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은 꿈이라고 해도 좋을 달달한 환상이었다.
푸리나의 말처럼 어제 있었던 첫 경험은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여자의 몸은 아름다웠고, 부드럽고 따듯한 살갗을 맞대는 느낌은 전신에 전기가 달할 만큼 짜릿히다 못해 타버릴 것만 같이 기분이 좋았고 황홀하고 달콤했다.

육체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어제 그대로 죽는다 해도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 최고였다.

하지만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 해야 하는 순간이다.
어젯밤에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바람이었다.
치오리라는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빌려주겠다는 절친한 푸리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사고를 쳤으니까
그래, 이건 사고다. 상호 간 동의 하에 벌인 사고다.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와 치오리의 남자 친구로서, 그녀의 마음을 사야 한다.
푸리나 덕분에 여유가 생긴 탓일까 조금은 달라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모텔을 나간다.
5월의 새벽은 쌀쌀하지도 않고 후덥지근 한 공기로 가득했다.
이따금 불어오는 미약한 바람이 미적지근하게 몸을 통과 한다.

행선지를 딱히 정하지 않았고 버릇 처럼 익숙한 길을 산책하듯 걸으며 발을 멈추고 마중편에 있는 치오리 부티크를 본다.
첫눈에 반하고 그 이후로부터 아침마다 지금 있는 장소에서 치오리 부티크를 바라봤지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아침부터 그녀가 마감을 하고 나올 때까지 주변을 서성였다.

그러다 한번은 치오리 한테 업어치기를 당한 적도 있었고
잉여도 아니고 왜 계속 감시하듯이 맴도냐는 말에 그제야 치오리에게 한눈에 반했습니다. 사귀어 주세요. 라고 했다.
그때 치오리의 얼굴은 진심으로 역겹다는 얼굴을 했지만 반복된 고백에 결국은 사귀기로 했다.

근성은 인정하겠다며 말이다. 대신 3개월 안으로 자신을 지급할 수 있을 능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 관계는 끝이라고 선언했다.
이제 1개월 남짓. 아직도 어떻게 해야 치오리를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저쪽에서 치오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그녀의 출근 시간이 다 됐다.
치오리는 이쪽을 힐긋 보고는 부티크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 들어가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분명 쫓겨날 것이 분명했다.

"푸리나 녀석 일어났으려나."

푸리나 집에 가서 게임이나 할까. 발걸음을 돌려 가려는데

"야."

치오리가 가게 문을 열고 고개만 내민 채 불렀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어차피 할 일도 없으면 안으로 들어와 커피 정도는 대접해줄게."

귀를 의심했다. 그 치오리가 먼저 부티크 안으로 부를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몸을 돌려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티크 안으로 들어갔다.
치오리는 테이블로 안내하고 커피를 가지러 다용도 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향긋한 커피향이 부티크 안을 가득 채웠고 치오리가 컵을 내밀었다.
서로 마주 앉아 치오리는 고풍스러운 자태로 모닝 커피를 우아하게 마셨다.

"옛날 생각이 났어. 너 늘 부티크 마중편에 서성였잖아. 내가 퇴근할 때까지."

"그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어제는 내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매몰찼어. 그 점은 사과할게."

"나야말로 괜히 억지부려서 미안 해."

치오리가 어젯밤 일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게 의외였다.
어젯밤 일로 치오리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말을 걸어야 하는지 고민 했는데 치오리가 먼저 사과해주니 편했다.

"다음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사귀고 있어도 정식으로 연인 사이는 아니니까."

"알아. 체험판 연인 같은 거잖아."

"이제 한 달 남았는데, 너한테서 여유만 느껴지네? 값을 제대로 구한 거야?"

"아니, 아직 아무것도. 가닥 조차 잡지 못했어."

치오리가 놀라워하며 쳐다 봤다.
어젯밤 푸리나 덕분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가 치오리가 이전처럼 어렵지 않았다.
어제만해도 치오리 앞에서 그렇게 긴장이 되고 바보가 될 만큼 머리가 굳었는데 관계를 가지고 남자가 되고나니 치오리가 평범해 보였다.
지금의 치오리는 기가 센 여자로 보였다.

"너 전혀 다른 사람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나는 그대로야. 아니면 빌빌대는 모습이 더 좋은걸야?"

"아니…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더 이상해. 쓸데없이 허세가 늘었다고 해야 하나. 정신이 나간 거 같아."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너무 콧대를 세웠나. 지나치게 자신감을 높여 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은 분위기다.

"1달은 짧아, 그런데 이 여유라니. 너 포기한 거야?"

"포기한 게 아니야. 굳이 티를 낼 필요가 있을까? 나는 너랑 정식으로 사귀고 싶어. 결혼도 하고 나는 짝수가 좋아 그러니 아이는 넷이 좋겠어."

"어디까지 가는 거야… 그리고 누가 너랑 결혼해서 애를 낳는데?"

"그렇게 될 거야. 그러려고 너한테 고백한 거야."

치오리는 기가 막혀하며 코웃음을 치고 컵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 물어보지 않았는데, 너 말이야 왜 이렇게까지 나한테 집착하는 거야?"

치오리에게 한눈에 반한 이유. 뻔하게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무명 이라는 신분으로 티바트를 떠돌아다녔고 그중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많다는 이나즈마. 이나즈마 출신 여자들 가운데 치오리는 지금까지 본 여자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다.
이나즈마의 보물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절세미인이다.
그렇다고 외모만 보고 치오리에게 한눈에 반하지 않았다.

항상 날카롭고 차가워 보이고 직설적인 말들 뿐이지만, 오랫동안 지켜봤기 때문에 치오리가 겉과 다르게 내면은 누구보다 상냥하고 다정한 부드러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예리한 타치 같은 검이고 뇌명의 재단사라는 살벌한 별칭으로 불리고 있어도 실상은 부드러운 여자다.

"한 성깔 하는 고양이 같달까. 하지만 친해지면 한없이 순한…"

"하."

쳐다보는 시선이 예리하다못해 베일 것만 같았다.
방금 치오리에게서 번개가 파직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어째 예감이 업어치기 한판으로 부티크 밖으로 쫓겨나갈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치오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양손을 뻗어 얼굴을 붙잡았다.
무미건조 한 치오리의 얼굴이 바로 가까이 있으니 가슴이 뛰었다.
적진주 같이 새빨간 눈이 빤히 보고 있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야."

"고양이라고 해서 미안 해. 업어치기 만큼은……"

"긴장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린다."

치오리가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얼굴을 들이밀어 입술을 포개었다.
어제와 같은 거칠고 난폭한 키스가 아니라 상냥한 연인의 키스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혀가 사랑스럽게 노크하듯이 들어와 혀를 감아 포옹하듯이 비비며 체온을 나누는 것만 같았다.
달콤하면서 씁쓸한 채액이 입안으로 들어왔고. 귀를 막고 있으니 끈쩍하고 달콤한 키스 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리는 기분이다.

입술을 천천히 때며 치오리가 입술을 핥아주며 한 발 물러섰다.

"어제 내가 망친 첫 키스는 이걸로 샘샘이 하지 않을래?"

"어?…… 어… 어. 그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30점이야."

여전히 무표정 했지만 한결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 오픈 시간이니까, 그거 마시고 나가. 대신 저녁에 보자."


한편 두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을 창밖으로 보았던 푸리나는 화들짝 놀라 골목으로 도망치듯이 갔다.
어잘하고 있을지 걱정돼서 부티크에 왔지만 설마 치오리가 가게 안에서 키스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튼 둘 사이가 생각보다 잘되고 있다는 거라 기뻐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푸리나는 가슴이 아프고 이상하리만큼 분하고 슬펐다.

치오리가 너무 얄밉고 분해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자기 가슴을 부여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더 잘 어울릴 자신이 있는데. 내가 더 친한데 자신에게서 하나뿐인 친구마저 가져가려는 치오리가 미웠다.

하지만 친구가 불행해지고 슬퍼하는 모습도 원하지 않았던 푸리나는 이대로 나만 참고 있으면 된다고 옛날 처럼 혼자 가슴에 묻어두기로 했다.


"아닌 척 연기 하자. 그래, 푸리나 너는 할 수 있어. 연기는 전공이잖아…"

심호흡을 크게 하며 푸리나는 아무렇지 않은 또 다른 가면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