물러서지만, 팬텀은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 칼을 휘두르려고 팔을 크게 뒤로 뻗고 있다.

죽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자, 런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필사적으로 팬텀한테 미사일을 날려댄다.


"...!"


그러나 미사일은 팬텀을 그대로 통과해, 바리케이드를 두들겼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잔상이다."


팍! 팍!


그때 방금 전에 칼을 휘둘렀던 팬텀과는 별개로, 또 다른 팬텀이 불쑥 나타나 런처를 거칠게 베어낸다.


방금 쓰러트린 팬텀, 그것은 그저 팬텀이 일전에 받은 [더미 홀로그램]으로 만든 환영에 불과했던 것이다.


타타타타탕!!


순식간에 적을 난도질한 팬텀은 뒤로 크게 도약하더니 품에서 기관단총을 꺼내 갈겨댄다.

강력한 참격을 허용해버린 런처의 기갑(機甲)은 너덜너덜해져서 총알세례를 견뎌내지 못한다.


이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런처.


마지막 적을 멋지게 처리한 팬텀이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동료들과 미소를 교환한다.

말 그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다들 수고했어. 첫 출전이 되리라곤 생각못했는데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오늘 일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자.”


복귀한 탐색조들을 쉬게 하고, 가져온 자원들을 확인했다.

어제 잡은 철충뿐만 아니라 새로운 적들의 부품까지 확보하다니.

이 정도 양이라면 곧바로 자원 재활용 기능은 물론, 또 다른 기능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남는 걸론 지휘 대행 시스템 기능 켜는데 쓰자. 그나저나 포츈은 아직 작업이 안 끝났나? 등대 쪽은 별일 없는 모양인 듯 한데…”


아까 그 철충들은 분명 우릴 노리고 온 게 분명하다.

어쩌면 여기서 끝난 게 아닐 수도 있고.


추가 병력이 올 걸 대비해, 그리폰한테 주변 정찰 및 경계, 주기적으로 보고하라고 했다.

뭐가 오더라도 곧장 대응할 수 있겠지.


“그럼 남는 시간 동안 뭘 할까…”


그렘린은 자게 내버려뒀고, 복귀한 탐색조는 숙소에서 쉬고 있다.


…일이나 할까?


“철충 발견 문서?”


할 일을 찾던 중, 철충에 대한 정보를 정리한 기록을 찾아냈다.


그러고 보니, 왠진 모르겠지만 난 철충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

그걸 추가해두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용을 확인하러 문서를 열람했다.

어쩌면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정보들이 여기 기록되어 있…


[나이트 칙 런처]

흔히 볼 수 있는 미사일로 무장한 철충입니다. 무조건 앞으로 돌격하는 모습이 브라우니와 비슷합니다.

- 보고자 레프리콘


[나이트 칙]

하아… 이 예쁜 애의 이름은 나이트 칙입니당. 예쁘지만 더 예쁜 폴른이를 잡아먹은 무서운 녀석들이에용. 쉬지않고 기관총을 난사하니 주의해 주세용~!

- 보고자 그렘린입니당!


[나이트 칙 실더]

이 자식들 짜증나 방패를 들고 앞을 자꾸 가로막거든? 다행히 머리가 나빠서 바로 뒤만 가로 막지만… 어쨌든 이 녀석들이 방어 자세를 취하기 전에 뒤를 정리해 두라고!

- 보고자 그리폰


…?


기본적이거나 유익한 정보는 온데간데없다.

왠 감상평같은 것만 남아있는데…이게 뭐지?


그리폰은 잘했고, 레프리콘은 그렇다쳐도…그렘린은…

하…


“주군, 불렀나?”

“이게 뭐야?”

“음? 이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요안나를 호출했다.


사실, 이 문서는 본래 본부로부터 데이터를 전송받고 있었는데, 습격당하는 바람에 오류가 나, 데이터가 말소되어버린 모양이다.

그나마 남은 기록들도 해당 철충에 대한 대원의 평가 정도만 남은 것 같다는 게...


“그럼 이거 내가 수정해도 상관없겠지?”

“첫날 때도 그렇고 주군은 철충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으니 상관없네. 무엇을 쓰든 건에, 저런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그래, 심심한데 이거라도 해야지.”

“첫날부터 무리하지 말게. 지금은 이 근방에 나오는 철충에 보다 호율적으로 대응하는 게 우선이니 일단 주군이 봤거나 발견 보고를 받은 철충만 수정해주게나.”


요안나의 조언을 새겨 들으며 나이트 칙 런처, 나이트 칙, 나이트 칙 실더 항목을 수정하자,

어느덧 자원 재활용 기능 활성화 작업도 완료되어 있었다.


“지휘 대행 시스템만 더 하면, 오늘 할 일은 여기까지.”


이대로 포츈이 작업을 끝마치면 오늘 일과는 정말 이걸로 끝이다.

더 할 것도 없으니…내일은 뭘 할지 생각해보자.


띠리리!


“응? 포츈?”

“사령관님, 설치 작업 무사히 끝냈어! 이제 기다리면 동생들이 합류하러 등대로 올거거든?”

“아주 좋아! 고생했어! 다들 내려오라그래! 그리폰한테도 말해둘테니까!”


그러나 그 순간, 또 한번 호출이 왔다.

이번에 연락해 온 건 다름아닌 그리폰.


“사령관! 철충이 또 오고 있어!”


아, 제발.


이번에 오는 놈들 역시 5마리지만, 탐색조와는 배치가 조금 다른 모양이다.


“전열엔 실더 하나와 런처 둘, 후열엔 나이트 칙 하나, 그리고 중열엔…”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맞이하는 건 처음인 개체,

철충 대응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놈의 정보를 열람했다.


[나이트 칙 디텍터]

그 아이는 별로 위험한 아인 아니거든? 근데 자꾸 우리를 방해하는 공격을 하니까 다른 애들이랑 있으면 주의해야 하거든? 맞으면 다른 철충한테 지원 요청하는 못된 아이니까 혼내줘야행! 누나 보고 있을께~!

- 예쁜 누나 포츈이 보고해용~!



“…잘 정리되어 있네.”


말투는 둘째쳐도, 내용 자체는 정말 잘 정리되어 있었다.


나이트 칙 디텍터.

바이오로이드조차 견디기 힘들 유해전파를 발견하거나, 주변 인근에 위치한 다른 철충한테 지원 요청을 보내는, 매우 성가신 개체.

게다가 방해전파를 발산할 수도 있기에 이제 막 신호발생기 설치가 끝난 지금으로선 절대 무시해선 안될 존재다.


만에 하나, 디텍터의 방해 전파 때문에 내 명령을 전달받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지휘 대행 시스템 활성화 작업도 안 끝났으니, 여차하면 퇴각하라고 미리 말해뒀다.


“포츈, 그거 꺼내놔.”

“물론, 잘 부탁해!”


포츈은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빠르게 조립했다.

이윽고, 그것은 파란 안광을 비추더니 푸른 장벽 같은 걸 형성했다.


포츈이 개발한 초소형 바리케이드 로봇, 래빗 D 필드.

간단한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무지막지한 철충의 공격도 몇 번 정도는 아무 문제 없이 막아낼 수 있는, 뛰어난 가성비를 자랑하는 포츈 특제 배리어 생성기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안된다.

래빗 D 필드만으론 저들을 모두 보호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콘스탄챠.”

“네, 주인님.”


선제 공격이다.


땅을 뒤흔드는 육중한 발소리.

찬란한 햇살 아래 드리워지는 다섯 개의 칠흑같은 그림자.


방패, 미사일 발사대, 기관총, 커다란 안테나 비스무리한 무언가까지.

갖가지 장비로 무장한 철충들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


한발 앞서 출발한 동족의 것이라 추정되는 사체들을 지나치고,

길고 긴 터널의 끝에 다다른 끝에 시야에 들어온 목적지.


하늘을 향해, 높게 뻗어 있는 등대.

살덩이들은 필사 이곳에 모여있을 것이다.


제대로 찾아온 것을 확인한 철충들은 이대로 달려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달려나가려다 멈칫한 철충들은 고개를 돌려 나이트 칙 디텍터를 말없이 바라본다.

디텍터는 말없이 등대를 바라본다.


마치 등대에서 어떤 신호가 발산되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기이잉…


디텍터의 장비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다.

등대를 향해 방해전파를 발산하려는 모양이다.

그곳에 무엇이 있던 간에, 자신들한테 있어 좋을 건 아니라고 확신한 것이 분명하다.


탕!탕!탕!


그 순간, 세 발의 총성과 함께 열화우라늄 탄이 디텍터를 꿰뚫는다.


“…!”


사정거리 밖에서 날아온 공격.

그 사실을 눈치챈 디텍터는 황급히 뒤로 몸을 피한다.


다른 철충들 역시 곧바로 대열을 바꾸기 시작했다.

실더는 전열 그대로, 나이트 칙이 중열, 나머지가 후열에 자리잡는다.


또 한번, 콘스탄챠의 총이 불을 뿜지만 이번에는 실더가 공격을 막아낸다.

반대로, 실더의 뒤에 숨어있던 나이트 칙이 콘스탄챠를 향해 기관총을 연사해댄다.


타타타타탕!


래빗 D 필드는 나이트 칙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고선, 순식간에 철거되었다.

이제 남은 건 콘스탄챠와 LRL, 단 둘 뿐.


“…?”


디텍터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다.

선발대가 고작 이 정도에 죽을 병력이 아닌데, 왜 적들은 이것밖에 없는지 말이다.


순간, 실더는 자신이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몸에 오한이 내려앉는듯한 감각을 느낀다.


아니, 정정한다.

그것은 오한이 아니었다.


“얍!”


하늘 높이 날아오른 아쿠아가 실더한테 부식액을 들이붓고 있었기에.


치이익…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하는 열화우라늄 탄조차 간단히 막아낸 실더의 기체가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디텍터가 아쿠아한테 유해 전파를 쏘아댄다.

하지만 아쿠아가 미리 허공에 뿌려댄, 공기 중에 녹아든 소독 용액이 유해 전파의 흐름을 차단한다.


그리고 디텍터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날~아간다!!!”


하늘에 있는 적은, 하나만 있으리란 법이 없다는 걸.


내려찍듯, 공중에서 내리닥치는 그리폰을 발견한 디텍터는 황급히 그리폰을 겨낭한다.

여기서 디텍터는 세번째 실수를 저지른다.


“작렬하라, 사안이여!”

“…!”


그들을 지켜줄 실더는,


“멸절의…”


더 이상 없다는 걸.


“봉인을 풀어라!”


태양보다도 더 환한 빛에, 디텍터는 체념하듯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 괜찮네.”


2 웨이브를 무사히 격파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얼굴이 등대에 나타났다.


카우걸 복장을 한 워울프,

군인으로 보이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

모두의 친구를 자칭하는 토모,

뭔가 잔뜩 위축된 듯한 포티아.


포츈이 설정한 신호를 포착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는 모양이다.


“헥…헥…워울프…이 치사한 녀석…”

“자기 혼자…말도…안 하고…”

“……”


참고로 도착한 순서는 워울프가 첫번째,

두번째가 브라우니와 토모,

레프리콘과 포티아가 마지막이었다.


바퀴 달린 신발 덕에 기동력이 뛰어난 워울프가 확인한답시고 냅다 달리고,

브라우니와 토모는 뭘 혼자 가냐며 똑같이 따라 뛰고,

레프리콘과 포티아만 천천히 걸어왔다고 한다.


“그나저나 저~밑에서 철충들이 올라오는 걸 본 것 같은데, 여기로 오는 거겠지?”

“또?!”


그 순간, 경계조와의 통신이 끊겼다.


“사령관이 전파한다! 지금 전 인원은 무장하고 등대로 출격한다!”


나이트 칙 디텍터가 방해전파를 펼친 게 분명하다.

경계조를 고립시키는 것과 동시에, 내가 명령을 내릴 수 없게 만들어 무력화시키려는 수작.


“흠냐…? 사령관님, 안 그러셔도 괜찮은 것 같은데요.”


반쯤 패닉에 빠진 나를 그렘린이 진정시키면서 자신의 패널을 보여줬다.

아마 그렘린이 개인으로 소유한 드론으로 실시간 녹화하는 걸 보여주는 것 같은데…


“이게 뭐야?”


나는 그것을 보고선,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 뭐야! 고장이야? 사령관!!”

“그리폰! 디텍터가 방해 전파를 발산하는 모양이야!”

“하…”


그러고 보니, 분명 아까 정찰할 때 디텍터가 있는 걸 확인했었지.


전열에 실더 둘,

중열에 나이트 칙 둘이랑 디텍터 하나,

후열에 나이트 칙 하나.


‘꽤나 골치아픈 조합인데. 인간한테 명령도 못 받는데 어떡하지? 퇴각해야 하나?’


퇴각하면 자신들 모두 무사히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놓친 철충이, 자신들이 뭍으로 올라오는 걸 순순히 보고만 있을까?

뿐만 아니라 포츈이 애써 설치한 신호 발생기도 파괴될 것이다.


현 스쿼드의 리더인 그리폰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통신이 복귀될 때까지 버티냐, 퇴각하냐를 말이다.


‘복귀될 때까지 버티는 건…말이 안돼.’


이 이상현상의 주체가 디텍터인게 거의 확실한만큼, 통신이 스스로 복구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했다.

그리고 이곳엔 농성을 펼칠 정도의 엄폐물도 없다.

다른 인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지 장담을 못한다.


“어쩔 수 없네. 다들, 퇴각하자.”


동료들, 특히 포츈이 많이 안타까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 상황에서 교전했다간 몰살당할 확률이 높고,

인원에 절반 이상 공백이 생기면 퇴각하는 것보다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엥? 지휘 대행 알고리즘? 이게 뭐지 말입니까?”


지휘 대행?

그러고 보니 분명 명령이 내려지지 않아도 철충을 공격할 수 있게 하는 교전용 프로그램을 닥터가 개발해서 오르카호로 전송했다고 포츈이 말했었지?


“잠깐 멈춰봐. 작전 좀 짜게.”


잘만 하면…피해없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쉽잖아!”

“…잘하는데?”


지휘 대행 시스템의 알고리즘이 다운로드된 덕분인지, 내 지시없이도 잘 싸우고 있다.

특히 놈들이 도착하자마자 워울프가 달려들어 디텍터를 두동강 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이트 칙 디텍터는 실더보다도 튼튼하다고 들었는데요?”

“음, 저렇게 쉽게 잘릴 녀석은 절대 아니지. 저런 전사를 일개 병사 취급하는 ‘앵거 오브 호드’는 대체 뭐하는 이들인지 짐도 궁금해지는군.”

“’앵거 오브 호드?’”

“’칸’이라는 바이오로이드가 지휘하는 부댈세. 그들의 기세는 마치 폭풍과도 같아, 지나가는 곳마다 살아남는 적이 없다고 들었다만, 왜 그런 소문이 도는지 알 것 같네.”

“흠…”


그렇게 강한 부대라면 영입하는 게 좋지 않을까?

워울프를 보면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야! 아까 작전 다 알려줬는데 뭘 멋대로 행동하고 있어!”

“너무 길어서 지루하다고! 그냥 속전속결로 때려잡으면 그만인데 뭘 쓸데없이 머릴 쥐어짜고 있어!”

“너 이…!”


“엥…?”


뭔가…상황이 좀 이상하다?

방금 저게, 워울프의 단독 행동이었다고?


“헤에~사령관님. 호드 애들은 워낙 마이페이스가 많~아서요. 칸 대장 외엔 다른 사람 지시 안 듣는 걸로 유~명해요. 당장 워울프도, 옛날에 로망이다뭐다 하면서 갑자기 보급무기 버리고 어디서 쌍권총 주워왔다는 일화가 있거든요.”

“…설마 그 쌍권총이 지금 들고 있는 저거?”

“네~하지만, 그 워울프는 아닐 거에요. 그때 이후로, 워울프를 새로 개량해서 양산했다고 들었거든요요…아마 저 워울프는 양산형 개체일 거에요~”

“그래…아직 피곤한 것 같으니까, 더 자고 있어.”


일단 그렘린은 더 재우도록 하고.


다행히 지휘 대행 시스템은 내 명령을 모방하는 것이니만큼 공격의 제약을 완화시켜주긴 하는 모양이다.

다만 강제성까지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진 않지만.

뭐, 아무것도 못하고 어버버거리다 철충한테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아오! 저 멍청이를 진짜!”

“……”


아까 했던 말은 취소한다.

현장 지휘자의 역량이나 워울프 같은 녀석들을 고려하면, 지휘 대행 시스템은 남용해선 안될 것 같다.


“후…어디서 능력 있는 지휘관 좀 합류 안 하나?”


상념은 거기서 끝내야 했다.

남아있는 철충들 중, 실더가 곧바로 경계조를 향해 돌진했기 때문에.


“경계조! 경계조!”

“사령관!”


마침 통신도 복구되었겠다,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폰! 왼쪽 놈 잡아!”

“알았음!”


전황 분석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으니, 지금의 그리폰이라면 실더조차 한 방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뒤에 있는 실더랑 함께 맡겨두면 되겠지.


다른 실더는…


“포츈! 막아!”

“어머, 누나한테 맡겨주는 거거든?”


새롭게 깔린 래빗 D 필드가 실더의 공격을 막아낸다.

공격 한번에 위태롭다는 듯 깜빡거리는 걸 보면 내구도 자체는 요안나보다 한 수 아래인 것 같다.

뭐, 부담을 대신 지는 것이니 한계가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


“포티아! 해버려!”

“흐에에!”


머뭇거리던 포티아도 이내 결심을 내렸는지 손을 벌벌 떨면서도 실더를 정확하게 겨눈다.


화아아!


“…!”


포티아의 건틀릿에서 뿜어져 나온 불은 실더를 넘어,

중열에 자리잡은 나이트 칙까지 한꺼번에 태워버렸다.


실더는 내구도 뿐만 아니라 내열 기능까지 갖추고 있고 나름 버티고 있긴 하지만…


“토모! 해치워!”

“파이어 인 더 올!”


이어서 날아들어오는 토모의 수류탄 공격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폰도 실더와 나이트 칙을 처치했으니, 남은 건 오직 나이트 칙 한마리뿐.


하지만 녀석은 도망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 명이라도 길동무로 데려가겠다는 듯 공격 태세를 갖춘다!


“브라우니!”

“넵!”


이번엔 브라우니가 견제 사격으로 놈을 방해한다.

날아드는 총알 세례에 당황한 나이트 칙은 흠칫 놀라 뒷걸음질친다.


“레프리콘, 사격 개시!”

“다들 물러나세요!”


이어서 레프리콘의 총이 총알을 흩뿌린다.

브라우니의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위력이, 나이트 칙을 무참히 찢어발긴다!


“우와…저걸 버틴단 말입니까?”


나름 강력한 개체였던걸까.

놈은 쓰러지고 싶지 않다는 듯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왠지 이쪽을 내려보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던 나이트 칙은 다시 총구를…


“콘스탄챠.”


탕!탕!탕!


놈은 이번에야말로 무릎을 꿇는다.


“후…”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이게 내 일이구나.

그리고 오늘 내 할 일이 끝난 거구나.


쉬고 싶다는 마음, 책임감, 앞으로 뭘 하는지에 대한 궁리…

여러 생각이 뒤섞이는 가운데, 우선 대원들한테 해야 할 말부터 건넸다.


“다들 고생했어. 신입 환영회도 할 겸 다 같이 저녁먹게 내려와.”


활짝 웃으며 오르카호로 복귀하는 경계조와 신입들,

그리고 식사 준비를 하는 탐색조의 얼굴은 매우 밝았다.


…매일 이랬으면 좋겠는데.


“내가…계속 노력하면, 앞으로도 다들 웃을 수 있으려나.”

“물론이죠, 사령관님.”


잠이 깬 걸까.

어느새 그렘린이 옆에 서 있다.


“오늘 하루 고생하셨습니다, 사령관님.”

“수고했어.”


얼굴에 빙긋 미소를 짓던 그렘린은 조금씩 내게 다가오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

“그냥 오늘처럼, 사령관님이 하실 수 있는 걸 하시면 될 뿐인 거에요.”

“난…”

“만약 사령관님이, 힘이 부치신다면, 그걸 위해 저희가 있는거니까요. 그러니, 마음 편히 먹으셔도 돼요.”


할 말을 끝냈다는 듯, 그렘린은 저만치 가버렸다.

뭘까, 알면서도, 아직 잘 모르는 듯한 감정에 발이 묶인 이 느낌은.


“주군! 다 돌아왔다네!”

“사령관! 우리 왔어!”

“……!”

대원들의 얼굴을 본 순간, 내 마음을 옭아매던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래…

이건, 분명…


치지직…치직…치지지직…!


등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숲.

디텍터로부터 알 수 없는 신호를 듣고 있던 ‘그것’은 아무런 반응없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또한, 무수한 철충들도 ‘그것’의 앞에서 소리없이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다.


“@#&^%@&^#%@&^…#@^&%#&%@&%@&!!!”


그것도 잠시, 머리에 달린…흡사, 거머리를 연상시키는 입에서 기묘한 울음소리가 울려퍼진다.

그와 동시에,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한 철충 무리.


그것은 마치…


철충들이 ‘그것’의 지시를 따르는 것만 같았다.


다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