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그 뒤로는 어쩐지 평화로운 나날들이 지나갔다.

마치 지난 일들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러던 어느날 평소처럼 유선이와 함께 공부를 하고 있는데 문득 유선이가 나에게 말했다.

“있잖아. 한번 생각해봤는데.”

“응?”

“나, 나중에 정치를 해보는 건 어떨까?”

“정치? 갑자기?”

“응.”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유선이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으니까.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유선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깊이 고민하고 있어? 그냥 농담이야.”

“딱히 농담을 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았는데.”

내 말을 들은 유선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게.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사람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에 힘없는 선의처럼…. 공허한 건 없지.”

“응.”

“그래서 차라리 정치를 해서 사람간의 화합을 추구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어쩐지 정치인 유세를 주의 깊게 듣는다 했더니. 정치에 관심이 생겨서 였나.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는 부산이다.

과거 사태가 터지고 나서 해안가로 도망친 사람들이 그나마 가장 안전하게 정착했던 곳이 부산이어서 부산이 수도가 됐다나.

서면 참사나 금정산 학살등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따라서 지금 과거의 국회에 해당하는 중앙의회도 행정부도 대법원도 모두 부산에 있다.

오고 가면서 여러 정치인들을 봐왔을 유선이가 이런 말을 꺼내는 것도 딱히 이상할 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구정물.

그런것에 유선이를 순순히 넘겨주기엔 유선이가 너무 아까웠다.

“나는 개인적으로 반대야.”

“응? 왜?”

“바뀔 것 같았으면 진작에 바뀌었겠지. 정치는 누가 하든 똑같아. 달라질게 없어.”

거기에 유선이는 내로라 하는 전국의 인재들이 모이는 부산고등인문학교에서 전교 2등을 할 정도의 수재다.

진짜로 정치인 코스를 타버리면 곤란하지.

“…그런가. 하지만 정치는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힘을 만들고 그 힘으로 의견을 관철하는 거잖아? 그저 거리를 두고 있는 것도 조금….”

“사람이 모이는 게 중요한 거라면 차라리 시민단체를 만들어보는 건 어때?”

“시민단체?”

유선이의 정치로의 관심을 끊어보고자 한 말이었지만 유선이는 생각보다 흥미롭게 내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확실히, 시민단체도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아니면 서약 수호청에 들어가던가. 서약을 수호하는 일을 하는 것도 결국 화합 아니겠어?”

“서약 수호청이라…흐음…. 하지만 거기도 아무나 들어가는 곳은 아닐텐데.”

“너는 ‘아무나’가 아니잖아.”

“하지만 거기엔 허락받은 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어. 중앙의회하고도 분리되어 있어서 간섭도 안된다던데….”

유선이와 나의 대화는 어느새 정치에서 서약 수호청으로 돌려져 있었다.

누군가의 관심을 돌리기엔 여러가지 화두를 던져주는 것 만큼 좋은게 없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뭐, 이건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은 네 공부를 봐주기로 한 날이었지? 그림으로 봐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전부 알려줘. 내가 알려줄게.”

“응, 항상 고마워.”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지.”

유선이는 나에게 싱긋 웃어보이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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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 이후의 세계.

세상은 ‘그 날’ 이후로 크게 변했다.

어디서 부터 이 역병이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설령 아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초반의 대학살 때 모두 죽어 사라졌다.

더 이상 인류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었고. 인류의 빈자리는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과 바이러스가 점령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구원을 찾아 해안가로 남쪽으로 도망쳤다.

적어도 그곳은 안전할 거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도망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더 많은 좀비 무리였고 사람들은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이러한 학살은 몇몇 뛰어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인간 무리가 안전지대를 만들고 그 안전 지대가 넓어져서 하나의 도시 국가를 이룰 때까지 계속 되었다.

이후로는 인간과 좀비의 대립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대립으로 그 양상이 바뀌었는데 이러한 양상은 좀비가 이성을 되찾고 인간들을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시기가 될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기숙사 안에서 책을 읽던 은하율은 조용히 책을 덮었다.

가증스러운 화인과 그걸 감싸주는 어떤 아이가 떠올라서였다.

지금같은 시대가 아닌 과거 인류의 전성기였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넘치는 기쁨을 줬을 재능의 소유자.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겠지.

“….”

은하율이 속한 곳의 법칙대로라면 그가 지은 죄는 두 개였다.

화합이 용납이 되지 않는 시대에서 함부로 화합을 외친 죄.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들에게 연민을 가진 죄.

“큭….”

은하율은 처참하게 물어뜯긴 팔의 상처를 움켜잡았다.

지금처럼 날씨가 우중충한 날이면 언제나 미미한 통증이 올라오는 팔.

그리고 이러한 통증은 은하율로 하여금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잠시 팔을 움켜잡고 있던 은하율은 밖으로 나와 난간에 기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은하율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와 난간에 기댔다.

“안녕.”

은하율이 옆을 힐끗 보자 평범한 인상의 여자가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지금은 학업에 집중하고 싶은데요. 제가 따로 도와야 할 일이라도?”

“알고 있어. 그냥 지나가다가 얼굴 보러 온 거야.”

두어번 난간을 손가락으로 두드린 뒤 은하율이 말했다.

“원장님은 잘 지내고 계시나요?”

“잘 지내고 계시지. 언제나 건강하신 분이니까.”

“활동은 잘 이어지고 있나요?”

“지금은 학업에 집중하고 싶다며?”

“그리고 따로 도울 일이 있냐고도 물어봤죠.”

“한마디를 안 지는 구나.”

“그건 키운 사람 잘못이 아닐까요?”

“뭐, 활동은 잘 이어지고 있지. 벌레같은 좀비들이 숨도 못쉬게 만들 계획도 잘 이어지고 있고.”

난간에 기댄 여자를 잠시 바라보던 은하율은 곧 마음에 걸리는 걸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난번 화합의 날 때 일 일으킨 거. ‘우리’가 한 일인가요?”

‘우리’라는 말에 여자는 말없이 앞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세련된 방법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네요. 희생자가 나왔으니.”

“그래서 반대하나?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또 터질건데.”

“더 이상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없었으면 좋겠는데요.”

“뭐, 이름만 올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것보단 이렇게 뭐라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여자의 말에는 명백히 가시가 있었다. 그렇기에 은하율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저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라구요. 이건 원장님도 허락한 일이었을 텐데요?”

“그래서 그동안 우리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어라? 그건 안돼. 조직은 끊임없이 돌아가야 하지. 가만히 있으면 고이고 썩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최근에는 학교 내에서도 우리들을 방해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어?”

여자의 말에 은하율은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그 애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입만 살아서는 끊임없이 일을 일으키는 걸 좋아할 뿐이라구요.“

“입만 산 녀석은 이 학교에 입학 할 수는 없지. 그리고 목에 칼을 맞지도 않고. 곧 죽을 예정이었던 좀비들이 구해지지도 않아. 있잖아. 이런 식으로 과소 평가를 하다가 큰코를 다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거든. 아니면 하율이 너. 그 애한테 뭔가 특별한 감정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건 없어요! 다만…. 아깝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아쉽잖아요! 그런 인재가…. 그냥 죽어서 사라진다는 건.”

”아깝다고 생각해서 병문안을 가서 그렇게 오랫동안 죽치고 있었어? 너, 그게 우리가 벌인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우리가 오면 설득해서 돌려보낼 생각이었지? 그 애를 위해서.”

여자의 말에 은하율은 입을 다물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이번에는 방해하지마. 네가 그 애한테 복잡한 감정을 품은 건 알아. 하지만 반드시 명심해둬. 그 애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이라는 걸 말이야. 알아듣겠어?”

“….”

“대답해.”

“알겠…어요. 이번에는 개입하지 않을 게요. 절대로….”

인재는 언제나 부족하다. 이렇게 인구가 별로 없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그렇기에 반대편에 설 가능성이 있는 인재는 반드시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은하율은 마지막으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자에게 물었다.

“이건…. 원장님의 지시인가요?”

은하율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원장님의 지시야.”

“…알겠습니다.”

“도우라고 하진 않겠어. 그저 방해만 하지마.”

“네….”

은하율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여자는 이미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